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24화 (24/175)

024 고대 종교 박물관 (2)

김현수의 소설 영웅일대기.

그가 고등학교 1학년 시절부터 29세가 되던 해까지, 근 12년간 홀로 묵묵히 저술했던 60권 분량의 방대한 대하 판타지 소설.

총 5부작으로 구성된 이 소설에서, 김현수가 아딘 콘스탄틴의 몸에 빙의한 시점은 1부 최후반부에 해당했다.

그리고 아딘 콘스탄틴의 자아와 김현수의 자아가 융화된 아딘이 본래 마녀가 돼야 할 로제를 탈출시키면서 2부에 해당하는 내용 전체가 날아가 버렸다.

1부의 주인공 프랭클린 다니엘 하이로드의 뒤를 이어 2부부터 주인공이 되는 존 크리스토퍼 하이로드 입장에서는 샤펠 제국 황제로부터 동부 지방을 영지로 하사받을 기회가 사라지는 셈이었다.

자신이 이 세계에 들어온 이상, 어떻게든 복수를 하고 또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설정에 따라 비참한 삶을 살다 또 비참하게 죽을 운명인 로제에 대한 참회의 심정으로 아딘은 스토리를 비틀었다.

애초에 맥거핀으로 설정된 3대 신물을 모으는 것과는 격이 다른 선택이 바로 로제를 구출해내는 것이었다.

세상에 단 한 번도 공개하진 않았지만, 12년간 쓴 소설의 주인공이었던 만큼, 김현수는 존에 대한 애착이 있었다.

빙의 이후 너무 바쁘게 살다 보니 확인을 하지는 못했다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항상 존에 대한 궁금증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랬기에 아딘은, 델로이 백작 파스텔의 서재에서 고대 종교의 상징을 본 것을 계기로, 여관방으로 돌아와 두루마리를 펼쳐 존의 근황을 확인하고자 했다.

‘없어?’

하지만 두루마리 위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게 무슨…….’

촛불 아래 활짝 펼쳐진 두루마리 위에는 아무것도 나타나 있지 않았다.

아딘은 마음속으로 계속해서 존 크리스토퍼 하이로드에 관한 상념을 떠올렸다.

하지만 두루마리는 묵묵부답이었다.

‘로제.’

아딘은 혹시나 싶어 로제에 관한 상념을 떠올렸다.

<로제>

<광명력 976년 10월 1일생. 광명력 992년 6월 15일 현재 15세.>

<현재 아딘 블라디미로비치 콘스탄틴을 따라 다니며, 그로부터 콘스탄틴 가문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다.>

<용의 유전자 절반을 가지고 있으며, 특정 계기가 형성되면 각성할 예정이다.>

다소 달라져 있었지만, 로제에 관한 정보는 깔끔하게 두루마리 위로 떠올랐다.

‘존 크리스토퍼 하이로드.’

다시 아딘은 존에 대한 상념을 떠올렸다.

하지만 두루마리는 다시 백지로 돌아갈 뿐, 아무런 정보도 올리지 않았다.

‘뭐지?’

아딘은 팔짱을 낀 채 황당하단 표정으로 두루마리를 바라봤다.

‘주인공이라고 안 보여주는 거야? 그럴 리는 없는데?’

잠시 두루마리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아딘은 이내 다시 두루마리를 양손으로 든 채 상념의 내용을 바꿔보았다.

‘하이로드 가문.’

그 순간, 두루마리 위로 그림 하나와 글자들이 빼곡하게 떠올랐다.

그림은 김현수가 설정해 두었던 하이로드 가문의 문장이었다.

방패 모양의 바탕에 늑대가 산 정상에서 울부짖는 그림이 그려진 하이로드 가문의 문장을 바라보며 아딘은 피식 웃었다.

자신이 대충 노트에다 스케치해두었던 모습이 상당히 전문적인 손길을 거쳐 탄생한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딘의 시선이 그림에서 글로 옮겨졌을 때, 그의 표정에선 웃음기가 싹 사라지고 말았다.

<광명력 698년 3월 1일, 샤펠 제국 8대 황제 조르주 3세에 의해 마지막 혈족 로버트 피츠제럴드 하이로드가 19세의 나이에 암살당하며 멸문.>

<현재 방계 후손 일부가 제니스 공화국 동부 일대에서 평민으로 생존해있다.>

광명력 698년.

즉 지금으로부터 294년 전 멸문.

범인은 슈드 자치령을 만든 샤펠 제국 8대 황제 조르주 3세.

‘멸문했다고?’

눈을 부릅뜬 채 아딘은 두루마리를 쳐다봤다.

몇 번을 읽어도 내용은 변함이 없었다.

