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 각성 (3)
처음 흑장미여관에서 주인에게 채찍질 당하던 로제를 봤을 때, 내 마음을 뒤흔든 하나의 감정은 연민이었다.
조금 고차원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맹자가 이야기한 사단 중 하나인 측은지심이 발휘된 것이리라.
그리고 로제의 정체가 영웅일대기 2부의 빌런이자 주인공 존에게 정서적으로 의존된 상태에서 끝끝내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비운의 캐릭터인 피의 마녀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내 마음을 뒤흔든 하나의 감정은 소유욕이었다.
유리 콘스탄틴으로부터 고문을 받으며 내 마음에 생긴 원한은 그를 향한 복수를 계획하게끔 만들었다.
복수의 수단으로서 나는 영웅일대기에서 맥거핀으로 남겨두었던 3대 신물을 떠올렸고, 그중 하나를 찾았다.
그리고 로제를 발견했을 때, 난 그녀를 3대 신물과도 같은 복수를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게 됐다.
각성한 그녀가 펼칠 가공할 마법.
3대 신물을 모두 지닌, 전사형 캐릭터가 될 나를 뒤에서 든든하게 지원해 줄 존재가 생기는 것이었다.
그렇게 로제를 바라보는 내 마음은 이중적이었다.
그리고 그 이중성은 아딘 콘스탄틴의 것이 아닌 김현수의 것이었다.
김현수는 싸우는 걸 싫어했다. 특히 주먹다짐은 정말로 싫어했다.
하지만 동시에 김현수는 누군가에게 쓸데없이 양보하는 것을 싫어했고, 또 지는 것을 싫어했다.
싸움을 싫어하면서 동시에 지는 걸 싫어하는 그러한 김현수의 이중적 성격은, 그가 주먹 싸움 대신 말싸움의 길을 걷게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내가 만든 노예 소유가 합법인 세계에서, 그 체제에 희생당한 어린 소녀를 향한 측은지심과 장차 어마무시한 마녀로 각성할 용과 인간의 혼혈아에 대한 소유욕.
그러한 이중적인 감정을 가지고서 난 로제와 동행했다.
“감사합니다. 오라버니.”
그리고 어느새 나는 그녀의 수줍어하는 모습과 앙증맞은 귀여움에 정서적으로 의존하게 됐다.
영문도 모른 채, 김현수가 설정한 영웅일대기 1부 빌런 아딘 블라디미로비치 콘스탄틴의 몸에 빙의하여 온갖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은 나에게 그녀의 그러한 모습은 마음의 안정을 가져다주었다.
“부탁드립니다. 제발…… 제발 제 오라버니를 살려주십시오…… 제발……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날 위해 청동 골렘 앞을 가로 막았다.
의지가 돼야 할 오라비가…… 참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 * *
구멍 뚫린 집안에서, 다리가 부러진 채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로제는 단 한 장면도 놓치지 않고 아딘이 싸우는 모습을 지켜봤다.
언제나 든든하기만 한 아딘은, 그러나 이번 만큼은 압도적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오히려 아딘은 골렘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고, 마침내 청동 골렘과 강철 골렘의 팀 플레이에 당해 바닥에 파묻히고 말았다.
그 순간, 로제는 거의 본능적으로 소리를 지르며 아딘에게 달려갔다.
그리곤 아딘을 향해 다가오던 청동 골렘을 향해 무릎 꿇고 무작정 빌기 시작했다.
“부탁드립니다. 제발…… 제발 제 오라버니를 살려주십시오…… 제발…… 부탁드립니다…….”
로제는 눈물을 흘리며 청동 골렘에게 빌었다.
간단한 단어와 숫자 정도나 겨우 읽을 줄 아는 소녀에게는 골렘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정보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자신을 해방시키고, 동생으로 받아주고, 항상 지켜주었던 사람에 대한 사랑과 그를 죽게 내버려두고 싶지 않은 마음은 그 누구보다도 강렬했다.
“제게는 하나 뿐인 사람입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 눈물인지 빗물인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저 그녀는 아딘이 죽게 내버려두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로…… 제…….”
가까스로 상체를 일으킨 아딘이 힘겹게 로제를 불렀다.
로제는 눈물을 흘리며 아딘을 바라봤다.
“어서…… 가…… 멀리…… 떠나…….”
아딘의 말에 로제는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싫어요! 전 오라버니를 떠나기 싫어요! 제가 왜 떠나야 해요! 왜!”
그녀의 반항적인 모습에 아딘은 쓴웃음을 지어야만 했다.
“어서…… 가……”
“싫어요!”
로제는 다시 청동 골렘을 향해 고개를 돌린 후 아까와 똑같이 빌었다.
