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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37화 (37/175)

037 기적을 일으키는 소녀 (2)

광명력 992년 7월 3일.

늦은 밤.

샤펠 제국 수도 아퐁.

황궁 어전.

검은 옷을 입은 샤를이 조용히 포도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의 후방 2m에선 로이가 어둠 속에 몸을 반쯤 숨긴 채 조용히 그를 경호하고 있었다.

“엘드랄.”

샤를이 로이를 불렀다.

“네, 아이드 님.”

“차기 장로는 누구를 앉히는 게 좋을까?”

“지난번에 아이드 님께서 라르고 드 로망스 백작을 앉히기로 하신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건 이제 샤를이 교주로 올라가면서 생긴 공석을 메우는 거고.”

“알베르토의 공석은 전례대로 북부의 유력 귀족으로 채우심이 가장 안전하지 않겠습니까.”

“그래. 근데 그 북부 귀족이 누가 돼야겠느냐 이거지.”

샤를의 말에 로이는 입을 다물었다.

로이가 침묵 속에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샤를은 가만히 포도주를 음미했다.

잠시 후, 로이가 입을 열었다.

“북부가 조금 더 자기들끼리 분열되시기를 바라시는 겁니까?”

그 말에 샤를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 조르주 3세의 몸으로 왔을 때, 그리고 그 뒤에 20명의 몸을 거치면서 나름 북부 촌것들을 잘 잡아뒀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알베르토는 아이드 님의 충복이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근데 그 인간의 아들도 그래 보였나?”

장례식 동안 아퐁은 전국에서 모여든 귀족들로 붐볐다.

민란으로 혼란한 동부와 발스 정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온 귀족들은 새 황제의 시대에 힘의 균형이 어디로 갈지에 대해 치열하게 눈치싸움을 했다.

그리고 그때, 샤를은 북부 귀족들의 중심 역할을 하며 북부 대표 행세를 하던 에르네스토의 눈빛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었다.

“아무래도 북부 놈들을 한 번 더 서로 싸우게 만들어야겠어.”

“적당한 후보를 추려 오겠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샤를은 포도주를 그대로 쭉 넘겼다.

“급박한 시기야. 내가 인간 행세를 하며 어떻게든 막았다고 여겼는데 결국 불칸의 갑옷이 나타났어. 불칸의 갑옷이 나타났다는 말은 곧 네르갈의 목걸이와 불멸의 검도 등장한다는 소리겠지.”

로이가 스르륵 그의 곁으로 다가와 잔을 다시 채워준 후 뒤로 빠졌다.

“오히려 나한테는 호재가 될 수도 있어. 마음 같아서는 북부 귀족이고 뭐고 다 쓸어버리고 싶지만, 그동안은 천계의 것들 눈치를 살피느라 그러질 못했지. 힘을 발휘함에 있어 제약이 너무 많았어.”

샤를은 가만히 술잔을 흔들었다.

“하지만 그 인간이 3대 신물을 모두 세상에 드러낸다면, 그리고 내가 그걸 흡수한다면…….”

샤를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일단 당분간은 국내 정세부터 해소해야 하니까, 두 년놈에 대한 추적은 멈추지. 어차피 어떻게든 세상에 자기 모습을 공식적으로 다시 드러낼 테니까.”

샤를의 말에 로이가 고개를 푹 숙였다.

샤를은 그대로 포도주를 쭉 들이켠 후 가벼운 웃음을 터뜨리며 눈을 감았다.

* * *

오랜만에 실용 마법 욕조에서 적합한 온도로 목욕을 하고, 말린 과일과 육포가 아닌 제대로 된 뜨뜻한 고급 음식으로 배를 채운 후 아딘과 로제는 각자의 방에서 딱딱한 바닥이 아닌 푹신한 침대에서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날이 밝았을 때, 종업원들이 직접 방으로 가져다준 아침 식사로 배를 든든하게 만든 후 아딘과 로제는 외출 준비를 끝마친 뒤 여관 밖으로 나왔다.

‘일단 닷새 동안 있을 거니까, 가다 먹을 요리는 뢰벡에서 떠나는 당일에 사면 되겠지. 흠…… 일단 옷을 좀 사고 무기도 좀 사야겠어.’

엘프숲 외곽을 지나는 동안 큰 위협은 딱히 없었다.

고블린들이야 아딘과 로제를 보기만 해도 화들짝 놀라며 도망을 갔고, 가끔 늑대나 곰이 나타나긴 했지만, 불칸의 갑옷을 입은 아딘이 맨주먹으로 다 처리가 가능할 정도의 위협일 뿐이었다.

게마인샤프트는 전체적으로 인구밀도도 낮고 영지와 영지, 도시와 도시가 제법 거리가 있는 곳이다.