하이로드 가문의 멸문.

그것이 두루마리가 알려주는 현실이었다.

‘그럴 리가 없어. 분명 유리 콘스탄틴은 제니스 공화국 3대 상단에 의해……’

아딘의 상념이 제니스 공화국 3대 상단으로 옮겨지자 두루마리는 곧 그 내용을 보여주었다.

<제니스 공화국 3대 상단>

<콘테 상단 – 해운업 독점, 현재 상단주는 크리스티나 콘테(34세)>

<드라기 상단 – 군수물자 독점, 현재 상단주는 마리오 드라기(47세)>

<루비오 상단 – 식료품 독점, 현재 상단주는 마르코 테드 루비오(51세)>

<3대 상단 모두 각자의 용병단을 운용 중이며 그 규모는 상시 운용 인력 6만에 비상시 운용 인력 5만, 도합 11만에 달한다.>

<현재 벨로디나 왕국에 주둔 중인 5만 명의 용병 중 절반 이상이 게마인샤프트에서 고용한 비상시 운용 인력이다.>

아주 디테일한 정보, 예를 들어 자본금 현황이나 회계 정보는 나오지 않았지만 적당한 선에서 두루마리는 3대 상단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주었다.

‘루비오? 이건 또 뭐야?’

그리고 아딘은, 김현수가 설정해놓은 3대 상단의 자리에 하이로드 가문을 대신해 들어가 있는 루비오 가문을 보며 인상을 구겨야만 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아딘은 당혹스러움을 느끼며 두루마리를 말아야 했다.

두루마리를 도로 품에 넣은 후 아딘은 책상에서 일어나 방안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하이로드 가문은 주인공 가문이야. 프랭클린이 1부의 주인공이자 소설 전체의 진주인공 존을 위해 앞길을 예비해두는 역할을 해주고, 존이 2부부터 5부에 이르기까지 소설 전체를 관통하며 이야기를 전개해가는 거야. 근데 그런 가문이 없어진다고? 통째로?’

아딘은 창가로 향했다.

굳게 닫힌 통나무 창문을 열자 여름 바람이 불어오는 발스의 밤이 눈에 들어왔다.

파세레빌의 야경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초라하지만, 한편으론 고요하기 그지없어 생각을 정리하기에 좋은 발스의 야경을 바라보며 아딘은 생각했다.

‘뭐가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 거야? 왜 내 소설 주인공이 사라지고 없는 거지?’

어찌하여 자신이 소설 속으로 들어왔는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하지만 왜 주인공에게 빙의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의문은 풀렸다.

‘정말 존이…… 없다고?’

인상을 찌푸리며 아딘은 발스의 어둠을 바라봤다.

* * *

“크흠.”

“어흠.”

조르주와 휴고는 헛기침을 하며 양옆으로 1층짜리 민가가 늘어져 있는 길가를 걸었다.

골목에서 자기들끼리 뛰어놀던 아이들도, 집안에서 가사 업무를 수행하던 주부들도 모두 두 사람을 힐끔거리며 침묵했다.

고요함 속에서 들려오는 수군거림과 의심의 눈초리는 두 사람을 굉장히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건 뭐 아믈리에 때 생각도 나고…….’

조르주는 아믈리에에서 화가 난 농노들에게 맞아 죽을 뻔하기 직전에 그들로부터 받았던 눈총을 떠올리며 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떨었다.

그 사소한 움직임이 또 사람들의 의심을 증폭시켰다.

‘이래서 내가 이런 촌구석에는 오기 싫었던 건데…… 빨리 돌아갔어야 하는 건데…….’

휴고는 그러한 발스 주민들의 모습에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한번 헛기침을 해야만 했다.

“아 잠시 신발끈이…….”

한참을 걷던 조르주는 델로이 성채가 동북쪽으로 300m에 자리한 마을 광장에 도착해서는 신발끈을 묶는 척을 하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광장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휴고와 조르주를 바라보았다.

“어흠.”

휴고가 한 차례 더 헛기침을 했고, 조르주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땅에 손가락을 댄 채 눈을 감았다.

곧 하루 전의 모습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마을 주민들의 의심 어린 눈총을 받으며 영지로 진입한 아딘과 로제는 곧 영지 서쪽으로 향했다.

조르주는 손을 떼고 눈을 뜬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쪽으로 갔소.”

조르주의 말에 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크흠.”

“어험.”

그렇게 두 사람은 계속해서 헛기침하며 영지 서쪽으로 느긋하게 걸어갔다.

“어이쿠, 또 신발끈이.”

한동안 서쪽으로 걷던 조르주는 다시 신발끈을 묶는 척, 과거의 모습을 확인했다.

