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4 정령의 아들 (1)
“아들아…… 쿨럭-!”
프랑수아 4세는 샤를을 부르다 말고 기침과 함께 피를 토해냈다.
그 모습을 보며 샤를의 얼굴에 핀 웃음은 더더욱 환해졌다.
프랑수아 4세는 기분이 상할 법도 하건만, 괘씸할 법도 하건만 그저 호흡을 정리하기만 할 뿐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잠시 후 피를 다 토해낸 프랑수아 4세는 힘겹게 손을 들었다.
“손을…… 잡아다오…….”
프랑수아 4세의 말에 샤를은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황제의 손을 잡았다.
한때 단단하던 이 손은 이제는 고목처럼 말라비틀어진 상태였다.
그에 비해 자신의 손은 절정기 수컷의 것답게 단단하고 힘이 있었다.
‘이게 바로 계승이지.’
슬픈 기색을 내비칠 법도 하건만, 샤를은 도리어 기뻐하는 모습만을 과장될 정도로 분출할 뿐이었다.
“너는…… 항상…… 감정에 솔직했지…… 나와는 다르게 말이야.”
“황제 폐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황태자는 언제나 솔직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쿨럭-! 그랬지…….”
“황제 폐하께서도 저처럼 감정에 솔직했더라면 지금보다는 나은 형편이 아니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인을 품지도 못한 채 이렇게 말라비틀어지시는 모습이 아들로서 참 보기 안타깝습니다.”
“쿨럭-! 쿨럭-!”
“디에고 공작이 죽었습니다. 황금 갑옷과 함께 있던 노예 소녀에 의해서 말입니다. 마법사로 추정되는데 그 힘은 대단한 수준이었습니다.”
“알베르토가…… 죽은 것을…… 내가…… 모를 수…… 쿨럭-! 쿨럭-!”
“단서는 모두 잡혔습니다. 이제 뒷일은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황제 폐하께서는 이제 편히 영면하시옵소서.”
죽어가는 아비에게 빨리 죽기나 하라는 불효.
그러나 그러한 행위를 하는 샤를의 표정은 너무나도 밝았고, 그것을 듣는 프랑수아 4세의 표정에는 별다른 슬픔이나 좌절 같은 감정이 떠올라 있지 않았다.
“아들아…….”
“네, 황제 폐하.”
“잘 자라주어서 고맙다.”
갑작스러운 프랑수아 4세의 말.
자라면서 단 한 번도 듣지 못한, 고맙다는 말.
그 말에 일순간 샤를은 혼란을 느꼈다.
‘죽을 때가 돼서 이런 건가?’
샤를의 생각과 무관하게 프랑수아 4세는 다소 편해진 얼굴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건강하게…… 강인하게…… 잘 자라주어서…… 고맙구나.”
“…… 황제 폐하께서 딱히 신경을 쓰시지 않으시니 살아남기 위해선 스스로 강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프랑수아도 내가 그렇게 키웠지만…… 넌 프랑수아보다 더 강인해졌어.”
순간 샤를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프랑수아?
그의 형제들 가운데 프랑수아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사람은 없었다.
프랑수아 4세가 후견인으로 있던 귀족 자제 중에서도 프랑수아라는 이름은 없었다.
무엇보다 그건 황제, 본인의 이름이지 않는가.
‘노망이 들었나?’
샤를은 그런 생각을 하며 가만히 프랑수아 4세를 바라봤다.
어느새 프랑수아 4세는 활짝 웃고 있었다.
뭔지 모를 불길함을 느낀 샤를은 프랑수아 4세의 손을 놓으려 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이, 이게…….”
마치 단단한 바위틈에 끼인 것처럼, 샤를의 손은 프랑수아 4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샤를은 당혹스러운 눈으로 프랑수아 4세를 바라보았다.
[파지직-!]
그 순간, 프랑수아 4세의 눈에서 강한 스파크가 일어났다.
스파크는 순식간에 뻗어 나와 샤를의 눈을 찔렀다.
“크하악-!”
눈을 통해 자신의 뇌로 들어오는 이질적인 무언가에 샤를은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말았다.
스파크는 이내 샤를와 프랑수아 4세의 몸 전체를 휘감았다.
[파츳-! 파츠츳-!]
잠시 후, 스파크는 잦아들었다.
눈을 뜬 채 멍한 표정으로 천장을 바라보던 샤를이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힘 빠진 프랑수아 4세의 손에서 자기 손을 빼낸 후 치아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침실 밖에서 대기 중이던 로이가 그림자 속에서 스물스물 기어나왔다.
