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9 기적을 일으키는 소녀 (4)
<알프레드 폰 슈타인하르츠>
<광명력 962년 3월 3일 생>
<슈타인하르츠 남작가 차남>
<슈타인하르츠 여관 경영자>
<뢰벡 시민 자문위원회 자문위원>
<슈타인하르츠 가문의 그늘에서 벗어나 언젠가는 자기만의 가문을 이루겠다는 꿈을 품고 있다.>
여관 주인이 자신과 로제를 찾는다는 직원의 말에 아딘은 잠시 직원을 대기시켜놓고 황급히 두루마리를 펼쳤다.
알프레드에 관한 정보에서 딱히 이상하거나 위험한 점을 찾지 못한 아딘은 두루마리를 품에 넣은 채 로제와 함께 직원을 따라갔다.
“어서오시오.”
여관 본체 3층에 자리한 알프레드의 사무실에 들어서자 사무실의 주인은 아딘을 여유로운 미소로 맞이했다.
“반갑습니다.”
아딘은 가볍게 그에게 크게 무례하지도 않고, 또 크게 비굴하지도 않은 수준에서 인사를 했다.
로제는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아딘의 곁에 서서 아딘을 따라 알프레드에게 인사했다.
알프레드는 그런 아딘과 로제를 유심히 살핀 후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이리로 와 보시오.”
아딘은 의도를 알 수 없는 알프레드의 행동에 의구심을 품으면서도 천천히 그와 거리를 유지한 채 창가로 향했다.
그리고 그는 창문을 통해 정문 밖에 모여든 가난한 병자들의 무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저 사람들…….”
아딘은 말을 하다 말고 로제를 바라보았다.
로제도 병자들을 확인하며 침을 꼴깍 삼키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잠시 허공에서 마주쳤고, 이내 둘은 다시 눈길을 창밖으로 돌렸다.
그리고 두 사람의 그런 행동을 확인한 알프레드는 슬쩍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했다.
“저 병자들은 이곳에 병자를 치유하는 성녀가 있다며 저렇게 몰려들었소.”
아딘은 알프레드를 바라봤다.
“뭐라고 하고 있는 거에요?”
로제가 아딘에게 물었다.
아딘이 그녀를 바라보며 아퐁어로 이야기해 주었다.
“저 병든 사람들이 성녀를 찾아서 왔다나봐. 아마 로제 널 이야기하는 것 같아.”
로제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녀의 시선이 다시 병자들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아퐁어로 대화하는 것을 들으며 알프레드는 씩 웃었다.
‘역시 저 여자애였어.’
알프레드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아딘에게 말했다.
“듣기론 성녀는 키가 작고, 그 곁의 남자는 담갈색 머리카락을 지녔다 하던데…….”
아딘이 천천히 알프레드를 바라보았다.
“담갈색 머리의 남자와 키 작은 성녀가 우리 여관으로 들어왔고, 하필 어제 특실을 잡은 두 사람의 용모가 설명과 일치하니 경영자로서는 확인해 볼 수밖에.”
알프레드의 말에 아딘은 로제를 바라보았다.
로제는 입을 다문 채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상황에서 아니라고 부인해봐야…….’
아딘은 다시 알프레드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제 동생이…… 조금 특별한 힘이 있습니다. 그걸로 날 때부터 보지 못하고 서지 못하는 걸인을 치유해 주었습니다. 그게 저렇게 소문이 나서 이렇게 된 것 같습니다.”
아딘의 말에 알프레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딘이 곧 말을 이었다.
“경영에 폐가 됐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짐을 싸서 떠나겠습니다. 저희가 떠난다면 저들도 분명 흩어질 겁니다.”
아딘이 떠날 것을 이야기하자 알프레드가 손을 가로저으며 그를 만류하기 시작했다.
“워워워. 너무 앞서가지는 마시오. 그리고 너무 고루하고 전형적으로 생각하지도 마시오.”
알프레드의 말에 아딘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알프레드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비록 사업가고 이윤을 최고의 덕목으로 보지만, 꼭 그것 하나만 가지고 모든 행동을 결정하는 게 아니오.”
알프레드가 시선을 병자들에게로 돌렸다.
“나 또한 가난하고 병든 자들에 대한 안쓰러운 마음을 항상 가지고 있소. 단지 내가 그들을 어찌 구원해줄 방법이 없기에 갑갑해하기만 할 뿐이지.”
알프레드의 시선이 로제에게로 향했다.
자신을 향한 알프레드의 시선에 로제는 흠칫하면서도 눈을 깔지 않고 그의 시선을 맞받았다.
