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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36화 (36/175)

036 기적을 일으키는 소녀 (1)

“휴우…….”

고블린산맥의 최고봉인 고블린둥지산의 검은독수리봉우리.

그곳에서 조르주는 쫙 펼쳐진 동부의 대지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나마 돌아가는 길은 좀 괜찮을 것 같습니다.”

뒤에서 그와 함께 대지를 내려다보던 휴고가 이야기했다.

조르주는 별다른 대답 없이 가만히 산 아래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아딘 콘스탄틴…… 생각 이상으로 여유롭고 자비로워.’

불칸의 갑옷을 입은 아딘이 자신의 앞에 서서 무력시위를 할 때, 조르주는 죽음을 직감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조르주는 묵시록 종단에 대한 비밀까지 아딘에게 고해 바쳤다.

그 지푸라기는 생각 외로 단단했고, 이렇게 조르주는 휴고와 함께 살아서 발스를 벗어나 남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만약 내가 자기의 진짜 정체가 아딘 콘스탄틴임을 알고 있단 걸 알았다면…… 그래도 날 살려뒀을까?’

묵시록 종단에 관한 이야기를 남김없이 털어놓으면서도 조르주는 끝끝내 아딘의 진정한 신분을 자신이 인지하고 있음을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 다급한 순간에도 본능적으로 그것만큼은 함구해야 함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그건 옳은 선택이었다.

“이동합시다.”

휴고의 말에 조르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손을 잡았다.

잠시 후, 휴고는 빠르게 공간을 접어 순식간에 수 km를 이동했다.

벌써 이틀째 이어지는 강행군이었지만, 어떻게든 빨리 파세레빌로 돌아가고픈 휴고의 강렬한 열망은 능력의 과다한 사용에서 오는 피로를 무시하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이동한 끝에 조르주와 휴고는 아믈리에로 들어서게 됐다.

농노 반란이 시작된 곳이자, 조르주와 휴고가 객사할 뻔했던 이 가난한 영지는 이제는 완전한 폐허가 돼 길고양이 몇 마리나 겨우 보일 정도였다.

“디에고 장로님의 능력은 정말 대단하긴 하오. 순식간에 이렇게 영지 하나를 몰락시키셨으니 말이오.”

조르주의 말에 휴고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리고 그런 분이 패배하셨고 말입니다.”

휴고의 말에 조르주는 입을 닫았다.

한동안 두 사람은 침묵을 지키며 가만히 폐허가 된 아믈리에를 바라봤다.

잠시 후, 조르주가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 오늘은 이곳에서 쉬는 게 좋겠소.”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은 적당히 쉴만한 곳을 찾아다녔다.

잠시 후, 그나마 멀쩡한 민가를 찾아낸 두 사람은 내부에 있던 길고양이 무리를 내쫓고는 안으로 들어가 대충 잠을 잘 채비를 마쳤다.

육포와 마른 과일로 대충 식사를 떼운 뒤 두 사람은 별다른 이야기 없이 그대로 자리에 누워 서로를 등진 채 눈을 감았다.

‘디에고 공작이 죽었어. 그 이야기는 와병 중이신 황제 폐하께 엄청난 데미지가 갔다는 건데…… 황태자 전하의 생사에 따라 달라지긴 하겠지만…….’

‘만약 황태자 전하께서도 돌아가셨다면…… 황자들과 그 외척들이 과연 가만히 있을까?’

하지만 두 사람은 전혀 잠을 청할 수 없었다.

그들이 눈앞에서 확인한 알베르토의 죽음과 샤를의 행방불명.

단순히 황금 갑옷과의 싸움에서 패배했다는 의미를 넘어서서, 두 사람의 죽음 혹은 실종은 그 자체로 제국 전체의 정세에 영향을 주는 것이었다.

묵시록 종단의 단원이기 이전에 슈드 자치령의 관료로서 두 사람이 걱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저기…… 조르주 전도자님.”

결국 휴고가 먼저 입을 열었다.

“왜 그러시오?”

“디에고 장로님하고 황태자 전하 말입니다. 무사하실 것 같다 보십니까?”

휴고의 물음에 조르주는 즉답을 하지 못했다.

“디에고 공작은 죽었고 황태자 전하는 무사하시다.”

대신 대답은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허억-!”

“으허어억-!”

조르주와 휴고는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두 사람의 눈앞에 그림자 속에 몸을 반쯤 숨긴 묵시록 종단 장로 로이가 나타나 있었다.

“로, 로이 장로님.”

“어, 어떻게……!”

두 사람은 미처 인사도 생략한 채 더듬거렸다.

그런 둘을 향해 로이가 이야기했다.