가는 길에 몇 가지 위협 요소가 존재하긴 하겠지만, 아딘을 크게 위협할 정도는 아닐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딘이 무기를 찾는 이유는 단순했다.

주먹질이 영 취향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김현수의 폭력을 싫어하는 성향은 이미 흐려졌고…… 아딘 콘스탄틴이 결국 맨주먹보단 무기를 들고 사람을 때리는 걸 좋아했으니…… 그 영향이려나?’

사보에 지방에서 둔기로 강도를 때려 팰 때의 그 손맛을 다시 떠올리며 아딘은 손이 근질거리는 느낌에 주먹을 살짝 쥐어야만 했다.

“로제. 뭐 사고 싶은 거 있어?”

아딘은 이제는 좀 당당하게 얼굴을 들고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로제를 향해 물었다.

로제는 아딘을 바라보며 잠시 고민하더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모자 하나만 사 주세요.”

“모자?”

“네.”

그러면서 로제는 시선을 부채로 하관을 가린 채 자기들끼리 속삭이며 지나가는 모자를 쓴 귀부인들에게로 향했다.

귀족 혹은 부유한 상인의 안사람으로 보이는 두 여인을 바라보며 아딘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좋아. 그럼 먼저 옷가게부터 가야겠다.”

그렇게 아딘은 로제의 손을 잡고 두루마리의 도움을 받아 고급 수제 의복 상점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20골드의 거금을 들여 로제가 입을 옷 세 벌과 모자 2개, 그리고 자신이 입을 옷 두 벌과 망토 2개를 산 아딘은 그것들을 상점 밖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마법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마법 주머니에 집어넣지 않은 분홍색 모자를 쓴 채 잔뜩 신이 난 로제를 뒤따라가며 아딘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확실히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하고 있어.’

영웅일대기 속 로제는 버림받고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 받지 못한 채 죽음의 고비에서 용의 유전자를 각성했다.

덕분에 그녀는 광포해졌고, 노예를 부리던 귀족이나 농노를 수탈하던 영주들을 무참히 학살한 탓에 피의 마녀라는 별명을 얻어야만 했다.

아딘이 그녀를 곁에 둔 것은 첫째로는 한 소녀의 인생을 그렇게 만든 김현수라는 인간이 느낀 죄책감 때문이었고 둘째로는 강력한 그녀의 마법적 힘을 통해 복수의 성공 가능성을 높이려는 아딘 콘스탄틴의 소유욕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두 마음 모두 공통적으로 로제가 영웅일대기 원전과는 다른 인생, 즉 광포한 피의 마녀로 그 약한 마음을 간교한 자에게 이용당해 죽는 삶이 아닌, 조금 더 인간다운 삶을 누리게 만들고 싶다는 목표를 설정했다.

그런 측면에서 지난번 발스에서의 각성 이후 로제가 보여주는 모습은 그런 목표에 가장 부합한 모습이라 할 수 있었다.

‘적당히 자기주장도 이제 생겼고, 광포한 모습보다는 자신감 넘치는 모습도 생겼고.’

항상 위축되고 움츠러들어 있던 로제가 저렇게 자기보다 앞장선 채 당당하게 걷는 모습에 아딘은 흐뭇하게 웃을 수 있었다.

그렇게 아딘과 로제는 대장간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아딘은 적당히 잘 만든 칼 한 자루와 단단한 메이스 두 자루를 구매해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마법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시장에 나와 구매할 물건은 다 구매한 만큼, 아딘은 보다 여유로운 마음으로 로제와 함께 시장을 걸어 다녔다.

처음에 다소 들뜬 마음으로 방방 뛰던 로제는 이제 좀 차분해졌는지 가만히 아딘의 곁에 서서 그의 손을 잡은 채 발걸음을 맞추었다.

“오라버니.”

“응?”

“여긴 집들이 다 낮네요?”

“그렇네.”

“파세레빌은 항상 다 높은 건물들이었는데.”

“그건 파세레빌이 인구 밀도가 높고 여기가 낮아서 그래. 뢰벡 면적이 파세레빌의 2배인데 인구는 파세레빌의 절반도 안 되거든.”

“아…….”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뢰벡의 시장과 공원, 광장 등을 걸은 아딘과 로제는 식당가에서 뢰벡 지방 전통 비법으로 만든 소스를 버무린 소시지 요리로 점심을 때운 후 다시 살살 움직였다.

식사를 끝마치고 대략 30분 정도 걸었을까?

길거리에서 아이들에게 사탕을 파는 노점상 앞에서 로제가 발걸음을 멈췄다.

그녀가 멈추자 아딘도 동시에 발걸음을 멈춘 후 그녀의 시선을 따라 노점상을 바라보았다.