“경축드리옵니다, 아이드 님.”
로이의 말에 샤를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래로 축 늘어진 프랑수아 4세의 팔을 침대 위로 올려주었다.
프랑수아 4세는 믿을 수 없단 눈으로 샤를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어, 어, 어, 어떻게……”
프랑수아 4세의 말에 샤를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평생의 소원이 황제로서 죽는 것이었다는 걸, 난 잘 알고 있다. 이제 그 소원대로 황제로서 죽게 됐으니, 원 없이 저승으로 가겠구나.”
“아…… 아바…… 마마…….”
순식간에 죽어가던 아버지의 몸으로 들어가게 된 샤를 드 퐁피두는, 자신의 몸을 뒤집어쓴 채 미소를 짓고 있는 프랑수아 4세를 바라보며 숨을 헐떡였다.
“이로써 스물한 번째 영혼 전이구나.”
샤를의 몸에 들어간 프랑수아 4세는 어깨를 앞뒤로 흔들고 손목과 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새로운 몸의 상태를 체크했다.
“좋아. 확실히 좋아. 아주 관리가 잘됐어.”
그는 로이로부터 거울을 건네받았다.
“살짝 그을린 자국만 빼고 말이야.”
거울을 보던 그는 왼손을 들어 머리와 얼굴을 한 차례 허공에서 쓰다듬었다.
그 순간, 빛의 가루가 그의 머리카락과 얼굴에서 번쩍이더니 순식간에 머리카락과 피부의 그을음을 없애고 오히려 윤기를 더해 주었다.
그는 침대에 누워 죽어가는 황제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너무 그렇게 슬픈 표정을 짓지는 마. 역사는 샤를 드 퐁피두를 위대한 인류의 황제로 기억해줄 테니까.”
그는 씩 미소를 지었다.
황제는 점차 가쁜 숨을 내쉬며 눈을 까뒤집기 시작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황제 폐하.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제 이름은 프랑수아도 아니고 알랭도 아닌, 아이드라는 것을.”
그 말이 끝나자 황제는 숨을 거두었다.
샤를 드 퐁피두의 몸을 입고 있는 자, 아이드는 가만히 황제의 눈을 감겨준 후 로이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1시간 이내로 대신들을 모두 어전에 소집해. 황제의 장례식과 차기 황제 대관식을 준비해야지.”
“명을 받들겠습니다, 아이드 님.”
“그러고 보니 너도 슬슬 새로운 육체로 갈아타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앨드랄?”
아이드의 물음에 로이는 그 삭막한 얼굴에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아직은 쓸 만합니다.”
아이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이윽고 로이는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죽은 프랑수아 4세의 시체와 함께 침실에 남은 아이드는 이제는 옛 육체가 된 시체를 바라보며 홀가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 * *
광명력 992년 6월 18일 아침.
태양이 어둠을 몰아내고 지상을 비추며 발스 서부의 참혹한 광경을 명명백백히 밝혀냈다.
간밤에 서부에서 들려오던 굉음에 잠을 설쳤던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해가 뜨자마자 서부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눈 앞에 펼쳐진 폐허를 바라보며 할 말을 잃어야만 했다.
주민 중 일부가 영주의 성채로 달려가 영주를 찾았지만, 영주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혼란에 빠진 주민들이 먼저 복구를 해야 할지, 아니면 영주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야 할지를 두고 설전을 벌이고 있을 때, 발스 동부 외곽에서는 아딘과 로제가 엘프숲 외곽으로 떠날 준비를 끝마치고 있었다.
“후우…… 이제 됐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아딘과 로제 그리고 두 사람이 타고 갈 말과 짐을 순식간에 마을에서 빼낸 휴고가 숨을 몰아쉬며 이야기했다.
그가 보여준 신기한 능력에 로제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를 바라보았고, 아딘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에다 짐을 싣고 로제와 함께 안장에 올라탔다.
“원래라면 너희도 죽는 게 마땅하다.”
아딘의 말에 휴고와 조르주는 흠칫 떨며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난 너희를 살려두기로 했다. 비루한 한 목숨 부지하고자 조직의 비밀까지 다 털어놓는 비겁한 자의 피를 내 손에 묻히기도 싫고, 또 너희가 내게 해준 만큼 나 또한 그만한 보상은 줘야 하는 게 마땅하니까.”
아딘의 말에 두 사람은 안도의 한숨을 조심스럽게 내쉬었다.
“가라. 다시는 나와 마주치지도 말고, 우리에 대해 어디 가서 언급하지도 마라. 다음에 또 이런 식으로 나와 마주친다면 그때는 너희부터 죽여버릴 것이다.”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조르주와 휴고는 아딘을 향해 넙죽 업으려 절했다.