“무사한 걸 보니 황금 갑옷이 너희를 살려준 모양이군.”

로이의 말에 두 사람은 당황했다.

“그, 그게…….”

“그, 그것이…….”

말을 더듬거리는 둘을 향해 로이는 이야기했다.

“서로 귀찮을 필요는 없을 것 같군.”

그 순간, 로이의 눈이 번쩍이며 빛을 발했다.

그리고 그 빛을 보는 순간 조르주와 휴고는 눈에서 총기를 잃었다.

눈에서 빛을 발한 상태에서 로이가 물었다.

“어떻게 황금 갑옷으로부터 벗어났지?”

로이의 물음에 조르주와 휴고는 아딘에게 묵시록 종단에 관해 자신들이 아는 범위 내에서 모든 것을 실토했다는 사실을 가감 없이 술술 털어놓았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로이는 고개를 끄덕인 후 곧장 단검을 뽑아 두 사람의 목을 그어버렸다.

조르주와 휴고는 목에서 피를 분수처럼 쏟아내며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아이드 님께서 예측하신 그대로군.”

죽어가는 두 사람을 내려다보며 로이는 냉소를 지어 보였다.

“이래서 인간들이란…….”

가만히 고개를 젓던 로이는 이내 다시 그림자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하지만 그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자신이 조르주를 향해 “황금 갑옷에 대해 아는 것을 모두 털어놓아라.”라는 질문을 했더라면 보다 값진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을.

그 정보가 이제 한 늙은이의 죽음과 함께 묻히게 된다는 것을.

아믈리에의 밤은 그렇게 조용히 지나갔다.

* * *

광명력 992년 7월 3일.

밝은 태양이 중천에 떠 지상을 비추는 시간.

아딘과 로제는 다소 지저분한 모습으로 말을 탄 채 게마인샤프트 서부의 상업 영지 뢰벡으로 들어섰다.

15박 16일간 이어진 노숙은 발스에서 출발할 때만 해도 그럭저럭 때깔이 고왔던 두 사람의 용모를 굉장히 지저분하게 만들어 놓았다.

중간중간 고블린들이 모여서 물을 마시던 냇가에서 세수 정도는 했지만, 숲의 특성상 목욕이 불가능했기에 전반적으로 지저분해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다행인 것은 뢰벡에는 아딘과 로제 말고도 비슷하게 지저분한 몰골로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주목받는 일은 없다는 점이었다.

뢰벡이 제니스 공화국에서 육로를 통해 게마인샤프트로 들어와 벨로디나 왕국으로 가는 루트의 첫 관문인 만큼, 아딘과 로제처럼은 아니더라도 제법 오래 노숙하느라 지저분한 몰골을 한 보따리상인 및 용병들이 많았다.

그랬기에 두 사람은 별다른 관심을 받지 않은 채 조용히 말을 타고 이동할 수 있었다.

“워워워-!”

[히히히힝-!]

아딘이 고삐를 당기자 붉은 말이 콧김을 내뿜으며 멈춰섰다.

아딘은 그대로 로제와 함께 말에서 내린 후 어마어마한 규모의 여관 대문을 지나 내부로 들어갔다.

“어서오십시오, 여행자시여.”

마당으로 들어서자 대기 중이던 종업원이 능숙한 제니스어로 아딘에게 인사했다.

제니스에서 오는 여행객 및 상인들이 많은 만큼, 당연히 아딘도 제니스에서 왔으리라 생각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특실 1동에서 닷새간 머물 겁니다. 안내해주십시오.”

그런 종업원에게 1골드를 팁으로 건네며 아딘은 능숙한 게마인샤프트 서부 방언으로 이야기했다.

“특실 말입니까?”

종업원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아딘을 바라봤다.

그의 몰골이 도무지 특실을 이용할 만한 재력을 지닌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죄송하지만, 특실은 하루 숙박비용이 15골드입니다. 닷새간 머무신다면 75골드나 되는데……”

종업원의 말은 아딘이 마법 주머니에서 꺼낸 1백 골드짜리 금괴에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남는 건 종업원님 팁으로 줄 테니, 거스름돈은 필요 없습니다.”

그렇게 아딘은 한층 더 예의를 차리는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여관 건물 뒤편에 자리한 특실로 이동했다.

“우와-!”

여관 본채 건물 뒤편에 자리한 특실은 엄청난 넓이의 마당을 지닌, 외부와 어느 정도 격리가 된 조용한 장소였다.