‘아…… 사탕…….’

노점상에서 판매하는 사탕과 그것을 바라보는 로제의 울적해진 표정을 바라보며 아딘은 입술을 살짝 깨물어야만 했다.

‘모친이 사탕 하나를 사주고 버렸다…… 로 김현수가 설정해 놨었지.’

사탕은 일종에 로제에게 있어 트라우마와도 같은 것이리라.

아딘은 조심스럽게 로제에게 물었다.

“사탕…… 먹고 싶어?”

아딘의 물음에 로제는 눈을 들어 그를 바라봤다.

그녀의 조그만 입술이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했다.

무언가 말을 하고는 싶은데, 그렇게 말이 나오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아딘은 잠시 그녀가 생각을 정리하도록 기다려 주었다.

잠시 후,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아요. 배가 불러서…….”

그러면서 로제는 아딘의 손을 쥔 채 앞으로 움직였다.

아딘은 그녀와 보조를 맞추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앞으로 소설을 쓸 때도 이것저것 고려를 많이 해야 하는 건가?’

언젠가, 복수를 끝내고, 이 세상에서 할 일을 마친 후 다시 원래 세계로 돌아간다면, 그래서 다시 소설을 쓸 수 있게 된다면, 그때는 좀 더 세심하게 설정을 짜야겠단 생각을 하며 아딘은 가만히 로제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런 아딘의 모습에 로제도 그의 팔뚝에 머리를 기댄 채 슬픔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번잡한 광장을 지나쳐 여관으로 가는 길목에 들어섰을 때였다.

“이 불쌍한 사람, 천계의 신들께서는 생명을 주셨으니 여러분들께서는 양식을 주십시오.”

광명교 사원으로 가는, 인구 유동량이 많은 길의 코너에서 한 남성이 애잔한 목소리로 구걸을 하고 있었다.

눈을 뜨지 못한 채 불편한 자세로 앉아 있는 걸인의 모습에 로제는 발걸음을 멈춘 채 빤히 그를 바라보았다.

‘시각장애에 하반신마비까지…… 흐음…….’

아딘도 안쓰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응? 로제?”

그때, 로제가 아딘의 손을 놓고 천천히 걸인을 향해 다가갔다.

아딘은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 이내 그 뒤를 따랐다.

잠시 후 걸인 앞에 도착한 로제는 쭈그려 앉은 채 그와 눈높이를 맞췄다.

“어이쿠. 귀한 분, 이 불쌍한 사람을 좀 도와주십시오.”

걸인은 자기 앞에 누군가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끼고는 로제를 향해 양손을 내밀었다.

그 모습을 로제는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걸인은 게마인샤프트 서부 방언으로 이야기하고 있었고, 로제는 샤펠 제국 공용어인 아퐁어밖에는 할 줄 몰랐기에 당연히 걸인의 말 자체는 알아듣질 못했다.

하지만 걸인의 모습에서 그녀는 오래전, 노예로 잡혀가기 전 거지 소녀로 살던 때를 떠올릴 수 있었다.

로제는 가만히 걸인의 손을 잡아 주었다.

걸인은 의아함을 느꼈다.

그 순간, 로제는 눈을 감고 용의 힘을 뿜어대기 시작했다.

용의 힘이 점차 강해지기 시작하면서 그녀의 주변 공간이 굴절되기 시작했다.

‘설마!’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아딘은 입을 벌리고 눈을 부릅떠야만 했다.

‘용의 힘은 생명력의 정수를 담고 있어. 그래서 용의 피는 만병통치제로도 통용되지.’

김현수는 분명 그렇게 설정했다.

‘하지만 용의 힘 자체로 장애까지 치유를 한다고?’

모자를 쓴 조그만 소녀가 말없이 걸인의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붙들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수군거리며 소녀가 뭘 하는지를 가만히 지켜봤다.

“저, 저기 기도는 괜찮으니까……”

걸인은 로제가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줄을 알고 만류하려 했다.

그때, 로제가 눈을 떴다.

‘아슬아슬했어.’

심장이 딱 뜨거워지고 무리가 가기 직전에, 그녀는 목적을 이룰 수 있었다.

그대로 로제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걸인을 일으켜 세웠다.

“어? 어?”

걸인은 자신도 모르게 로제의 손에 이끌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평생 아무 감각도 없던 다리에 힘이 들어가고, 엉덩이로만 느끼던 땅바닥을 발바닥으로 느끼게 되자 걸인은 당황했다.

그대로 걸인은 눈을 번쩍 뜨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헉-!”

그리고 이내 그는 자신이 스스로가 서 있는 모습을 두 눈으로 보고 있음을 자각하곤 입을 쩍 벌려야만 했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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