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35화 (35/175)

035 정령의 아들 (2)

광명력 692년.

노을이 진 여름 바다를 내려다보며 샤펠 제국 8대 황제 조르주 3세는 홀로 조용히 포도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 누가 짐의 고독에 동감하리오?’

25세의 나이에 황제의 자리에 올라 지난 15년 동안 열심히 살아왔다.

덕분에 샤펠 제국은 강력해졌고, 북부의 야만인들로부터 조공을 받고 동부의 미개척지를 귀족 가문 방계 자제들을 보내 개척하여 영역을 넓혔다.

교묘한 공작으로 신하들을 이간질해 그들이 하나가 되지 못하게 만들었다.

덕분에 대신들과 유력 봉신들에게 휘둘리던 선대 황제 샤를 3세와는 차원이 다른 강력한 왕권도 휘두르게 됐다.

‘그 누구도 짐의 고독을 이해하지 못하노라.’

그러나 40세의 나이에 절대 왕권을 휘두르게 된 조르주 3세에게는 극복하기 힘든 지독한 외로움이 있었다.

봉신들도, 대신들도, 그의 씨앗을 받아 궁정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기도하는 여인들도, 장성한 자식들도.

모두 그를 두려워하기만 할 뿐,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진솔한 개인적 담소를 나누고자 사람을 불러도 그들은 그저 입에 발린 아첨만 떨어댈 뿐이었다.

‘인생의 해가 보통은 60이고 길어야 80이거늘, 나는 죽는 그날까지 진정한 친구 하나 얻지 못하도다.’

그러한 슬픔 속에서 조르주 3세는 가만히 포도주를 쭉 들이켰다.

그 순간, 뜨거운 여름 바람이 창문으로부터 불어와 그의 몸을 강타했다.

“크헉-!”

그리고 그 순간, 그는 들고 있던 잔을 놓치곤 양손으로 머리를 쥔 채 바닥에 엎드려 온몸을 바들바들 떨어대기 시작했다.

“크허억-!”

괴로워하는 그의 뇌리로 사이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모든 것을 가졌지만 외롭기 그지없는 배부른 돼지. 그것이 인간을 정의하는 유일한 서술이니라.]

“크하악-!”

[운명은 그대들에게 예비된 파멸을 방관하고, 신들은 그러한 운명을 알지도 못한 채 천계에서 유유자적한 삶을 누리는 도다.]

“흐어억……”

[그대의 수중에는 운명을 바꿀 힘이 있거늘 오오-! 인간이란 존재는 자신의 힘을 자각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으로 가득하도다.]

“으으윽……”

[그대의 몸.]

“나, 정령 아이드가 차지하리니.”

조르주 3세의 떨림이 멈췄다.

잠시 그렇게 엎드려 있던 그는 천천히 바닥을 손으로 짚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우……”

가볍게 한숨을 토해내고 그는 주위를 둘러봤다.

그의 입가에 냉소가 걸렸다.

“엘드랄!”

그가 목소리 높여 한 사람을 불렀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며 궁정 환관이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새로 얻은 육체는 어때?”

조르주 3세의 물음에 환관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편합니다. 마치 정령일 때처럼. 아이드 님은 어떠십니까?”

환관의 물음에 아이드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정령에겐 없던 게 달려 있어서 불편해.”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사타구니를 손으로 툭툭 쳤다.

“뭐, 차차 적응되겠지.”

* * *

광명력 992년 6월 18일.

아침부터 황궁으로 들어가는 4개의 대문에 흰 조기가 내걸렸다.

황제가 붕어했음을 알리는 깃발이 매달리자 주변을 지나던 백성들은 잠시 그 자리에 서서 10초간의 묵념으로 죽은 황제 프랑수아 4세를 추모했다.

“황제 폐하!”

“어이 이리 가시나이까-!”

밤사이 장의사가 말끔하게 씻어놓은 황제의 시신은 그의 침실에 안치가 됐다.

그리고 그 앞에는 황후와 일곱 명의 첩 그리고 그들이 낳은 자식들이 모두 찾아와 엎드려 애통해하고 있었다.

“으허어엉-! 아바마마!”

마치 누가 더 많이 슬퍼하는가 내기라도 하듯, 황족들의 애통은 시끄럽게 침실에 울려 퍼졌다.

“황제의 장례는 황실 규범 제9조에 따라 황태자 전하께서 가문의 대표자로서 장례 일체를 주관하시면 되옵니다.”

황제의 침실과 상당히 떨어진 어전에서는 샤를과 주요 대신들이 장례 절차에 관한 회의를 열고 있었다.

