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0 기적을 바라는 귀족 (1)
광명력 992년 7월 4일 저녁부터 시작된 로제의 치유 사역에 관한 소문은 순식간에 뢰벡 전역으로 퍼졌다.
“슈타인하르츠 여관에 성녀님이 계시다는구먼.”
“앉은뱅이도 일으키시고 소경도 눈 뜨게 하신다는데?”
“어서 가 보자고!”
인구 5만의 교역 도시 뢰벡에서 철저히 소외된 가난한 자들, 그 가운데에서도 소외된 병든 자들이 속속들이 슈타인하르츠 여관 후문 사유지로 모여들었다.
모여든 사람들 중 한 무리가 치유를 받으면 새로운 무리가 그 자리를 채웠다.
그리고 치유를 받은 무리는 다시 도시로 퍼져 로제에 관한 이야기를 퍼뜨리고 다녔다.
그렇게 치유 사역이 시작된 지 사흘째인 7월 6일 정오, 마침내 로제에 관한 소문은 뢰벡의 영주 아돌프 폰 브라운실트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됐다.
“성녀?”
아돌프는 가신을 바라보며 물었다.
전체가 금으로 덮인 의자에 앉아 자신을 내려다보는 아돌프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며 가신은 이야기했다.
“빈민들이 그리 부르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치유한다고?”
“네. 사원으로 가는 길목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 소경을 치유한 게 사역의 시작이라 합니다.”
“앉은뱅이 소경을 치유해?”
아돌프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곱게 기른 그의 턱수염도 함께 부들거렸다.
아돌프는 의자 팔걸이를 손으로 꽉 쥔 채 거친 호흡과 함께 말을 내뱉었다.
“사실이렸다?”
“앉은뱅이 소경을 치유한 모습은 확인하지 못했지만, 크고 작은 병에 걸린 빈민들을 치유한 모습은 다수로부터 목격됐습니다. 어설픈 사기꾼은 아닌 듯합니다.”
사기꾼은 아닌 듯하다는 그 말에 아돌프는 거칠게 호흡하며 다리를 덜덜덜 떨었다.
그 모습을 보며 가신은 굳은 표정으로 아돌프에게 이야기했다.
“막내 공자님의 병을 한 번 그 성녀라는 여자에게 맡겨 보심이 어떨는지요?”
가신의 말에 아돌프는 즉답을 하지 못했다.
‘아돌프의 병을?’
아돌프는 잠시 숨을 죽인 채 가신을 바라보며 고민했다.
가신은 그의 침묵을 기다려 주었다.
잠시 후 아돌프는 천천히 입을 열어 가신에게 명했다.
“…… 당장 가서 그 성녀라는 자를 이곳으로 끌고 와라.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상관 없으니, 반드시 끌고 와라.”
“네, 분부 받들겠습니다.”
가신은 곧장 아돌프의 집무실에서 빠져나갔다.
가신이 나간 후 아돌프는 손가락으로 정신 사나울 정도로 의자 팔걸이를 치고 다리를 떨어댔다.
잠시 후, 그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집무실 밖에서 대기 중이던 기사와 함께 그는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겨 막내 아들의 방으로 들어갔다.
“끄으으……”
끊임없이 신음하며 식은땀을 흘리는 막내아들.
첫째나 둘째와는 달리 어려서부터 온갖 사랑을 다 주며 키웠던, 그래서 이름도 자기 이름을 따 아돌프라 지어주었던 이 막내아들.
너무 오냐오냐하며 자란 탓에 어릴 때부터 비뚤어졌고, 그래서 13세 때부터 집창촌을 들락거리며 창부들과 어울린 망나니.
결국, 14세라는 어린 나이에 온갖 성병과 그로 인한 합병증에 시달리며 죽어가는 아이.
“아돌프…….”
자기 이름을 딴 막내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아돌프는 눈물을 흘렸다.
그는 천천히 막내에게 다가갔다.
막내의 곁에서 코와 입을 두건으로 가린 채 그를 간호하던 하녀가 아돌프에게 두건을 건넸다.
하지만 아돌프는 그것을 받지 않은 채 막내아들의 손을 잡았다.
하녀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아돌프를 바라봤다.
‘성녀가 나타났다고 한다. 나면서부터 불구였던, 신들의 저주를 받은 자들까지도 낫게 해주었다고 한다. 기다려라. 조금만 참고 기다려라. 곧 그 성녀라는 자를 이곳으로 끌고 올 테니까. 부디 그때까지만 버텨다오…….’
아돌프는 그대로 두드러기 같은 발진이 가득한 막내의 손을 자신의 이마에 댄 채 한동안 말없이 흐느끼고 또 흐느꼈다.
* *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성녀님! 감사합니다!”