“부탁드립니다……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오라버니를…… 제발……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그런 로제의 모습에 아딘은 고마움과 미안함을 동시에 느끼며 고개를 떨궈야만 했다.
“저년은 또 뭐야?”
샤를이 인상을 찌푸리며 로제를 바라봤다.
“아…… 저 황금 갑옷이 강탈했다는 그 노예인가?”
샤를은 콧방귀를 뀌며 알베르토를 바라봤다.
알베르토는 굳은 표정으로 아딘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샤를의 시선이 알베르토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리고 그의 표정은 알베르토와 마찬가지로 굳어버렸다.
[츠츠츠츳-!]
[츠츠츠츳-!]
[키이이잇-!]
[키이이잇-!]
한참을 후퇴했던 뱀 인간과 고블린의 연합이 다시 전진하고 있었다.
그 속도는 비록 빠르진 않았지만, 그것들은 명확하게 적의를 분출하고 있었다.
‘젠장!’
알베르토는 이를 갈았다.
그의 시선이 곧 로제와 아딘에게로 향했다.
‘시간이 없어. 빨리 나머지 골렘들과 중보병들을 투입해야 해.’
알베르토는 번개 골렘에게 명령했다.
가장 강한 힘으로 아딘과 로제를 모두 태워 죽여버리라고.
번개 골렘은 곧장 그 명령을 수행했다.
놈은 양손을 자기 가슴 앞에 모았다.
곧 놈의 손바닥 사이에서 강한 스파크를 튀기며 번개 덩어리 하나가 형성됐다.
[파지지직-!]
곧 번개 골렘은 호랑이 머리통만 한 번개 덩어리를 그대로 아딘과 로제를 향해 날렸다.
그리고 그것을 아딘은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다.
“위험해!”
아딘은 그대로 혼신의 힘을 다해 로제의 앞을 가로막았다.
[파즈즈즈즛-!]
번개 덩어리는 그대로 아딘의 몸에 명중했다.
“끄아아아악-!”
아딘은 비명을 지르면서도 꿋꿋하게 그 자리에 서서 번개를 견디고 또 견뎠다.
“오라버니!”
로제는 비명을 지르며 아딘을 불렀다.
“도…… 망가…… 도망가!”
발악하듯 로제를 향해 도망가라는 말을 내뱉으며 아딘은 한 남자를 바라봤다.
‘샤를 드 퐁피두가 아니야…… 골렘을 조종하는 건…… 저 남자야…….’
이미 아딘은 골렘과 싸우기 전부터 샤를과 알베르토의 행동 패턴을 분석하고 있었다.
그리고 골렘의 조종자가 샤를이 아닌 알베르토라는 결론을 아딘은 나름의 사고를 통해 내릴 수 있었다.
‘이게 마지막이야…… 일단 저 인간만 불능 상태로 만들어 놓으면…… 로제는 도망갈 수 있어.’
그녀를 향한 측은지심과 소유욕.
그녀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
자신이 창조한 세계에서 목적조차 이루지 못한 채 죽을 것이 확실시되는 이 순간, 아딘은 최후의 결정으로 자신의 이중적인 감정 중 진심에 가까운 것을 표현하기로 했다.
“흐아아악-!”
번개 덩어리의 에너지를 불칸의 갑옷을 통해 모두 흡수한 아딘은 기합인지 비명인지 모를 괴성을 내지르며 알베르토를 향해 양팔을 뻗었다.
곧 그의 양팔에선 번개 덩어리로부터 흡수한 에너지를 고스란히 담은 번개 줄기가 뿜어져 나와 알베르토를 향해 직선으로 날아갔다.
‘헉!’
번개 골렘은 아딘에게 최후의 일격을 날린 직후 다른 두 골렘과 함께 나머지 네 골렘이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다가오는 뱀 인간을 저지하기 위함이었지만, 그것이 알베르토에게는 잘못된 선택이 됐다.
‘못 피해!’
찰나의 순간, 알베르토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깨닫고 행동으로 옮길 수 있었다.
[콰아앙-!]
아딘이 날린 번개 줄기는 그대로 알베르토의 몸을 강타했다.
“흐어억-!”
그 옆에 있던 샤를은 식겁하며 몸을 숙였다.
[파즈즈즈즛-!]
엄청난 에너지가 알베르토의 전신을 뒤덮었다.
번개 줄기의 열은 알베르토가 밟고 있던 핏빛 구름마저 태워버렸다.
“크우오옷-!”
번개 줄기를 그대로 정통으로 맞으며 알베르토는 기합을 내질렀다.
샤를과 파우스 그리고 중보병들은 모두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번개에 노출된 알베르토를 바라봐야만 했다.
잠시 후, 아딘의 팔에서 뿜어져 나오던 번개 줄기가 멈췄다.