“재무관은 장례 기금으로 황제 폐하의 옥체를 보존할 약물을 구매하시오. 재상은 각처에 사람을 보내 황제 폐하의 붕어를 알리고 7일 이내로 모두 아퐁으로 올 수 있게끔 조치하시오. 대장군은 아퐁 외곽 성벽과 황궁을 지키는 모든 병사에게 검은 도포를 입게 하여 황제 폐하의 추모에 동참하게 하시오.”

샤를은 능숙하게 장례에 관한 절차를 재무관과 재상, 대장군에게 지시하였다.

그 모습에 세 대신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 이내 샤를에게 고개를 숙이며 명을 받아들였다.

“동부가 민란으로 어지러운 이 시기에 국상은 자칫 북부의 귀족들과 제니스의 천박한 것들을 자극할 수도 있는 만큼, 의연한 모습을 보일 수 있도록 아랫사람들을 잘 정비해두시기 바라오.”

샤를이 말을 마치자 대신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깊게 허리 숙이며 그에게 경의를 올렸다.

“분부 받들겠사옵니다, 황태자 전하.”

“그럼 다들 자기 자리로 가보시오.”

샤를의 해산 명령에 대신들은 삼삼오오 모여 어전을 빠져나갔다.

잠시 후, 어전에는 샤를과 그의 후방 2m에서 그를 호위하는 로이 그리고 대장군 라르고 드 로망스 백작만이 남게 됐다.

라르고가 샤를에게 물었다.

“북부 귀족에 관한 이야기는 괜히 꺼내신 것 아닙니까? 어차피 거기에는 디에고 공작이 있는데 말입니다.”

그 말에 샤를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야기했다.

“디에고 공작께서도 지난밤 사망하셨소.”

“네?”

라르고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샤를을 바라보았다.

“지난밤, 발스에서 나는 디에고 공작과 함께 황금 갑옷을 확보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소.”

“황금 갑옷 말입니까? 아니, 황금 갑옷이 나타났단 말입니까?”

묵시록 종단의 전도자이기도 한 라르고는 자신은 전혀 듣지 못했던 황금 갑옷의 등장에 관한 이야기에 몹시 당혹스러워했다.

“기밀을 유지하라는 황제 폐하의 명 때문에 미처 그대에겐 알리지 못했소. 유감으로 생각하오.”

“아, 아닙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문제는 그 과정에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복병이 나타난 것이오.”

“복병 말입니까?”

샤를은 라르고에게 지난 밤 발스에서 있었던 일을 제법 상세하게 알려주었다.

디에고 공작이 정체불명의 노예 소녀가 날린 청색 화염에 맞아 죽었다는 이야기에 라르고는 창백해진 안색으로 샤를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내가 북부 귀족들을 자극하지 않게 의연함을 유지하라 당부했던 것이오. 한동안은 북부 귀족들을 통제해 줄 사람이 없으니 말이오.”

제국 내에서 황제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은 동부와 북부뿐이었다.

그중 동부는 황제가 영향력을 구태여 행사할 필요가 없는 척박한 땅이었기에 방치해 둔 것에 가까웠다.

북부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건들 수 없는 지역이었다.

오래전, 조르주 3세가 조공국으로 복속한 이후 오랜 세월에 걸쳐 동화를 시도했지만 여전히 북부는 자체적인 문화와 관습을 유지하고 있다.

광명교 덕분에 어느 정도 공통성이 생겼고, 또 북부의 맹주인 디에고 가문에 공작위를 수여하고 황실의 외척으로 삼았기에 어느 정도 관리가 됐을 뿐, 본질적으로 북부는 항상 황제가 어찌하지 못하는 지역이었다.

“디에고 공작의 장남이 있지 않습니까?”

라르고의 말에 샤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르네스토는 아직 디에고 공작만큼의 권위를 가지고 있지 못하오.”

“허어…….”

라르고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다물자 샤를이 살짝 웃으며 이야기했다.

“너무 그렇게 심각해지지는 마시오. 어차피 곧 공석이 된 두 장로 자리를 채우면 어련히 잘 풀리겠지. 안 그렇소? 로망스 장로?”

전도자인 자신을 장로라 칭하는 샤를의 모습에 라르고의 얼굴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화색이 돌았다.

그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충성을 다하겠나이다, 교주님.”

그런 라르고의 모습을 바라보며 샤를은 치아를 드러내며 미소지었다.

* * *

엘프숲 외곽 곳곳에는 제법 넓은 공터가 있다.

한때, 엘프숲이 인간의 출입을 허용하던 때에 그곳으로 열매나 나물, 땔감을 구하러 가던 사람들이 쉬어가며 자연스럽게 조성된 공간이었다.

