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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23화 (23/175)

023 고대 종교 박물관 (1)

“헉!”

로제가 헛바람을 들이켜며 아딘의 손을 꼭 잡았다.

‘이건…….’

아딘도 떨리는 눈으로 열린 문 너머로 보이는 서재 내부를 바라보았다.

“들어오슈. 영주님은 집무실에서 서류 몇 개 정리하고 오신다 했으니까.”

두 사람의 모습을 재밌다는 듯 바라보며 털보가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실례하겠습니다.”

아딘도 로제의 손을 꼭 잡은 채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로 오는 상인들이 소문을 냈을라나 모르겠는데, 영주님의 취미가 독특하셔.”

털보가 원탁에서 의자 하나를 빼 앉으며 이야기했다.

아딘과 로제도 의자에 앉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고대 종교의 박물관…… 뭐 그런 건가?’

벽, 천장 심지어 지금 아딘이 앉은 원탁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고대 종교의 상징물이 놓여 있는 이곳 영주 서재.

“광명교에서도 고대 종교를 역사적 사료로 인정하니까, 너무 그렇게들 생각하지는 마시우. 하하하.”

광명교의 창시자이자 광명력의 시작을 알린 위대한 선지자 마우세스 레비.

그가 아퐁에서 시작하여 대륙 곳곳에 자신이 천계의 신들로부터 받은 계시와 신성력을 보이며 광명교를 포교하기 시작하고, 또 사람들이 그것을 믿기 시작하면서 고대 종교는 설 자리를 잃었다.

광명력 초기, 기득권을 지니고 있던 일부 고대 종교 사제들과 귀족들의 저항이 있었지만, 기적을 일으키지 못하는 우상과 기적을 일으키는 신성력의 대결은 애초에 승자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고대 종교는 광명교가 대륙 전역으로 뻗어나감에 따라 소멸됐고, 광명교 창시 992년이 되는 현재 게마인샤프트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보이지도 않는 존재가 됐다.

이것이 김현수의 소설 영웅일대기의 설정이었고, 내용이었다.

실제 김현수가 12년에 걸쳐 쓴 60권 분량의 소설에서, 고대 종교가 언급된 횟수는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였다.

‘존이 엘프숲에 들어가면서 몇 가지 상징물을 발견했다, 뭐 이 정도로만 언급했지 아마?’

김현수조차도 그저 추상적으로 ‘그곳, 엘프의 무덤에 고대 종교의 상징이 스산한 모습으로 양각돼 있었다.’라고만 서술했던 것.

실체를 가진 그 고대 종교의 상징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며 아딘은 이런저런 생각을 품게 됐다.

‘취향 한번 참…….’

예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에 제작돼 조악하기 짝이 없는, 그래서 기괴함마저 느껴지는 고대 종교의 상징을 모으는 파스텔의 취미에 대한 부정적인 소감이 먼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존은 진짜 지금 뭐 하고 있을까? 제니스 공화국에서 잘살고 있으려나?’

그리고 자신이 주인공으로 설정한 존 크리스토퍼 하이로드에 대한 궁금증이 두 번째로 떠올랐다.

‘나중에 여관으로 돌아가면 두루마리로 확인해 봐야겠어. 내 정신력도 제법 성장했으니 이제는 보이겠지?’

처음 로제를 만났을 때, 존의 근황에 대한 의문을 가졌지만 뒤이어 떠오른 여러 생각 때문에 따로 두루마리로 그것을 확인해보질 못했다.

이후에는 로제와 함께 도망치며 이런저런 일을 겪느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 광명력 992년 6월 15일 저녁.

이곳 발스 백작 파스텔 드 델로이의 서재에서 김현수가 추상적으로만 설정해 두었던 고대 종교의 상징을 구경하며 아딘은 다시금 존의 근황에 대한 궁금증을 품게 됐다.

“여동생이우?”

한편,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방안을 둘러보는 아딘과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로제를 바라보던 털보가 입을 열어 아딘에게 물었다.

아딘의 시선이 털보에게로 향했다.

“아니면, 딸?”

털보의 물음에 아딘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동생입니다. 로제, 인사해야지.”

아딘의 말에 로제는 화들짝 놀라며 아딘을 바라보다 이내 털보를 향해 고개 숙이며 인사했다.

“아, 안녕하십니까.”

“그래. 안녕합니다, 꼬마 아가씨.”

털보는 씩 웃으며 로제를 바라본 후 아딘에게 시선을 옮기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통성명도 안 했네. 난 릭이오. 근데 이름보단 털보라는 별명으로 더 많이 불리지. 그냥 댁도 날 털보라 부르면 되겠수다.”