지독한 비염에서 해방된 중년 여인이 로제에게 절을 하며 그녀의 손을 잡고 놓지를 않았다.
로제는 중년 여인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고, 한동안 감사를 표하던 중년 여인은 뒷사람에게 차례를 넘겨준 후 신들을 향한 찬송을 흥얼거리며 슈타인하르츠 여관 후문을 나섰다.
중년 여인의 뒤를 이어 지독한 치통에 시달리며 벌써 썩은 치아 3개가 뽑힌 남성이 로제 앞에 무릎을 꿇었다.
로제는 남성의 머리 위 10cm 허공에 손을 올린 후 눈을 감은 채 힘을 끌어 올렸다.
곧 무형의 에너지가 강렬한 느낌으로 남성의 치아로 향했다.
그를 괴롭히던 치통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썩어가던 치아도 모두 원상복구 됐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성녀님 만세! 만세! 만세!”
남성이 만세 삼창을 하며 자리를 떴고, 뒤이어 또 자기만의 병을 가진 사람이 나타났다.
“흐음…….”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로제가 사역을 시작한 후 단 한 번도 놓치지 않고 지켜보던 아딘이 심각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걱정되나?”
아딘의 곁에서 뒷짐을 지고 선 채 로제의 사역을 같이 보던 알프레드가 물었다.
아딘은 못마땅한 눈으로 알프레드를 흘겨보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동생이 며칠째 쉬지도 못하고 저러고 있는데 걱정이 안 되면 그게 오라비요? 남이지?”
아딘의 대답에 알프레드는 웃음을 터뜨렸다.
“좋은 게 좋은 거 아닌가?”
그러면서 알프레드는 다시 로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때마침 로제에게 관절통을 치유 받은 노인이 비키고 그 자리에 나병 환자가 무릎을 꿇었다.
어지간한 병을 가진 사람들이 모두 모인 곳에서도 독보적으로 눈에 띄고, 또 배척받는 환자의 등장에 아딘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용의 유전자가 있는 만큼, 어지간한 독이나 병균에는 안전하겠지만…… 그래도 한센병 환자라니…….’
아딘은 살짝 손을 떨며 침묵했다.
‘좀 힘들 수도 있겠는데?’
이미 썩어 문드러지기 시작한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자세를 취한 나병 환자를 보며 로제는 가볍게 심호흡했다.
그리고 그녀가 막 나병 환자의 머리 위 10cm 허공에 손을 얹고 힘을 분출하려 할 때였다.
“어험!”
“물러나! 이놈들아 물러나란 말이야!”
콧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중년 남성과 철제 흉갑을 입은 기사가 거드름을 피우며 정원으로 들어섰다.
두 사람은 말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마치 병자들과 접촉하는 것조차 질색이란 표정을 지어 보이며 로제 앞으로 다가왔다.
“헉!”
그러다 중년 남성은 로제 앞에 무릎 꿇고 있던 나병 환자를 발견하고는 기겁을 하며 말을 뒤로 뺐다.
병자들 모두가 눈을 내리깔았고, 알프레드는 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으며, 아딘과 로제는 인상을 찌푸린 채 둘을 바라보았다.
“어흠.”
나병 환자를 보고 추태를 보였던 중년 남성은 다시 거드름을 피우며 로제를 내려다보았다.
“그대가 소위 성녀라 불리우는 치유 사역을 하는 여인인가?”
게마인샤프트 서부방언이었기에 로제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곤 그대로 아딘을 바라봤다.
아딘은 로제에게 중년 남성의 말을 통역해주었고, 로제는 중년 남성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감히 영주이신 브라운실트 백작님의 허락도 없이 이곳에서 병자들의 병을 치유한 것 자체가 중대한 죄에 해당하지만, 자비로우신 브라운실트 백작께서는 그대를 벌하는 대신 도리어 그대의 능력이 보다 가치있는 일에 사용되도록 하시는 데 뜻을 두셨다.”
중년 남성의 말은 조금 쉽게 로제에게 통역됐다.
로제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중년 남성이 턱을 치켜든 채 말을 마무리했다.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따라 브라운실트 성으로 이동하도록 하라. 그대의 힘은 이런 무가치한 자들이 아닌, 보다 가치 있는 분의 생명을 위해 쓰여야 할 것이다.”
그 말을 차마 아딘은 통역해 줄 수 없었다.
아딘이 입을 다물자 로제가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뭐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오라버니?”
“그게…….”
아딘이 차마 통역하지 못한 채 이글거리는 눈으로는 중년 남성을, 당혹스러운 눈으로는 로제를 바라보며 고민했다.
“저 병자들은 무가치한 것들이니 자기들과 함께 영주의 성으로 가 보다 가치 있는 사람의 병을 치유해달라고 했다.”
