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3 용의 딸 (2)
비는 차츰 그치기 시작했다.
언제 그랬냐는 듯, 굵은 빗방울은 먹구름과 함께 동쪽으로 물러났다.
달빛이 영롱하게 대지를 비추었다.
그리고 그 아래 드러난 지상의 모습은 처참하기 그지 없었다.
조용한 시골 영지 발스.
그곳 서부 일대는 초토화라는 말이 모자랄 정도로 망가져버렸다.
한쪽 땅이 무너지면서 사람과 가옥을 집어삼켰고, 토사 속에 드러난 사람의 팔과 부서진 흙벽의 잔해는 스산한 풍경을 연출했다.
토네이도가 휩쓸고 간 곳은 가옥이 터만 남기고 사라진 상태였고, 한때 살아 숨쉬던 것들의 살덩이가 한때 누군가의 보금자리였던 것들의 잔해와 뒤섞인 채 여기저기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조금 전까지 이곳에서 고함을 지르며 병장기를 휘두르던 디에고 공작의 중보병들도, 혀를 날름거리던 뱀 인간들과 겁을 상실한 채 인간을 향해 돌진하던 고블린들도 모두 언제 그런 것들이 있었냐는 양 사라지고 없었다.
그것들이 사라진 자리에는 소름끼칠 정도의 적막함과 한 소녀의 거친 호흡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로제…….”
씩씩거리며 달빛 아래 드러난 참상을 혼란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던 로제.
그녀의 귀를 때리는 아딘의 힘겨운 목소리.
로제는 천천히 뒤로 돌아 아딘을 바라봤다.
여전히 힘겨운 모습이었지만 불칸의 갑옷이 로제가 뿜어댄 용의 힘과 공명하여 회복력을 강화해준 덕분에 두 다리로 일어설 수 있게 된 아딘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로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니?”
이게 뭐냐?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네가 한게 맞냐? 도대체 왜 이랬냐?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로제는 아딘의 입에서 그런 말들이 튀어 나올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은 이성적인 판단이 아니었다.
분노와 증오가 이성을 불태우고, 그 불같은 감정들이 가라앉고 혼란과 공허만이 자리잡은 그녀의 마음 속에서 자연스럽게 내려진 판단이었다.
거지 소녀 시절, 아테인 가문 노예 시절 그녀가 귀에 박히도록 들었던 힐난.
“괜찮아?”
하지만 아딘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는 그녀에 대한 걱정을 품고 있었다.
“오라버니……”
로제의 마음은 그대로 무너졌다.
증오와 분노가 태워버린 이성과 감성의 자리를 차지하던 혼란과 공허가 날아갔다.
대신 그 자리에 안도가 피어올랐다.
그대로 로제는 아딘에게 달려가 그의 품에 안겼다.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채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등을 아딘은 그저 가만히 토닥여 줄 뿐이었다.
‘각성 직후 대학살의 운명은…… 결국 어떤 식으로든 이루어진다는 건가?’
그녀가 만들어낸 참혹한 광경을 바라보며 아딘의 표정은 점차 어두워져 갔다.
* * *
여관에서 조르주와 휴고는 창문을 통해 상황을 지켜봤다.
여관 근처에서 전투가 벌어졌지만 고작 2층이었던 탓에 확실하게 모든 것을 조망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골렘이 날아다니고, 골목마다 중보병과 고블린들이 뒤엉키고, 뱀 인간이 휘젓고 다니는 모습은 고스란히 두 사람의 눈에 들어왔다.
1층에서 피 터지게 싸우던 청동 골렘은 뱀 인간 2마리를 남겨둔 채 다시 전장으로 날아갔다.
이빨이 부서지고 손톱에 금이 간 뱀 인간들도 빠르게 전장으로 들어갔다.
조르주와 휴고는 감히 밖으로 나갈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그렇게 여관방에 숨어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기만 했다.
“다 죽여 버릴 거야!”
그리고 황금 갑옷으로 추정되는 물체가 골렘에게 두들겨 맞는 모습이 지나갈 때쯤, 한 소녀의 분노어린 외침이 두 사람의 고막을 강타했다.
[쿠구구구구-!]
[휘유우우웅-!]
그 외침과 동시에 엄청난 지진과 토네이도가 발생했다.
지진과 토네이도가 살아있는 것과 흙으로 지은 것들을 모조리 집어삼켰고, 순식간에 주변은 아수라장이 됐다.
엄청난 강풍을 동반한 토네이도는 여관 주변의 가옥들을 무참히 뜯어냈고, 덕분에 조르주와 휴고는 집들에 가려져 그간 보지 못했던 전장의 모습을 조망할 수 있었다.
