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38화 (38/175)

038 기적을 일으키는 소녀 (3)

지금으로부터 992년 전,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조그만 어촌에 불과했던 아퐁에서 마우세스 레비는 40세의 나이에 천계의 신들로부터 계시를 받았다.

이전까지 평범한 어촌 유지에 불과했던 마우세스 레비는 이후 1년간 천계의 신들과 소통하며 그들이 전하는 지식과 도덕적 교훈, 율법 등을 받아 적었고, 이후 그는 자신이 받아 적은 계시를 들고 세상에 신들의 말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 시대에 대중적으로나 귀족적으로나 널리 퍼져 있던 원시적인 자연물 숭배 신앙은 순식간에 마우세스 레비가 포교한 광명교 신앙으로 대체되어 갔다.

논리정연한 교리 체계라든가, 인신숭배 같은 미개한 풍습에 대한 배격 등 선진적인 종교의 내용도 대체되는 이유 중 하나였지만, 가장 큰 이유는 신성력이었다.

기도만으로 인간의 상처와 병을 치유해 주는 신성력의 존재는 곧 광명교의 존립 근거였고, 마우세스 레비의 포교가 진실임을 증거하는 것이었다.

그 신성력의 기반 위에 세워진 광명교는 99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영향력을 대륙 전역에서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신이 직접 하사해 준 신성력이라 하더라도 선천적인 장애까지는 치유하지 못했다.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비록 그 부모가 아무리 대단한 권문 귀족이라 하더라도, 황금으로 온 집안을 도배해놓은 부자라 하더라도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아…… 내, 내가…… 아…… 이, 이게……”

그리고 지금, 광명력 992년 7월 4일 오후, 게마인샤프트 서부의 관문 도시 뢰벡에서 선천적으로 앞을 보지 못하고 두 다리로 서질 못했던 자가 자기 두 눈으로 자기가 서 있는 모습을 보게 됐다.

“아……!”

정말 수도 없이 세상을 두 눈으로 볼 수 있었더라면, 두 다리로 서서 걸을 수 있었더라면 하는 상상을 하곤 했다.

매일 잠들기 전, 꼭 두 눈을 뜨고 두 다리로 일어설 수 있게 해달라고 속으로 신들에게 빌었다.

만약 아침에 일어났을 때 두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된다면, 두 다리로 서서 움직일 수 있게 된다면, 과연 난 어떻게 반응할까? 라는 생각을 하며 잠들곤 했다.

“아아……!”

그리고 지금, 이렇게 두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두 다리로 땅을 밟고 있는 이 순간, 그는 눈물을 흘리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아아…….”

그는 두 손으로 로제의 신발을 잡았다.

그리고는 자기 손과 로제의 신발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로제의 눈가에도 이슬이 맺혔다.

“감사합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그대로 걸인은 이마를 땅에 박은 채 감사합니다라는 말만 되뇌었다.

게마인샤프트 서부방언을 로제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걸인의 말에 담긴 진심은 그녀에게 확실히 전달됐다.

“봤어? 봤어?”

“눈을 떴다고? 저 거지가?”

“일어나기까지 했잖아.”

“이게 도대체 뭐야?”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두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수군거리며 걸인과 로제를 번갈아가며 바라봤다.

‘자리를 피해야겠어.’

돌아가는 분위기가 뭔가 심상찮음을 느낀 아딘은 그대로 로제의 손목을 잡고 여관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걸인의 감사와 눈물에 알 수 없는 감정이 목구멍을 간질거리는 느낌과 왠지 모르게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가까스로 억제하고 있던 로제는 갑작스럽게 아딘이 자신을 끌고 가자 화들짝 놀라 그를 바라봤다.

잔뜩 굳어 있는 아딘의 표정에 로제는 심장이 덜컥거렸다.

‘오라버니한테 여쭤보지도 않고 능력을 써서…….’

로제는 고개를 숙인 채 빠르게 발을 놀려 아딘과 보조를 맞추려 애썼다.

사람들의 시선은 아딘과 로제를 따라갔다. 그중 일부는 시선만 따라간 게 아니라 직접 발로 두 사람의 뒤를 따르기도 했다.

그 결과 아딘과 로제가 슈타인하르츠 여관 정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대략 오십여 명의 사람들이 목격했다.

로제와 아딘이 정문 너머로 사라지자 이내 그들은 다급한 표정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본체를 지나 특실 정원에 도착한 아딘은 그제야 로제의 손목을 놔주었다.

