041 기적을 바라는 귀족 (2)
한동안 아돌프를 노려보던 로제는 이윽고 시선을 아딘에게로 돌렸다.
‘참아.’
아딘은 입모양으로 로제에게 이야기했다.
로제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후 이내 시선을 자기 앞에서 어정쩡하게 선 것도 아니고 앉은 것도 아닌 자세로 있던 이명 환자에게 손을 뻗었다.
잠시 후, 이명 환자는 병에서 치유됐고 그는 활짝 웃으며 로제에게 감사를 표한 뒤 조심스럽게 후문을 통해 빠져나갔다.
‘이런 잡년이!’
명백하게 자신을 무시하는 로제의 처사에 아돌프의 표정이 구겨졌다.
“내 말이 말 같지 않는가!”
아돌프가 고함을 질렀다.
로제가 고개를 획 돌리며 타오르는 눈빛으로 아돌프를 노려봤다.
“저딴 무가치한 천한 것들을 치유할 시간에 내 아들을 치유하란 말이다!”
“뭐가 천하고 무가치하단 거야!”
[꽈르릉-!]
순간, 마른하늘에서 날벼락이 치며 그대로 마차에 내리꽂혔다.
순식간에 마차에는 불이 붙었고, 말들은 그대로 감전사했다.
그 엄청난 능력에 기사들은 당황하며 무기를 꽉 쥔 채 창끝으로 로제를 겨눴고, 아돌프는 눈을 부릅뜬 채 턱수염을 파르르 떨었다.
“로제!”
아딘은 로제를 불렀다.
로제는 주먹을 꽉 쥔 채 아딘을 바라보았다.
아딘은 미소를 지으며 참으라 입 모양으로 이야기한 후 마법 주머니에서 메이스 2개를 꺼내 양손에 쥐고는 로제 앞을 가로막았다.
“이것들이!”
“감히 영주님께!”
기사들은 내심 불안해하면서도 아돌프의 앞이었기에 짐짓 강한 척하며 아딘을 향해 한 마디씩 던졌다.
“감히 내 영토에서 내 허락도 없이 이렇게 치유 사역을 하는 것도 모자라, 감히 내 재산을 망가뜨리고, 내 명령을 업신여기고, 내 권위를 무시하다니! 너희들이 그러고도 살기를 바라느냐!”
아돌프의 아퐁어는 그대로 아딘과 로제에게 전달됐다.
로제가 주먹을 꽉 쥐며 이를 갈았고, 아딘은 빠르게 아돌프를 향해 응수했다.
“당신네 영토에서 버림받은 환자들을 치유해준 것에 감사를 표하지는 못할망정 알량한 권력 하나만 믿고 이렇게 마음대로 오라 가라 하는 건 올바른 일이란 말인가? 천계의 신들이 그대에게 맡긴 백성을 무시해놓고 이제 와 그 권위를 내세우겠다고?”
아딘의 말에 아돌프가 주먹을 꽉 쥐며 부들부들 떨었다.
“당장 저것들을 체포해!”
영주의 갑작스런 명령에 기사들은 당혹스러워하며 밍기적거렸고,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아딘은 피식 웃은 후 불칸의 갑옷을 장착했다.
번뜩이는 섬광과 함께 찬란한 황금빛 불칸의 갑옷으로 무장한 아딘이 메이스로 전투태세를 취했다.
“이, 이, 이……!”
아돌프가 주먹을 꽉 쥐며 기사들을 바라보며 다시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뭣들 하느냐! 어서 저것들을 체포해!”
그리고 그때, 알프레드가 나타났다.
“오랜만입니다, 백작님.”
알프레드의 등장에 일순간 분위기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아딘과 로제 그리고 아돌프는 모두 알프레드를 바라봤다.
“그런데 오랜만에 오신 것치고는 상당히 무례하군요.”
“슈타인하르츠 가문이 낄 일이 아니다.”
“제가 경영하는 우리 가문의 여관에서 일어나는 일이 어떻게 우리 가문의 일이 아니란 겁니까?”
알프레드는 불칸의 갑옷을 입은 아딘을 한 차례 바라본 후 그와 아돌프 사이에 서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우리 가문의 일은 곧 제 형수님 가문의 일이기도 하고, 형수님 가문의 일은 형수님 모친 가문의 일이기도 하지요. 안 그렇습니까?”
알프레드의 말에 아돌프는 주먹을 꽉 쥔 채 부들부들 떨어야 했다.
“브라운실트 가문이 대단한 가문이긴 하지만, 발터하임 가문이나 하이센 가문보다 대단하다 할 수 있겠습니까?”
게마인샤프트에 존재하는 35개의 독립 영주 중 가장 큰 세력을 자랑하는 두 가문이 언급되자 아돌프는 결국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아돌프는 로제를 향해 아퐁어로 말했다.