발스에서 대략 15km 떨어진 곳에 자리한 공터에서 아딘과 로제는 첫 노숙을 준비하고 있었다.

[화르륵-!]

두루마리를 통해 지도를 확인하던 아딘은 자신이 쌓아 둔 땔감 위로 마법을 이용해 불을 붙이는 로제의 모습에 두루마리를 품에 집어 넣은 후 입을 열었다.

“로제.”

“네?”

로제는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아딘을 바라보았다.

마치 자신이 만든 불꽃이 신기한 장난감이라도 되는 양 소녀의 표정은 너무도 밝았다.

그런 로제에게 아딘은 조용한 어조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네가 힘을 가진 건 정말 축하할 일이야. 세상에 아무나 그런 힘을 갖지는 못하니까.”

“히힛.”

“하지만 로제. 네가 지닌 힘은 사람이 가져서는 안 되는 힘이야.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이 감당하기 힘든 힘이지.”

아딘이 진지한 어조로 이야기하자 로제의 표정은 곧 시무룩해졌다.

“물론 적당히 힘을 쓴다면 사람이 충분히 감당 가능한 힘이고.”

“적당히…… 요?”

“그래.”

적당히라는 말에 로제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 모습을 보며 아딘은 쓴웃음을 지었다.

‘존 크리스토퍼 하이로드도 로제가 지닌 힘의 약점을 잘 파악했지. 덕분에 제국 동부를 자기 영지로 만들 수 있었고.’

영웅일대기 2부에서, 주인공 존은 피의 마녀로 유명세를 떨치며 샤펠 제국 동부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로제에게 접근했다.

김현수가 소설 진행의 편의를 위해 존에게 부여했던, 굉장히 적중률이 높은 직감 덕분에 존은 로제의 힘이 지닌 약점을 파악했다.

비록 용의 딸이라곤 하지만, 어디까지나 로제의 근본은 인간이었다.

그런 인간이 용의 힘을 이용해 엄청난 마법을 사용하는 만큼 육체에는 엄청난 부담이 갔고, 점차 내구도가 약해지기 시작했다.

그것을 알고 존은 로제가 자신을 사랑하게끔 만든 후 고의로 그녀가 육체의 한계까지 마법을 쓰게 하여 결국 죽게 만들었다.

로제는 사실상 자살 행위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아낌없이 힘을 쏟아부었고, 결국 그녀는 존이 황제에게 부탁해 동원한 노예병들의 시체를 바라보며 쓸쓸하게 존의 발치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잔혹하게 이야기를 썼던 걸까?’

김현수가 2부를 쓰던 시기는 딱 고3부터 군 복무 사이였다.

여러모로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던 시절이었던 만큼, 그런 잔인한 스토리가 나오지 않았나? 아딘은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제는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지.’

아딘은 시무룩해 있는 로제의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고는 이야기했다.

“로제가 마법을 쓰다 보면 어느 순간 심장이 필요 이상으로 뜨거워질 때가 있을 거야. 맞지?”

아딘의 물음에 로제는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어젯밤에…… 오라버니가 그렇게 당하실 때에도 심장이 막 뜨거웠었어요.”

“그래. 딱 심장이 뜨거워지지 않을 만큼만 힘을 쓰면 돼. 알겠지? 그럼 넌 네가 가진 힘을 정말 잘 다룰 수 있을 거야. 안전하게.”

아딘은 유독 ‘안전하게’라는 단어에 힘을 줬다.

로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아딘은 그런 로제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은 후 자리에서 일어나 나무에 매여 있는 말에게 다가갔다.

말 안장에 묶여 있는 짐을 풀어 육포와 말린 과일을 꺼낸 아딘은 그것을 들고 다시 로제 곁으로 갔다.

로제와 함께 저녁을 나눠 먹은 후 아딘은 다시 품에서 두루마리를 꺼냈다.

그리곤 로제에게 그것을 보여주며 물었다.

“혹시 이제는 뭐가 보이니?”

아딘의 물음에 잠시 두루마리를 보던 로제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아무것도 안 보여요.”

“그래?”

아딘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루마리를 다시 품에 집어넣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 로제가 말을 좀 편하게 하네?’

지난밤의 광란을 거치며 로제는 용의 힘을 각성했고, 또 아딘을 보다 편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나를 죽이지 않는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한다…… 였던가?’

치열한 삶을 살다 간 어느 철학자의 명언을 떠올리며 아딘은 가만히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로제는 잠시 아딘의 눈치를 살피다 은근슬쩍 그의 팔에 머리를 기댔다.

그렇게 두 사람의 엘프숲에서의 첫날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