아딘이 고민하는 사이 알프레드가 쑥 치고 들어와 로제에게 보다 자극적으로 통역해주었다.
순간 로제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무가치하다고? 도대체 사람 목숨이 뭐가 무가치하고 또 가치 있다는 거야?”
로제가 분을 토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딘은 시치미 뚝 떼고 있는 알프레드를 노려본 후 로제의 곁으로 가 섰다.
‘이 자리에서 저 둘을 죽이면 곤란해.’
아딘이 곁에 서자 로제의 분노는 살짝 누그러졌다.
하지만 누그러졌을 뿐, 그 기세는 여전히 사나웠다.
“말을 해 봐! 도대체 뭐가 무가치하고 가치 있다는 거야!”
로제가 아퐁어로 쏘아붙이고, 그의 곁에 선 아딘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려보고, 알프레드는 특유의 무심한 표정으로 자신을 하찮게 바라보자 중년 남성은 당황했다.
“이, 이것들이! 나는 자비로우신 뢰벡의 영주 아돌프 폰 브라운실트 백작께서 보내신 그분의 사자다. 어찌 감히!”
그 말이 끝난 순간,
[휘유우우웅-!]
강한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젠장!’
아딘은 곧장 로제의 앞으로 가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로제.”
“……”
로제는 아딘과 눈이 마주치자 거칠게 호흡하며 입을 다물었다.
다행히 순식간에 토네이도가 될 것처럼 불어닥치던 바람은 이내 잠잠해졌다.
‘여기서 로제가 사람을 죽이게 할 수는 없어. 보는 눈도 너무 많고, 자칫 이 아이가 쌓은 명성이 후퇴할지도 몰라.’
아딘은 가만히 로제의 손을 쓰다듬어 준 후 다시 중년 남성을 바라보았다.
그사이 알프레드가 두 사람에게 다가가 무어라 이야기하고 있었다.
중년 남성과 기사는 분노한 표정으로 아딘과 로제를 바라볼 뿐, 별다른 말이나 행동은 하지 않았다.
“흥!”
로제는 두 사람을 향해 콧방귀를 뀐 후 다시 나병 환자 앞으로 갔다.
그리곤 곧장 그의 머리 위 허공에 손을 얹은 후 힘을 방출했다.
순식간에 나병 환자의 몸에 새살이 돋아나기 시작했고, 그의 피부는 병에 걸리기 이전처럼 깔끔해졌다.
그 장면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한 중년 남성과 기사는 이내 빠르게 후문으로 빠져나가 브라운실트 성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 * *
오후에 있었던 가벼운 충돌은 다행히 해프닝 수준에서 끝난 듯 보였다.
아딘과 함께 저녁을 먹으며, 화가 나더라도 보는 눈이 많을 때는 사람을 다치게 하지 말라는 훈계를 들은 후 로제는 다시 차분한 마음으로 병자에 대한 치유를 시작했다.
내일 밤이 지나면 치유 사역도 할 수 없는 만큼, 그녀로서는 단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렇게 저녁이 늦은 밤이 돼 갈 무렵이었다.
“물러나라! 어서 물러나!”
소란과 함께 후문에 줄을 서 있던 병자들이 모두 우르르 해산하며 길을 터 주었다.
그 사이로 사두마차 한 대가 창과 메이스, 도끼 등으로 무장한 기사 여섯과 함께 들어왔다.
정원 바닥의 꽃과 풀을 짓밟으며 들어온 마차는 이내 멈춰 섰고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내려왔다.
고집스럽게 생긴 50대 남성, 뢰벡 영주 아돌프 폰 브라운실트 백작의 등장이었다.
아돌프는 천천히 로제에게 다가왔다.
아딘이 가만히 그녀의 곁으로 가 섰다.
아돌프는 오만한 눈으로 아딘을 힐끔거린 후 다시 시선을 로제에게 돌리고는 이야기했다.
“난 아돌프 폰 브라운실트라고 한다. 이곳 뢰벡의 영주이자 게마인샤프트 서부 연합의 맹주인 브라운실트 백작가의 가주이기도 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유창한 아퐁어는 그대로 로제에게 확실히 전달됐다.
로제는 인상을 찡그리고 어금니를 꽉 깨문 채 아돌프를 바라봤다.
그 도발적인 시선을 피하지 않고, 아돌프는 이야기했다.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지. 내 막내아들 아돌프가 죽어가고 있다. 넌 당장 짐을 싸서 나를 따라라. 내 아들을 치유해 준다면 네게 후하게 보상해주겠다.”
로제는 한동안 가만히 아돌프를 노려보기만 할 뿐, 가타부타 말을 하질 않았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