“내 아들은 치료가 필요하다.”
아돌프를 향해 로제가 차가운 어조로 대답했다.
“치료를 받으려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려!”
“난 귀족이란 말이다! 말을 삼가라!”
“귀족이고 뭐고 치료는 내가 하는 거야! 내가 그렇게 하라면 하는 거야!”
“이, 이……!”
한동안 부들거리던 아돌프는 이내 휙하고 돌아서며 후문을 나섰다.
기사들은 안도하는 표정으로 그 뒤를 따라 황급히 정원을 벗어났다.
“에이. 이건 또 언제 다 복구하냐?”
그들이 사라지자 알프레드는 인상을 찌푸리며 감전사한 4마리 말과 불타는 마차 그리고 짓이겨진 정원을 바라보곤 혀를 찼다.
“고맙습니다.”
불칸의 갑옷을 해제하고 무기를 도로 집어넣은 후 아딘이 이야기했다.
알프레드는 미소를 지으며 짧게 대답할 뿐이었다.
“내 영역에서 유세 떠는 게 보기 싫더라고.”
그렇게 자칫 무력 충돌로 이어질 뻔했던 일은 또다시 해프닝으로 끝나는 듯 보였다.
로제의 치유 사역은 다시 시작됐고, 병자들은 여관 직원들이 말의 시체와 불탄 마차를 처리하는 것을 힐끔거리면서도 다시 줄을 서서 로제로부터 치유를 받기 시작했다.
“망할 것들! 천박한 것들!”
다른 기사의 뒤에 앉아 말 안장을 붙잡은 채 성으로 돌아가며 아돌프는 욕을 계속해서 내뱉었다.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야!”
아돌프의 분노로 가득한 목소리에 기사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일으키는, 나병 환자마저도 치유한다는 신비로운 힘을 가진 소녀.
그리고 황금 갑옷으로 무장한 범상치 않은 남자.
그런 사람에게 무얼 어떻게 할 수 있으랴?
기사들은 그런 생각을 품은 채 아돌프의 분노에 찬 고함을 귓등으로 들으면서 브라운실트 성으로 내달렸다.
그렇게 1시간 정도 달려 대략 절반 정도 왔을 무렵이었다.
반대편에서 한 남자가 말을 타고는 빠르게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브라운실트 백작가의 하인이었다.
“무슨 일이냐?”
아돌프는 하인을 보며 물었다.
하인은 말에서 내린 후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이야기했다.
“마, 마, 막내 공자님이…… 마, 막내 공자님이…… 조, 조금 전…… 시, 신들의 품으로……”
[풀썩-!]
“백작님! 백작님!”
“영주님!”
막내아들의 사망 소식을 듣자마자 그대로 아돌프는 혼절하며 말에서 떨어졌다.
* * *
늦은 밤.
로제의 치유 사역이 끝나고 후문이 닫혔다.
치유받은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처소로 돌아갔고, 아직 받지 못한 사람들은 후문 뒤편 사유지에 삼삼오오 모여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아딘과 로제는 알프레드가 갖다 준 야식을 먹으며 한 테이블에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로제.”
“네, 오라버니.”
“아깐 정말 위험했어.”
“심장에 무리가 가지는 않았어요.”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야. 보는 눈이 너무 많은 데 그런 식으로 함부로 힘을 쓰는 것 말이야. 정말 위험했어.”
“하지만…….”
로제는 무언가 말을 하고 싶어하는 듯 보였지만 차마 말을 잇질 못했다.
그런 로제의 속마음을 읽은 아딘이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귀족이라서, 거드름피우는 모습이 혐오스러워서 그랬던 거야?”
아딘의 물음에 로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딘은 씁쓸한 표정으로 가만히 손을 뻗어 테이블 위에 올라온 로제의 손을 잡아 주었다.
“그래. 나도 싫더라고. 그런 식으로 막무가내인 모습이, 백성의 목숨을 무가치하게 여기는 모습이. 참 싫더라.”
아딘의 말에 로제가 그를 바라보았다.
“사실 좀 속이 후련하긴 했어. 아까 로제가 번개를 떨어뜨렸을 때 말이야.”
아딘의 말에 로제가 배시시 웃었다.
아딘은 가만히 로제의 손등을 엄지로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정말 잘했어. 화가 나도 최소한 선은 지켰잖아. 말들이 불쌍하긴 하지만…… 그래도 그 자리에서 그 귀족이랑 기사들을 모두 죽인 것보단 나은 선택이었어. 확실하게.”
“오라버니 말이 계속 떠올라서…….”
“그래. 앞으로도 화가 나거나 하면 최대한 살상을 하지 않는 선에서, 심장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위협하는 용도로만 힘을 써보도록 하자. 알겠지?”
“네.”
아딘은 로제에게서 손을 떼고 이내 약지를 내밀었다.