손목에 선명하게 남은 아딘의 손자국을 바라보며 로제는 고개를 푹 숙였다.

“후우.”

아딘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호흡을 정리한 후 로제를 바라봤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미동조차 하지 않는 로제를 바라보며 아딘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로제.”

“네…….”

로제의 목소리는 팍 잠겨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동반할 것 같은 그 습기 찬 대답에 아딘은 머릿속으로 최대한 어휘들을 정리한 후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잘했어.”

“……?!”

로제는 고개를 들어 아딘을 바라보았다.

아딘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이야기했다.

“정말 잘했어. 네가 대견해. 로제.”

그 말에 결국 로제는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고개를 떨군 채 팔뚝으로 눈을 가리고 소리죽여 우는 그녀의 모습에 아딘은 가만히 로제에게 다가가 그녀를 안아 주었다.

“오라버니…… 흐윽…….”

로제는 아딘의 품에서 기어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딘은 가만히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며 그녀의 감정이 정리되길 기다렸다.

그렇게 5분 정도 조용히 오열한 끝에 로제는 가까스로 진정할 수 있었다.

손등으로 눈물을 닦는 그녀에게 품에서 손수건을 건네준 아딘은 그녀가 그것으로 눈물을 마저 닦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왜 울었어?”

“오라버니가…… 혼내실 줄 알고…….”

“내가? 내가 왜 로제를 혼내?”

“함부로…… 힘을 사용해서…….”

로제의 말에 아딘은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다.

“만약 로제가 그 힘으로 나쁜 짓을 했다면 내가 혼내거나 했겠지. 하지만 로제는 착한 일을 했잖아.”

아딘의 말에 로제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제도, 영주도, 부자도 구제해주지 못하던 사람이야. 평생을 남의 자비에 의지해야만 하는 운명을 갖고 태어났던 사람이었지. 그런 사람의 운명을 네가 바꿔준 거야. 그 힘으로.”

“그냥…… 옛날에 제가 구걸할 때가 생각나기도 해서…….”

“그런 게 바로 인간이 가진 선한 마음의 한 부분이야. 조금 전 로제가 보여준 행동은 정말 훌륭한 행동이었어.”

아딘의 이어지는 칭찬에 로제는 마침내 활짝 웃을 수 있었다.

밝아진 로제의 표정을 보자 아딘은 한 차례 미소를 지어준 후 분위기를 바꿨다.

“하지만 앞으로는 조심해. 저번에도 이야기했지만, 심장에 무리가 생길 거 같으면 당장 그만둬야 하고, 또 보는 눈들이 많을 때는 가급적 삼가고.”

심장과 관련된 이야기는 로제가 수긍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보는 눈들에 관한 이야기에 대해서 로제는 의문을 가졌다.

“왜 보는 눈들이 많을 때는 삼가야 해요?”

“아까 같은 그런 선천적 장애가 있는 사람은 사제들의 신성력으로도 어떻게 못 해. 알지?”

로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사람을 치료해줬잖아. 그럼 그걸 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니?”

“그건…….”

그런 것까지는 미처 염두에 두지 않았던 만큼 로제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런 로제의 모습에 아딘은 가만히 그녀의 손등을 엄지로 쓰다듬어주며 따뜻한 어조로 이야기해주었다.

“앞으로는 보는 눈들이 많을 때에는 가급적 힘을 사용하지 마. 정말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면, 절대로. 알겠니, 로제?”

“네. 그렇게 할게요.”

로제의 말에 아딘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을 놓았다.

“자, 그럼 그 이야기는 그만하고. 옷부터 갈아입자.”

아딘은 마법 주머니에서 로제의 옷들을 꺼냈다.

“샀으면 바로바로 입어야지?”

아딘의 말에 로제는 활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7월 4일 오후에 사원으로 가는 길에서 있었던 기적에 관한 이야기는 순식간에 뢰벡의 서민들 사이에서 퍼져나갔다.

목격자가 한둘이 아니었던 만큼, 소문은 빠르게 전파됐고, 곧 그 이야기는 도시 곳곳에서 사제와 의사 모두에게 외면받은 가난한 병자들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슈타인하르츠 여관. 거기 정문으로 성녀님이 한 남자와 함께 들어가셨어.”