<슈타인하르츠 여관>

<일반실 1박 숙박비 1골드, 특실 15골드.>

<특실은 보통 이용하는 사람이 극히 적기에 단 하나 뿐이다.>

<광명력 992년 7월 3일 현재 특실 이용자 명단 – 아딘 블라디미로비치 콘스탄틴, 로제 콘스탄틴>

필요한 것이 있으면 종을 쳐달라는 말을 남기고 종업원이 사라지자 두루마리를 꺼내 아딘은 다시 여관 정보를 확인해 보았다.

특실 이용자 명단에 자신과 로제의 이름이 뜬 것을 보며 아딘은 씩 웃었다.

‘아무렴 내가 아무런 사전조사 없이 여기 불쑥 왔겠어?’

묵시록 종단에 대한 정보라든가, 왜 조르주 3세가 300여 년 전 하이로드 가문을 멸문시켰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지만 여전히 두루마리는 실용성이 높은 물건이었다.

‘일단 뢰벡에서 닷새 동안 편하게 쉰 다음에 바로 이렇게 동남쪽으로 갔다가 라인데른에서 다시 동북쪽으로 꺾어서 가면 딱 되겠네.’

게마인샤프트 지도를 통해 최적화 루트를 다시 한 번 확인한 후 아딘은 두루마리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는 드넓은 정원에서 꽃들을 바라보며 기뻐하는 로제를 보고 흐뭇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딘은 천천히 로제에게 다가갔다.

그가 다가오자 로제가 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오라버니! 이 꽃 좀 보세요.”

로제는 이름 모를 주황색 꽃을 가리키며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향기가 너무 좋아요.”

꽃 향기를 맡아보라 하며 즐거워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노예 소녀라든가 용의 딸이라든가 하는 모습이 아닌, 정말 순수한 소녀의 감성을 보고서 아딘은 가만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아딘의 시선을 뒤로하고 로제는 한동안 정원을 돌아다니며 이 꽃 저 꽃 향기를 맡았다.

“어?”

그러다 어느 지점에서 로제는 발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목소리가 심상찮음을 느끼고 아딘은 가만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로제가 살짝 시들어버린 꽃을 가리키며 아딘에게 이야기했다.

“이 꽃은 시들었네요?”

로제의 말에 아딘은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꽃을 확인했다.

주변 다른 꽃들이 화려하게 만개한 것과는 달리 힘없이 고개를 축 늘어뜨리고 있는 것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종업원한테 이야기해야겠어.”

그렇게 이야기하며 아딘은 종이 메달린 곳으로 가 조그만 종을 흔들어 소리를 냈다.

“무슨 일이십니까?”

1분이 채 지나지 않아 종업원 하나가 헐레벌떡 들어왔다.

아딘은 그에게 시든 꽃에 관해 이야기했고, 종업원은 그것을 확인한 후 서둘러 교체하겠다고 말한 뒤 다시 밖으로 나갔다.

“로제. 들어가서 씻자.”

종업원이 나가는 것을 확인한 아딘이 로제에게 이야기했다.

“실용 마법 욕조가 여기에 2개가 있으니까, 나눠서 쓰면 돼.”

아딘의 말에 로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딘이 먼지 욕실로 들어갔고, 로제는 천천히 다른 욕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곤 다시 시든 꽃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가만히 시든 꽃과 아딘이 들어간 욕실 문을 바라보던 로제는 침을 꿀꺽 삼킨 후 다시 시든 꽃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는 꽃 앞에 무릎을 꿇은 뒤 가만히 양손을 앞으로 뻗었다.

곧 그녀의 몸에서 가공할 용의 힘이 부드럽게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심장에 무리가 가지 않을 정도로만…….’

아딘의 경고를 떠올리며 로제는 최대한 섬세하게 힘을 통제했다.

[스으윽-!]

잠시 후, 시들어 축 늘어졌던 꽃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푸석푸석해졌던 잎에는 다시 생기가 돌았고, 죽었던 향기가 다시 피어올랐다.

주변 꽃에서 꿀을 채취하던 꿀벌이 잠시 로제의 눈치를 살피다 이내 다시 자라난 꽃으로 가서 꿀을 채취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로제는 환하게 웃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장에는 아무 이상도 없어. 아무 느낌도 없고.’

그녀는 한결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욕실로 들어갔다.

“응? 뭐지? 멀쩡한데?”

“롭 그 인간이 뭐 잘못 본 거 아니야?”

“그러게?”

“일단 뭐 멀쩡한 거 확인했으니까 철수하지. 거 괜히 손님한테 책잡힐 필요는 없으니 나중에 대충 뭐 갈아뒀다고 둘러대고.”

“그래, 그러자고.”

로제가 욕실로 들어간 후 2분여가 지나 도착한 정원사들은 멀쩡하게 핀 꽃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돌아가야만 했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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