로제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아딘의 손모양을 따라했다.
아딘은 그대로 로제의 약지에 자기 약지를 건 후 엄지를 치켜들었다.
“어…… 내가 어디서 배운 맹세법인데, 이렇게 약지를 걸고 엄지끼리 마주치면 그 맹세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맹세가 된다고 해.”
“반드시 지켜야 하는 맹세요?”
“응. 난 로제가 아까 말한 대로 해줬으면 좋겠어.”
“음…… 맹세를 어기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음…… 신의가 없는 사람이 되는 거지.”
“신의가 없는 사람…….”
로제는 잠시 고민했다.
아딘은 미소를 지으며 그 고민을 기다려 주었다.
잠시 후, 로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 엄지를 아딘의 엄지에 갖다 붙였다.
아딘은 미소를 지었다.
로제도 활짝 웃어보였다.
그렇게 두 사람의 밤은 지나가고 있었다.
* * *
광명력 992년 7월 7일 새벽.
브라운실트 성.
막내공자 아돌프의 방.
혼절한 채 브라운실트 성으로 후송됐던 아돌프 폰 브라운실트 백작은 사제의 기도를 받고 눈을 떴다.
그는 곧장 막내아들의 방으로 달려갔고, 그곳에서 더 이상 숨을 쉬지 않는 막내의 모습을 보고는 다시 혼절했다.
그런 그를 다시 사제가 기도를 통해 깨웠고, 마침내 아돌프는 막내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며 오열했다.
오열은 밤부터 시작해 새벽까지 이어졌고 브라운실트 성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 아돌프의 장성한 두 아들들, 며느리들, 어린 손주들, 첩들, 기사들, 가신들, 하인들, 하녀들 모두가 잠에 들지 못했다.
그렇게 새벽까지 통곡하던 아돌프는 별안간 울음을 멈추더니 자기 집무실로 사제와 함께 들어가고는 문을 걸어 잠갔다.
“크흠.”
뢰벡의 광명교 주임사제 요하네스는 헛기침을 하며 아돌프의 눈치를 살폈다.
아돌프는 창밖을 바라보며 뒷짐을 진 채 요하네스를 등지고 있었다.
“슈타인하르츠 여관에 성녀를 참칭하는 가증스런 것들이 치유 사역을 한답시고 무식한 백성들을 홀리고 있소. 들으셨소?”
아돌프의 물음에 요하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들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고.”
“헌데 어찌하여 마녀재판에 세우지 않고 계시는 것이오?”
“네?”
아돌프가 뒤로 돌아 요하네스를 바라봤다.
그 핏발 선 눈에 요하네스는 흠칫했다.
“성녀를 참칭하는 것은 중대한 범죄요. 어찌 주임사제께서는 그 요망한 것을 마녀재판에 세우지 않느냐는 말이오!”
“그, 그게…… 마녀재판으로 세우기에는 그 행위에 악함이 없고, 또 마녀로 지목한 고발인 다섯 명도 없는데 어찌…… 그리고 재판에 회부를 하려면 주임사제단 협의회에서 주임사제 셋 이상의 동의를 받아야……”
“그따위 요건 내가 알 바야!”
아돌프가 고함을 질렀다.
요하네스는 흠칫했다.
“여긴 당신이 유학했던 샤펠 제국이 아니야! 귀족이라고 함부로 저 천한 개돼지들을 잡아 가둘 수 없어! 그 명분을 지금 내가 만들어달라 하는 거잖아!”
“배, 백작님……”
“내가 미쳤다고 당신네 사원에다 매달 그 큰 액수의 돈을 봉헌한 줄 알아! 다 이럴 때 나를 위해 움직여 달라고 봉헌한 거잖아!”
아돌프의 직설적인 말에, 그 절규 섞인 고함에 요하네스는 결국 다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요하네스를 향해 아돌프가 거의 입에 거품을 물다시피 하며 고함을 지르곤 삿대질했다.
“당장 그 마녀를 마녀재판에 세워! 세워서! 내 앞에! 내 지하 감옥에 처 집어넣을 수 있게 하란 말이야! 당장! 당장! 당장!”
요하네스는 깜짝 놀라 손을 벌벌 떨었다.
그리곤 침을 한번 꿀꺽 삼킨 후 대답했다.
“배, 백작님…… 이, 이런 식으로 사제를 혀, 협박……”
“내가 당신네 모래알 같은 광명교 교단을 무서워할 것 같아! 돈만 바라보는 버러지 같은 것들을 내가!”
“배, 백작…….”
“군말 말고 당장 마녀재판에 회부해! 내 아들을 죽게 만든 그 개 같은 것들을 당장 잡을 수 있게 하란 말이야! 내 돈을 처먹었으면 그만한 대가를 내놓으라고! 이 더러운 돼지 같은 위선자야!”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