“존 스미스라고 합니다.”

“스미스? 제니스 공화국 출신인가보우?”

“네. 그렇습니다.”

“거기서 여긴 어쩐 일로?”

“동생과 여행을 다니던 중이었습니다.”

“아. 여행.”

이후로 털보는 아딘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딱히 중요하다 싶은 질문은 없었다.

나이는 어떻게 되냐?

여행의 목적은 뭐냐?

오면서 뭘 봤냐?

직업은 뭐냐?

결혼은 했느냐?

아무튼 이런 사소한 질문들이 털보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고 아딘은 크게 책잡히지 않을 선에서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렇구만. 아무튼, 좋을 때야. 나는 이제 자식이 둘인데, 그것들 키울 거 생각하면 앞날이 캄캄하거든.”

어느새 말을 놓은 털보는 그때부터 자기 집안 이야기를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마누라가 얼굴은 예쁜데 살림을 잘못한다는 이야기.

큰아들이 말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기특하게도 엄마라는 말보다 아빠라는 말을 먼저 했다는 이야기.

작은아들은 이제 젖을 뗐다는 이야기.

아들만 둘이라 딸도 낳아 볼까 하는 이야기 등등.

아주 쓸모없는 이야기들이 그의 입에서 한참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애써 참고 들으며 아딘은 속으로 생각했다.

‘뭐지, 이 인간들?’

처음 백작이 자기를 초대했다 했을 때, 아딘은 상당히 긴장했다.

하지만 지금, 그 긴장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진짜 그냥 외지인이라서 부른 건가?’

아딘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한창 떠들던 털보가 하던 말을 멈췄다.

“그나저나 영주님은 뭐 하신다고 아직까지 안 오신데? 잠시 기다려보쇼. 내 금방 집무실로 갔다 올 테니까.”

“아, 네. 그렇게 하십시오.”

후다닥 서재를 나가는 털보를 바라보던 아딘은 그가 밖으로 나가자 황당하단 표정으로 헛웃음을 지은 후 다시 방을 쭉 훑었다.

여러 상징물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천장에 달린 뱀 우상이었다.

구리로 만든 듯, 누리끼리한 빛을 은은하게 보이는 뱀 우상은 나선형을 그리는 모양으로 달려 있었다.

다른 조악한 것들과는 달리, 나름 기예가 뛰어난 작가가 만든 듯, 제법 생동감 있는 모양세였다.

그렇게 뱀 우상을 비롯해 여러 고대 종교의 상징들을 둘러보던 아딘은 그때까지 입을 다문 채 고개를 숙이고 있던 로제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로제. 여기 방에 있는 저 물건들 다 뭔 줄 아니?”

“네, 네? 아…… 아까 저분이 고대 종교의 뭐라고…….”

“그래. 맞아. 고대 종교의 상징. 예전에, 그러니까 마우세스 레비가 세상에 나타나 예언을 전하기 전까지 두루두루 사람들이 믿었던 우상들이야.”

“네…….”

로제는 별반 관심이 없다는 듯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아딘은 미소를 지어 보인 후 다시 고대 종교의 상징들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동안 아딘이, 그 자신도 알지 못하는 것들을 구경하고 있을 때, 서재 문이 열리며 털보가 들어왔다.

“에잉. 하여간 귀족들이란…….”

털보가 인상을 찌푸리며 들어오자 아딘은 의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거 미안하게 됐수. 영주님이 차나 한잔 대접하고 싶다 부르셨는데, 지금 또 뭐 급하게 일이 생겨서 여기로 못 오시겠다고 하시네.”

“아. 그렇습니까?”

“이거 괜히 오라 가라…… 미안하게 됐수다.”

“아닙니다.”

아딘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딘이 일어나자 로제도 뒤따라 일어났다.

“마을에는 언제까지 머무를 생각이우?”

“사흘 정도만 머무르다 움직일 생각입니다.”

“그래. 내 나중에 영주님께 이야기해서 어떻게든 식사라도 대접하겠수.”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괜찮기는.”

그렇게 아딘은 털보의, 사뭇 과장돼 보이는 미안해함을 느끼며 로제와 함께 성채를 빠져나갔다.

아딘과 로제가 영지 서쪽에 자리한 여관으로 가는 것을 확인한 털보는 그대로 영주 집무실로 올라갔다.

“어떻습디까?”

“수상해. 뭔가 수상해.”

집무실 책상에 앉아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파스텔이 털보의 물음에 대답했다.

“제사장께서도 수상하게 여기시고 계셔.”