‘세, 세상에!’
‘이, 이게 무슨 일이야!’
그리고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전장 한가운데에서 서로 부둥켜안은 채 서 있는 아딘과 로제.
두 사람 주변으로 펼쳐진 광경은 그야말로 재난 현장이었다.
달빛 아래 드러난 처참한 광경에 두 사람은 얼빠진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디에고 공작은……”
이곳, 발스에 왕림한 제국과 종단의 두 실력자.
그들의 생사를 도무지 두 사람은 입 밖으로 꺼내기가 힘들었다.
‘다 죽었다고?’
‘디에고 장로와…… 총독 각하가?’
묵시록 종단은 철저한 피라미드 구조다.
그리고 상위 계급자는 자신이 책임지는 하위 계급자가 죽을 시 심신에 엄청난 타격을 입는다.
알베르토와 샤를은 모두 장로 계급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죽었다면 교주인 황제 프랑수아 4세에게는 엄청난 타격이 갔을 터였다.
‘황제 폐하께서는 이미 와병 중이시다. 그런데 만약 두 장로가 죽었다면…….’
단순히 예언에 나오는 황금 갑옷을 찾기 위해 출발했던 여정이 뜻하지 않은 제국 전체 정세의 혼란으로 이어지는 상황에 조르주와 휴고는 너나 할 것 없이 손을 덜덜덜 떨어대야만 했다.
‘안 돼…… 내 은퇴…….’
‘젠장…… 괜히 복잡한 일에 엮여서…….’
두 사람의 표정이 모두 구겨졌다.
조르주와 휴고는 한 차례 서로를 바라본 후 시선을 다시 아딘과 로제에게로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두 사람은 아딘과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아딘이 두 사람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정확하게 자기들을 향하는 아딘의 손가락에 조르주와 휴고는 헉하는 소리와 함께 심장이 멎는 통증을 느껴야만 했다.
두 사람은 숨죽인 채 아딘을 바라봤다.
아딘이 품에 안긴 로제를 잠시 떼어놓더니 이내 찬란한 황금빛 광휘에 휩싸였다.
잠시 후, 다시 불칸의 갑옷을 장착한 아딘은 로제를 양팔로 안고는 그대로 그 자리에서 도약했다.
[쿠웅-!]
무려 지상 30m나 날아올라 150m가량 떨어진 여관 옆에 정확하게 착지한 아딘은 그대로 다시 가볍게 도약하여 조르주와 휴고가 있는 방으로 창문을 타고 들어왔다.
“크허억-!”
“흐어억-!”
자기 앞에 사뿐히 선 아딘을 바라보며 조르주와 휴고는 그대로 뒤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아딘은 로제를 내려놓고 그들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조르주. 69세. 플루슈드 시장.”
황금빛 찬란한 불칸의 갑옷.
빛나는 안광을 내뿜는 투구에서 자신의 이름과 나이, 신분이 거론되자 조르주는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리는 느낌을 받아야만 했다.
“휴고 드 로이에르. 41세. 파세레빌 징세관.”
이번엔 아딘의 입에서 휴고에 대한 정보가 흘러나왔다.
휴고는 달달달 떨며 아딘을 바라볼 뿐이었다.
“모두 슈드 자치령 총독이자 샤펠 제국 황태자인 샤를 드 퐁피두의 밀명을 받고 이곳에 왔다고 알고 있다.”
[쿵-!]
아딘은 그대로 발을 굴렀다.
바닥이 쩌억 갈라졌고 강한 진동이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그 즉시 조르주와 휴고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사, 살려만 주십시오.”
“우, 우리는 그, 그저 시키는 일만 했을 뿐입니다.”
두 사람이 비굴한 모습으로 자신에게 빌기 시작하자 아딘은 콧방귀를 뀌었다.
“샤를 드 퐁피두. 그자가 나와 내 동생을 위험에 처하게 했다. 그리고 그자를 따르던 늙은이가 나를 죽이려 했다.”
“저, 저희는 귀, 귀공을 죽일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가, 감히 그딴 생각을 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면 이야기해라. 도대체 너희가 받은 밀명이 무엇이었는지를, 왜 너희가 오고 나서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 저들이 왔는지를!”
[쿵-!]
아딘이 다시 한 번 발을 굴렀다.
“우, 우리는 그저 예언에 나오는 화, 황금 갑옷을 쫓았을 뿐이었습니다.”
“구, 군대를 이끈 것은 우, 우리가 아니라 조, 종단의 두 장로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조르주와 휴고는 서로 경쟁하듯 모든 것을 낱낱이 밝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묵시록 종단의 존재와 그들에게 내려진 예언에 관해 들으며 점차 아딘의 표정은 굳어갔다.