그렇게 몇 차례 더 신발끈 묶는 연기를 한 끝에 조르주와 휴고는 아딘이 어제 들어간 영지의 유일한 여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크흠.”

“어흠.”

조르주와 휴고는 마당에서 장작을 패다 두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보곤 일손을 멈춘 여관 주인을 바라보며 헛기침했다.

여관 주인은 별다른 대답 없이 도끼를 든 채 가만히 두 사람을 바라봤다.

“여기 방이 없느냐?”

휴고가 여관 주인에게 물었다.

여관 주인은 콧방귀를 뀌고는 대답했다.

“언제 봤다고 반말이래?”

여관 주인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 휴고는 움찔했고 조르주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앞으로 나섰다.

“여행자요. 오랫동안 여행을 하느라 피곤해서 그만 내 조카가 실언을 한 듯하오.”

조르주의 적당히 예의를 갖춘 발언에 여관 주인은 가볍게 코웃음을 친 후 입을 열었다.

“하룻밤에 10실버요.”

“10실버?”

조르주와 휴고는 서로를 바라봤다.

‘낙후된 줄은 알았는데 아직도 실버를 쓴다고?’

두 사람은 한동안 할 말을 잃었다.

잠시 후 조르주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돈주머니에서 1골드를 꺼냈다.

또 1골드가 나오자 여관 주인의 표정이 환해졌다.

“우리가 실버는 가진 게 없고, 이렇게 골드뿐이오.”

“어이쿠. 확실하게 모시겠습니다요.”

순식간에 태도가 바뀌는 주인의 모습에 휴고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방이 딱 2개뿐인데, 다행히 1개는 남아 있습니다요.”

여관 2층으로 두 사람을 안내하며 주인이 한 말에 조르주와 휴고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나머지 1개는 누가 쓰고 있단 거요?”

조르주의 물음에 여관 주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방 하나를 가리켰다.

“다른 손님이 어제부터 머물고 있습니다요.”

“흐음.”

“두 분은 여기로 모시겠습니다요.”

여관 주인은 두 사람을 맞은편 방으로 안내했다.

후줄근하지만 나름 깔끔하게 정리된 방에 들어선 두 사람을 향해 식사는 홀에서 하면 된다 안내한 후 주인은 빠져나갔다.

주인이 사라지자 조르주와 휴고는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인 후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밀어서 여는 문이니까 조심하십시오. 혹시라도 방문을 열어버리면 곤란해질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휴고의 말에 조르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맞은편 방문에 살짝 손을 갖다 대곤 눈을 감았다.

막 그의 능력이 발휘돼 맞은편 방의 지난 과거를 보려 할 때였다.

[끼이익-!]

“으헉-!”

갑자기 방문이 열렸고, 조르주는 그대로 앞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툭-!]

그리고 그는 한 사내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고 말았다.

“헉-!”

휴고가 당황스러워하며 헛바람을 들이켰다.

조르주는 정신을 차리곤 자신이 얼굴을 파묻은 가슴팍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뭐 하는 겁니까?”

담갈색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진 청년.

조르주가 지난 일주일이란 시간 동안 끊임없이 봐왔던 사내.

황금 갑옷, 아딘 블라디미로비치 콘스탄틴.

그가 황당하단 표정으로 조르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 *

“뭐?”

서재 책상에 앉아 고대 태양 숭배자들이 태양신의 축일에 머리에 뒤집어쓰던 태양의 왕관을 헝겊으로 닦고 있던 파스텔.

그의 손길은 부리나케 달려들어온 털보의 보고에 멈췄다.

“또?”

“네. 제가 조금 전에 여관 주인한테 확인했습니다. 또 금화밖엔 안 들고 다니는 두 남자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금화밖엔 안 들고 다녀?”

“네. 노인 하나랑 저랑 나이가 비슷한 남자 하나라고 합니다.”

“하루 사이에 두 팀이나 그런 식으로 방문을 한다고?”

파스텔이 흔들리는 눈으로 태양의 왕관을 내려다보았다.

“우연…… 이라기엔 너무 절묘하지 않습니까?”

털보의 말에 파스텔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츠으읏-!]

그때, 뱀 소리가 서재 내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파스텔과 털보는 화들짝 놀라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양손을 모은 채 천장을 바라봤다.

[츠츠츠츠츳-!]

천장에 달려 있던 뱀 우상.

구리로 만들어진 그 누리끼리한 고대 종교의 상징물이 안광을 번뜩이며 파스텔과 털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 오소서, 제사장이시여.”

“제사장께 울지콰야님의 은총이 함께하시길.”

파스텔과 털보는 구리로 된 혀를 낼름거리며 소리를 내는 뱀 우상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며 경배를 올렸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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