파스텔의 말에 털보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곤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일단, 사흘 머물다 간다고 하니, 그동안에 제가 아주 철통같이 감시를 하고 있겠습니다.”

“그래. 그냥 조용히 떠나면 상관없지만, 혹시라도 우리 정체를 알고 접근한 거라면…… 최대한 일이 커지기 전에 처리해야 해. 알겠냐?”

“걱정 마십쇼. 여차하면 제가 그냥 척추를 접어놔 버리겠습니다. 하하하.”

털보의 자신만만한 대답에 파스텔은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 * *

슈드 자치령 주요 도시 시장 및 시장급 관료에게는 1년에 2차례, 상반기와 하반기에 국제정세를 요약한 보고서가 총독부로부터 내려왔다.

특산물 수출이 경제의 핵심인 슈드 자치령 입장에선,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맞춰 발 빠르게 대응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올해 광명력 992년 3월에도 총독부는 주요 시장 및 동급 관료에게 보고서를 배포했다.

그리고 조르주와 휴고는 모두 그 보고서에서 저 멀리, 대륙 동북부에 자리한 벨로디나 왕국의 정세 변화를 확인했다.

‘아딘 콘스탄틴은 실종됐다고 했어. 도망을 쳤다고…… 근데 그 인간이 왜 황금 갑옷을?’

냇가 바위에 앉아 졸졸 흐르는 물결을 바라보며 조르주는 인상을 찌푸렸다.

‘왕위 계승권과는 거리가 한참 먼, 정통성이 부족한 유리 콘스탄틴이 왕좌를 탈취하면서 벨로디나 왕국은 자연스럽게 제니스 공화국의 괴뢰국이 됐어.’

3월 기준, 벨로디나 왕국의 군대는 해산됐고 그 자리를 유리 콘스탄틴과 계약을 맺은 제니스 공화국 출신 용병들이 대체했다.

도합 5만 명의 용병이 세 명의 소드 마스터의 지휘하에 상비군처럼 벨로디나 왕국 주요 거점에 배치됐다.

용병을 제공한 제니스 공화국 3대 상단, 즉 콘테 상단과 드라기 상단 그리고 루비오 상단은 벨로디나 왕국의 핵심 자원에 대한 50년 무상 사용권을 취득했다.

재상과 재무관, 병무관, 내무관 등 고위 관료직은 제니스 공화국에 망명 중이던, 전임 국왕 블라디미르 2세의 반대파에 속했던 귀족들이 차지했다.

블라디미르 2세의 아들들인 아딘 콘스탄틴과 드미트리 콘스탄틴을 따르던 자들은 모두 처형되거나 자취를 감췄다.

‘사실상 아딘 콘스탄틴이 살아있다 해도 어찌할 수 없는 수준이 됐지. 하지만 황금 갑옷을 가지고 있다면?’

칼과 화살이 뚫지 못하는 절대 방어를 자랑하는 황금 갑옷.

묵시록 종단에 내려오는 예언에 세상에 파멸을 몰고 온다고 명시된 존재.

그런 물건을 가진 상태라면 이야기는 다를 수도 있다고 조르주는 생각했다.

‘일이 단순하지가 않아…… 자칫 먼 이방 왕국의 내분에 휘말릴 수도 있어.’

조르주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냇물을 마시고 잠시 휴식을 취하며 에너지를 회복한 휴고가 자리에서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반나절만 더 가면 발스입니다. 조르주 전도자님께서 보신대로라면 두 사람은 이곳을 지났으니 큰일이 없다면 발스에서 머물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설령 이동했더라도, 금방 따라잡을 수 있겠고 말입니다.”

휴고의 말에 조르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다가갔다.

휴고는 조르주의 손을 잡은 다음 발을 놀리며 공간을 접어 달리기 시작했다.

‘이 이상으로 휘말리면 정말 귀찮은 일이 벌어질지도 몰라. 그래, 디에고 공작이 발견 즉시 스크롤을 찢으라 했으니, 딱 내 역할은 거기까지야.’

연금과 은퇴 후 노후를 보낼 조그만 마을의 대저택.

이제 딱 5개월 하고도 절반 정도만 버티면 그 모든 것을 손에 쥘 수 있다.

플루슈드 시장이라는 정치적 지위에서 오는 업무 스트레스와 묵시록 종단 전도자라는 종교적 지위에서 오는 심적 부담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들은 포기할 수 없지. 암. 포기할 수 없고말고.’

빠르게 좁혀지는 공간 속에서, 조르주의 눈빛은 늙은이의 그것답지 않게 활활 타올랐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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