“이름이 뭐지?”
알프레드가 유창한 아퐁어로 로제에게 물었다.
로제는 흠칫하면서도 이내 알프레드를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로제라고 해요.”
“로제? 성씨는……?”
알프레드의 물음에 아딘이 대신 대답했다.
“스미스입니다. 저는 존 스미스고 제 동생은 로제 스미스입니다.”
“아, 제니스 공화국에서 오셨군. 근데 동생이랑 사용하는 언어가?”
“라폴리움 샤펠인 거주지에서 살았습니다.”
“아.”
아딘의 태연한 거짓말에 알프레드는 별다른 의문을 품지 않았다.
그는 다시 로제를 바라보며 물었다.
“스미스 양. 혹시 가진 힘을 또 사용할 생각은 없나?”
알프레드의 말에 로제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알프레드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저 병자들을 모두 치유해줄 생각이 없냐는 거지.”
그러자 아딘이 정색하며 알프레드에게 이야기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겁니까?”
알프레드가 아딘을 바라봤다.
“제 동생이 무슨 사제라도 됩니까? 아니면 의사입니까? 한 번의 선의로 도와준 걸 여기서 저 사람들을 위해 계속하라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아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알프레드가 무심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난 지금 스미스 양에게 묻고 있소이다, 존 스미스 씨.”
알프레드의 말에 아딘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그를 노려봤다.
알프레드는 태연하게 시선을 로제에게로 돌렸다.
“로제 스미스 양?”
로제는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눈짐작으로만 200명은 돼 보이는 병자들과 그 가족들을 바라보며, 그 초라한 행색을 바라보며 로제는 손을 꼼지락거렸다.
한동안 사무실에 침묵이 내렸다.
침묵 속에서 로제는 고민했고, 알프레드는 그 대답을 기다렸으며 아딘은 알프레드의 속셈을 눈치채고는 주먹을 쥐고 부들거렸다.
‘알프레드 폰 슈타인하르츠. 야망이 있지. 로제가 여기서 저 병자들을 치유하면 로제는 성녀가 되는 거고, 슈타인하르츠 여관은 성지가 되는 거야. 그리고 이곳의 경영자는 성녀의 기적을 예비한 사람이 되는 거고.’
아딘은 콧김을 세차게 내뿜었다.
‘더러운 장사꾼 같으니.’
알프레드는 그런 아딘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가만히 꼼지락거리는 로제의 손을 바라보며 그녀가 마음을 정하길 기다릴 뿐이었다.
그렇게 10분이 지났다.
10분간 아무런 말 없이, 그 자리에 잠자코 서 있던 아딘과 알프레드를 향해 로제가 말했다.
“하겠어요.”
그녀의 말에 아딘과 알프레드는 희비가 엇갈렸다.
“훌륭한 선택이오, 스미스 양.”
“로제…….”
자신을 향한 두 상반된 시선을 바라보던 로제는 이내 눈길을 아딘에게로 돌렸다.
“하게 해주세요, 오라버니. 몸에 무리가 안 갈 정도로 제가 잘 조절할 테니까. 하게 해 주세요.”
로제와 만난 이후 처음으로 아딘은 그녀의 결의에 찬 눈빛과 직면했다.
잠시 굳은 표정으로 그녀의 결심을 바라보던 아딘은 이내 알프레드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제 동생과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 내가 자리를 비켜 드리지. 5분이면 되겠소?”
“그래 주시면 되겠습니다.”
알프레드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후 사무실을 나섰다.
그가 나가고 문이 닫히자 아딘이 로제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로제. 저 많은 사람들을 치유하면 심장에 무리가 안 갈 수가 없어.”
“제가 잘 조절할 수 있어요.”
“가벼운 환자는 그렇게 해줄 수 있겠지. 하지만 심각한 중환자면 네 심장이 멀쩡할 수 없을 텐데?”
“심장에 무리가 오기 전에 멈출 수 있어요. 딱 그 느낌을 제가 알아요, 오라버니.”
아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 심장도 심장이지만, 넌 저 장사치가 왜 이런 제안을 했다고 생각하니?”
“그건…….”
“절대 선의가 아니야. 저 장사치는 널 하나의 상품으로 만들려는 거야. 기적을 일으키는 성녀가 병자들을 치유해준 슈타인하르츠 여관. 그리고 그 기적이 가능하도록 배려한 정의로운 귀족. 이게 저 사람이 원하는 거라고.”
“……”
“로제가 저 사람들을 치유해주게 되면 저 귀족 장사치의 농간에 놀아나는 꼴밖에는 안 되는 거야.”