아딘은 그 자리에 선 채 알베르토의 모습을 확인했다.
“크우욱……!”
알베르토는 피를 한 웅큼 토해냈다.
그중 일부는 핏빛 구름이 됐고, 나머지는 모두 중보병들 투구 위로 떨어져 내렸다.
“크윽…….”
묵시록 종단 장로로서 알베르토가 지닌 능력은 일곱 골렘에 대한 완전한 통제다.
하지만 묵시록 종단 장로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교인으로서 그가 지니고 있는 능력은 바로 이 불굴의 인내였다.
그 어떠한 공격이건, 1차례에 걸쳐 견딜 수 있는 능력.
한 번 사용하고 나면 족히 1년 동안은 심신의 안정을 되찾고자 요양을 해야 했지만, 그만큼 효용성은 대단한 능력이 바로 이 불굴의 인내였다.
그리고 이 능력은, 아딘이 최후의 일격으로 날린 공격을 결과적으로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렸다.
‘젠장…….’
피를 토하기만 할 뿐, 멀쩡하게 다시 생성된 핏빛 구름 위에 선 채 자신을 바라보는 알베르토.
그 모습을 보고 아딘은 허탈함을 느끼며 그대로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오라버니!”
로제가 곁으로 다가와 그를 부축해 주었다.
아딘은 이제 고개를 돌릴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로제…….”
“네. 말씀하세요…… 오라버니…….”
“미안해…….”
“아니에요. 제가 미안해요…… 제가…… 오라버니를 지켜드리지 못해서…….”
로제는 그대로 아딘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채 오열했다.
“로제…… 어서 가…… 너는 꼭 살아 남아야 해…… 그게…… 어쩌면 내가…… 여기에 남겨두는…… 유일한 삶의 흔적이 될 테니까…….”
“싫어요! 저는…… 저는 오라버니와 함께 있을 거예요! 아무데도 가지 않을 거예요!”
“어서…… 가…….”
“싫어요!”
로제는 그대로 아딘을 끌어안은 채 오열하고 또 오열했다.
“대단해. 정말 대단한 충성심이야. 안 그렇습니까, 장인어른?”
샤를의 말은 다분히 알베르토를 비꼬는 것이었다.
하지만 알베르토에게는 지금 그것에 반박할 여유가 없었다.
“파우스!”
샤를이 파우스를 불렀다.
파우스는 샤를을 향해 경례했다.
“저 여자애를 황금 갑옷으로부터 떨어뜨려라.”
“네! 알겠습니다.”
영문 모를 명령이었지만 파우스는 충실히 따랐다.
그는 세 사람의 중보병을 이끌고 천천히 아딘에게 다가갔다.
알베르토는 뭐하는 거냐는 표정으로 샤를을 바라봤다.
“저런 충성심 강한 노예는 당연히 내 밑에서 일해야지. 파우스가 저 노예를 떼어내면 골렘을 이용해 황금 갑옷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십시오, 장인어른.”
알베르토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전진하다 멈춘 뱀 인간들과 대치 중인 강철 골렘을 불러들였다.
“이거 놔! 놔란 말이야!”
파우스와 중보병 셋은 아딘의 눈치를 살피며 로제를 그에게서 떼어냈다.
“이거 놔! 놔라고! 난 오라버니랑 같이 있을 거야! 놔!”
로제는 파우스의 품에서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이 조그만 소녀의 발버둥은 거대하고 단단한 파우스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못했다.
파우스는 그녀를 양팔로 꽉 붙들고는 아딘으로부터 떨어졌다.
[쿠웅-!]
중보병들이 빠진 자리에 강철 골렘이 나타났다.
어느새 강철 골렘의 오른팔은 거대한 망치로 변해 있었다.
알베르토는 고개를 끄덕였고, 강철 골렘은 그대로 아딘의 등을 향해 망치를 휘둘렀다.
[꽈앙-!]
그대로 아딘은 앞으로 쓰러지며 바닥에 파묻혔다.
그의 의식은 이제 아주 희미하게나마 존재할 뿐이었다.
바닥에 파묻힌 아딘을 향해 다시 강철 골렘이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부우웅-!]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망치는 그대로 아딘의 등판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 모습을 보며 기괴한 표정으로 웃는 샤를도, 본격적으로 골렘들과 충돌하여 싸우기 시작하는 뱀 인간들을 바라보던 알베르토도, 로제를 안은 채 진영으로 들어가던 파우스도.
모두가 아딘의 죽음을 확신했다.
저 마지막 일격이, 황금 갑옷을 입은 전사의 생명을 앗아갈 것임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거 놔라고!”
그리고 그 확신은 한 소녀의 유전자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용의 피를 눈뜨게 했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