* * *
아퐁.
샤펠 제국의 수도이자 샤펠 제국 서남부 해안에 자리한 대도시.
제국과 자치령의 전체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곳 중심부에는 높이 20m, 두께 5m에 이르는 거대한 성벽에 둘러싸인 황궁이 있다.
5천 명에 이르는 병사들이 밤낮없이 철통 경비로 수호하는 황성 중앙에는 황제의 어전이 있고 좌우에는 대신들의 집무실이 있다.
그리고 어전 뒤편으로는 황제의 본처와 첩 그리고 자식들이 기거하는 황족만의 비밀스런 공간이 자리하고 있다.
“커헉-!”
그중 황제의 처소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한 황태자의 처소.
5층 높이의 석조 건물 꼭대기 층에 자리한 황태자의 침실에 방의 주인인 샤를이 갑작스럽게 나타났다.
“크허억……!”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침대 옆에 나타난 샤를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진 채 머리를 박고는 고통스러운 신음과 거친 호흡을 내뱉었다.
공포와 불신으로 가득한 그의 눈은 핏발이 선 채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살짝 익은 그의 피부와 머리털에서는 매캐한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헉…… 헉…… 헉…….”
한동안 거칠게 숨을 내쉬던 샤를은 그대로 몸을 뒤로 젖혀 침대에 등을 기댄 채 고함을 질렀다.
“누구 없느냐! 거기 누구 없느냐!”
그의 고함소리가 들리자마자 문밖에서 소란이 발생했다.
“누구 없느냐고 묻지를 않느냐!”
그의 고함소리가 점차 신경질적으로 변해갈 때쯤, 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그의 처소를 지키던 경비병과 하녀였다.
“화, 황태자 전하! 어, 어찌 이곳에!”
하녀와 경비병은 샤를을 보자 눈을 휘둥그레 뜨며 고개를 조아렸다.
“술…… 가서 술을 가져오거라! 어서!”
“저, 전하……”
“어서 가져오라고!”
핏발이 선 눈으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샤를의 모습에 결국 하녀와 경비병은 다시 밖으로 나가야만 했다.
잠시 후, 술상이 들어왔고 샤를은 하녀를 모두 물리친 후 혼자 원탁에 앉아 독한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순식간에 술병의 절반을 비우고 나서야 샤를은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는 바싹 마른 자신의 옷과 머리카락을 살폈다.
머리카락과 옷을 적셨던 빗물을 단숨에 말린 그 가공할 위력의 푸른 불덩어리.
그것을 떠올리자 샤를은 진저리를 치며 다시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그가 술을 다 마셨을 때쯤.
“황태자 전하.”
“으허억!”
그림자 속에서 그의 참모, 로이가 나타났다.
[와장창-!]
뒤에서 소리없이 나타난 로이로 인해 샤를은 술상을 다 엎질러야만 했다.
샤를은 떨리는 손으로 로이를 가리켰다.
그는 표정으로 로이에게 해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로이는 그에게 해명하는 대신 자신이 온 용건을 밝히기로 했다.
“황제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로이의 입에서 황제가 거론되자 샤를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함께 가셔야겠습니다.”
로이의 말에 샤를은 고개를 끄덕였다.
곧 로이가 샤를의 곁으로 와 그의 손을 잡았고, 두 사람은 그림자 속으로 빨려들 듯 사라졌다.
잠시 후, 두 사람은 황제의 침실에 나타났다.
벽에 걸린 촛불이 희미하게 방을 밝히는 가운데, 방 한가운데에 자리한 침대에서는 노인의 기침 소리가 힘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장인어른이 죽었지? 그러고 보니…….’
상위 계급자의 하위 계급자에 대한 연대 책임.
그것을 떠올리는 순간 샤를의 뇌리에 가득하던 공포는 사라지고 없었다.
‘드디어!’
대신 그 자리에는 드디어 황제의 옥좌에 자신이 앉게 된다는 상념이 자리 잡으며 그를 웃게 만들었다.
“황제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곁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로이가 기계적으로 샤를에게 이야기했다.
샤를은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황제의 침대로 다가갔다.
“쿨럭! 쿨럭-! 끄으으으억-!”
침대에서는 이불에다 피를 토한 황제 프랑수아 4세가 금방 죽을 것처럼 기침을 하고 있었다.
“황제 폐하.”
그리고 샤를은 그 곁에 서서 미소를 지으며 프랑수아 4세를 내려다봤다.
“부르셨습니까?”
미소를 숨기지 못하는 샤를을 프랑수아 4세는 힘없는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