로제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시선이 다시 환자들에게로 향했다.
잠시 후 그녀는 환자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 농간에 놀아나서…… 저 가난한 사람들이 치유될 수 있다면…… 결과적으로 선하게 되는 거 아닌가요?”
“뭐?”
로제가 아딘을 바라봤다.
“하게 해주세요. 저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사제를 부를 돈도 없고 의사를 부를 돈도 없어요. 아프면 그냥 아픈 데로 있다가 더 심각해지거나 죽어버린다고요.”
“로제……”
“하게 해주세요. 제가 여기를 떠나기 전에, 한 사람이라도 치유할 수 있도록…… 오라버니…… 좋은 일이라고 했잖아요. 선한 일이라고 했잖아요.”
로제의 말에 아딘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로제를 빤히 바라봤다.
로제는 그 큰 눈동자로 아딘을 바라보고 있었다.
간절한 눈빛으로, 애원하는 눈빛으로.
‘마녀에서…… 성녀로?’
아딘의 시선이 환자들에게로 향했다.
아딘의 침묵이 이어졌다.
로제는 초조한 눈으로 아딘을 바라봤다.
잠시 후, 아딘은 입을 열었다.
“7월 8일.”
“네?”
아딘의 시선이 로제에게로 향했다.
“딱 우리가 머무는 마지막 날 밤까지만 하는 거야.”
로제가 활짝 웃었다.
“오라버니!”
로제는 그대로 아딘을 끌어안았다.
“고마워요! 오라버니!”
자기 허리를 양팔로 감고 얼굴을 가슴팍에 박은 채 방방 뛰며 좋아하는 로제의 모습에 아딘은 쓴웃음을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이런 식으로 로제가 선해지면 선해질수록 나한테도 좋은 거니까.’
아딘은 가만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문을 열고 들어온 알프레드가 바라보며 씩 웃었다.
* * *
7월 4일 저녁.
슈타인하르츠 여관 특실로 이어지는 후문이 개방됐다.
“환자들은 이곳으로 따라오십시오!”
건장한 체격의 경비원들은 정문에 자리하고 있던 환자 무리를 후문으로 이끌었다.
이윽고 200에 이르는 환자 무리는 슈타인하르츠 여관 후문 쪽 알프레드의 사유지에 진을 치게 됐다.
그 사람들을 바라보며 로제가 아퐁어로 이야기했다.
“8일 밤까지만 제가 힘이 닿는 데까지 여러분들의 치료를 돕겠습니다.”
아딘은 그 말을 그대로 게마인샤프트 서부방언으로 통역해주었다.
“우와아아!”
“감사합니다!”
“성녀님 만세!”
환자들은 모두 환호했고, 일부는 로제를 향해 절을 하기도 했다.
비록 그들의 말을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그 느낌은 확실히 전달받은 로제는 알 수 없는 뿌듯함을 느끼며 웃어보였다.
그렇게 뜻하지 않은 로제의 치료는 시작됐다.
환자들 대다수는 가벼운 질병이나 부상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만성 비염부터 단순 위염, 관절염 등, 사제에게 가볍게 기도를 받거나 의사의 주기적인 치료만 있어도 해결할 수 있는 질병은 크게 로제의 심장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치유가 가능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막힌 코가 뻥 뚫린 사람부터 관절이 더 이상 삐거덕거리지 않는 사람, 칼로 찌르는 것 같은 위통이 깨끗이 나은 사람들이 모두 로제에게 절을 한 후 여관을 떠났다.
중증 환자의 경우에도 로제는 크게 무리하는 것 없이 치유할 수 있었다.
혈우병 환자, 숨 쉴 때마다 폐부가 찢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죽어가던 사람, 한쪽 다리를 아예 못 쓰게 된 사람 등 의사는 아예 손쓰지도 못하고, 사제 가운데서도 굉장히 수양이 깊은 늙은 사제들만이 치유가 가능한 환자들이 모두 병에서 말끔히 해방됐다.
중증 환자와 그 가족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로제에게 절했고, 로제는 비록 피로는 느낄지언정 가슴 벅찬 뿌듯함을 느끼며 웃을 수 있었다.
그리고 로제의 곁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딘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래. 발스에서 사람을 죽인 만큼 또 뢰벡에선 사람을 살리면 천계의 신들도 로제를 좋게 여기겠지. 어쨌건 이곳은 그들의 관할이고, 사후에는 선악의 무게로 심판을 받게 되니까.’
문득 자신이 만약 여기서 죽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에 대해 아딘은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이내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죽기 전에 다 끝내고 어떻게든 현실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야겠지.’
그렇게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