말 위에서 아딘은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며 콧방귀를 뀐 후 말머리를 돌려 엘프숲 외곽으로 이동했다.
‘묵시록 종단이라니…….’
자신의 허리를 꽉 껴안은 로제의 손을 가만히 잡아주며 아딘은 굳은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난 그런 조직을 설정한 적이 없어.’
지난 새벽, 허물어진 여관에서 조르주와 휴고는 아딘에게 묵시록 종단에 대한 이야기를, 자기들이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빠짐없이 다 털어놓았다.
최고위 계급인 교주 자리는 항상 샤펠 제국 황제가 맡는다는 것, 종단의 단원들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1개 이상씩 생긴다는 것, 종단의 세력은 샤펠 제국에 한정돼 있지만 그 영향력만큼은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강하다는 것.
그리고 종단에 전해지는 예언에 관한 것까지.
‘황금 갑옷이 나타나면 남풍이 대지를 불태우고 석양이 강물을 메마르게 하리라…….’
예언의 내용에 아딘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황금 갑옷은 분명 불칸의 갑옷을 이야기하는 거야. 그리고 대지를 불태울 남풍이라는 건…….’
영웅일대기 4부는 화산 열도를 통일한 오곤 가문이 제니스 공화국과 게마인샤프트를 향해 대대적인 침략을 감행하고 주인공 존이 그들을 몰아내는 사건에 관한 일련의 스토리로 구성돼 있다.
현재 김현수가 아딘 콘스탄틴에 빙의한 시점인 광명력 992년 기준으로도 20년 뒤에나 일어날 사건이 바로 화산 열도의 침공이었다.
‘그런 화산 열도의 침공을…… 300년 전부터 예언했다고? 누가? 어떻게?’
조르주와 휴고는 누가 어떻게 그것을 예언했는지까지는 모르고 있었다.
그저 8대 황제 조르주 3세가 그런 예언을 받아 묵시록 종단을 만들었다는 것만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조르주 3세…… 하이로드 가문을 멸문시킨 것부터가 이상했는데…… 묵시록 종단이란 것까지 만들어?’
아딘은 조심스럽게 품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펼쳤다.
그는 묵시록 종단에 대한 상념을 떠올렸지만, 두루마리 위에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조르주 3세에 대한 상념을 떠올리자 이전에 봤던 내용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것들이 쭉 떠오를 뿐이었다.
상념을 화산 열도로 옮기자 화산 열도의 현재 상황이 낱낱이 떠올랐다.
‘샤펠 제국의 주기적인 토벌과 봉쇄로 여전히 전국시대에 가까운 상황이군. 원래라면 지금쯤 오곤 가문이 통일을 하고 내적으로 힘을 기르고 있을 때인데 말이야.’
다행히 오곤 가문은 여전히 화산 열도 남동부의 대영주 가문으로 남아 있었다.
하이로드 가문과는 달리 그래도 꾸역꾸역 살아남은 오곤 가문의 모습에 아딘은 쓴웃음을 지으며 두루마리를 도로 말아 품에 집어넣었다.
“오라버니.”
그가 막 두루마리를 집어넣자 로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응?”
“죄송해요.”
“응? 뭐가?”
“그때 오라버니한테…… 소리친 거요.”
로제의 말에 아딘은 쓴웃음을 지었다.
“로제.”
“네.”
“고마워.”
“네?”
아딘의 말에 로제는 그의 등에서 얼굴을 뗐다.
아딘이 고개를 뒤로 돌려 로제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로제 덕분에 내가 무사할 수 있었어.”
“아, 아니에요.”
“아니야. 너 덕분이 맞아. 네가 아니었다면 난 지금쯤 저곳에서 시체가 돼 있었을 거야.”
아딘의 말에 로제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구었다.
“정말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까지 나오자 로제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오라버니가 미안해할 게 뭐가 있어요? 미안하단 말 하지 마세요.”
각성의 영향일까?
아니면 지난 밤 그간 수동적이기만 하던 자기 자신의 모습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자기 의사를 표현한 것의 영향일까?
이제는 당당하게 자기 말을 하기 시작하는 로제의 모습에 아딘은 마음 한구석이 편안해짐을 느끼며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그럼 서로가 서로에게 미안한 셈 치고 넘어가자. 하하하.”
아딘이 웃으며 유쾌하게 이야기하자 로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그의 등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발스를 떠나 엘프숲 외곽, 울창한 수림을 왼편에 둔 그 길로 들어섰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