어느새 로제의 호칭은 성녀가 돼 있었고, 병자들은 그런 성녀가 들어갔다는 슈타인하르츠 여관 앞으로 속속들이 모여들었다.

“분위기가 이상한데?”

“그러게.”

여관 입구를 지키고 있던 직원들은 초저녁부터 여관 앞에 모여들기 시작한 가난한 행색의 병자들과 그 가족들을 바라보며 불안한 표정으로 수군거렸다.

그들의 표정에 별다른 적의가 보이지는 않았지만, 비슷한 행색의 사람들이 점차 그 수를 불리기 시작하자 직원들은 혹시 모를 습격에 떨 수밖에 없었다.

결국, 직원들은 상황을 여관의 경영자이자 슈타인하르츠 남작의 차남인 알프레드 폰 슈타인하르츠에게 보고할 수밖에 없었다.

“거지들이 모여 있다고?”

“거지는 아니고…… 가난뱅이들 같습니다.”

“그거나 무슨 차이야? 어쨌건 그게 왜?”

이제 갓 서른이 된 알프레드는 깔끔하게 기른 금빛 콧수염을 다듬다 말고 직원을 바라봤다.

“별다른 적의는 보이지 않지만, 그 숫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혹시 폭동이라도 일어난다면……”

“지금 뢰벡에 폭동이 일어날 건덕지가 있나?”

“그건 아니지만…….”

“가서 기다려. 이것만 마저 다듬고 직접 나가 볼 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직원이 나간 후 거울을 보며 마저 콧수염을 다듬은 알프레드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흐음…….”

3층에 자리한 사무실 창문으로 정문 밖의 상황을 확인한 그는 잠시 그 모습을 무심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잠시 후 벽에 걸린 큰 거울 앞으로 간 알프레드는 옷매무새를 단정히 정리한 후 모자를 쓰고는 천천히 사무실을 나섰다.

잠시 후 정문에 도착한 알프레드는 직원을 말마따나 잔뜩 모여 있는 가난한 병자들을 바라보며 무심한 표정을 짓더니 대기 중이던 경비원 세 사람을 이끌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잘 차려입은 알프레드가 덩치 좋은 경비원 셋과 다가오자 병자들은 모두 움찔하며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들과 2m 정도의 거리를 두고 멈춰 선 알프레드는 한차례 쓰윽 그들을 바라본 후 입을 열었다.

“난 슈타인하르츠 남작 프란츠 님의 차남 알프레드 폰 슈타인하르츠다. 이 여관의 경영자이기도 하지.”

알프레드의 자기 소개에 병자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잠시 그 웅성거림을 즐기기라도 하듯 말을 멈춘 알프레드는 이내 다시 입을 열어 그들에게 이야기했다.

“그대들이 내 여관 앞에 모여 있는 게 따로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말해줄 수 있겠나?”

알프레드의 말에 병자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눈치를 봤다.

그러다 이내 한 소년이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이, 이곳에 벼, 병을 고쳐주시는 성녀님이 계시다 해서 와, 왔습니다.”

모친으로 보이는, 창백한 안색에 비쩍 마른, 계속해서 기침하는 여인과 함께한 소년의 말에 알프레드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성녀?”

알프레드가 경비원들을 바라봤다. 경비원들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 성녀란 사람의 인상착의를 알려줄 수 있나?”

알프레드의 말에 소년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직접 로제를 본 것이 아니었기에, 목격자를 찾기 위함이었다.

“키, 키가 굉장히 작고 모자를 쓰고 있으셨습니다.”

“다, 담갈색 머리카락을 한 남자 한 사람과 같이 다니고 있습니다.”

곧 여기저기서 로제를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이 쏟아졌다.

“잠시 기다리게.”

알프레드는 그대로 다시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손님 응대를 담당하는 직원을 손짓으로 불렀다.

“키 작은 여자랑 담갈색 머리카락의 남자가 손님 중에 있는가 확인해 봐.”

알프레드의 말에 직원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바로 존재를 확인해주는 직원의 모습에 알프레드는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제 특실에 투숙하신 고객의 인상착의와 비슷합니다.”

“특실?”

“네. 두 사람이 투숙했는데 담갈색 머리카락 남자와 키가 작은 소녀였습니다.”

알프레드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서 내 사무실로 모셔와.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 하고 말이야.”

“네.”

직원은 곧 특실로 달려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알프레드는 찐한 미소를 지어 보인 후 천천히 사무실로 되돌아갔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