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1 다가오는 그림자 (2)
“끔찍하군.”
불타버린 흔적이 역력한 아믈리에 중심부 성채.
한때 아믈리에 가문이 소유하고 있던 이곳은 농노들에 의해 불탄 후 버려진 상태였다.
혁명의 열기인지 분노의 광기인지 모를 기운이 지배하는 아믈리에에서 농노들의 의심어린 눈총을 받으며 성채에 도착한 조르주와 휴고는 폐허가 된 성을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 번, 봐 주시겠습니까?”
휴고의 부탁에 조르주는 고개를 끄덕인 후 성벽을 손으로 짚은 뒤 눈을 감았다.
순식간에 과거의 모습들이 지나갔다.
그중 조르주가 주목한 것은 아딘의 입장이었다.
아딘이 성문을 넘는 순간, 과거를 직시하는 조르주의 눈은 그 뒤를 따랐다.
아딘과 발자크의 대화, 로제를 포함한 세 사람의 식사, 아딘과 로제의 혼절, 발자크와 마누엘의 변태적인 행동.
조르주는 발자크의 변태적인 패션에 진저리를 쳐야만 했다.
하지만 이내, 발자크의 얼굴이 황금 갑옷을 입은 아딘에 의해 뭉개지고, 벽을 부수며 마누엘의 방으로 진격한 아딘이 로제를 채찍질하려던 마누엘의 머리통을 깨버리는 것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켜야만 했다.
아딘이 병사들을 모조리 때려죽이고 발자크와 마누엘의 가슴팍에 칼로 이름을 새긴 후 남쪽 성벽에 매달아 버리는 모습까지 확인한 다음 조르주는 눈을 떴다.
이미 그의 몸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상태였다.
“괜찮습니까?”
휴고의 물음에 조르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휴고는 허리춤에서 물통을 꺼내 조르주에게 건넸다.
조르주는 고맙다는 손짓과 함께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황금 갑옷이…… 아주 그냥 민란까지도 부채질한 모양이오.”
“민란을 말입니까?”
조르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이 본 것을 휴고에게 이야기해주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휴고는, 조르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온몸을 부르르 떨어야만 했다.
“동부 귀족들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어도……”
역겨운 것을 본 것처럼 휴고가 인상을 찌푸렸다.
조르주는 가볍게 혀를 찼다.
“어쨌건 황금 갑옷은 이제 단순히 우리 조직이 쫓는 존재로만 국한될 수 없게 됐소이다.”
조르주의 말에 휴고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맞습니다. 건달이나 강도를 죽인 거라든가, 귀족 자제를 구타한 거라면 몰라도 민란을 선동한 것은 도무지 묵과하기 어렵습니다.”
“황제 폐하께서는 조금 더 편해진 것 아니겠소? 대신들에게 따로 설명할 필요 없이, 민란 선동자를 체포하기 위함이라 하고 군대를 일으키실 수 있으니 말이오.”
“그건 또 그렇긴 합니다.”
“뭐, 일단 우리는 계속 황금 갑옷의 뒤를 추적하는 수밖에는 없지만 말이오.”
“그렇긴 한데……”
휴고가 말끝을 흐리자 조르주는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휴고가 목소리 낮춰 조르주에게 이야기했다.
“이 이상 우리가 더 추적을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휴고의 말에 조르주는 뜨끔했다.
‘이 인간…… 어떻게 이렇게 나랑 생각이 똑같을 수가?’
어렴풋이 휴고가 자신과 비슷한 부류가 아닐까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던 말.
더 이상 추적을 할 필요가 있을까?
그 말이 휴고의 입에서 나오자 조르주는 손뼉이라도 치고 싶었다.
하지만 참았다.
“그게 무슨 소리요, 로이에르 전도자?”
시치미떼고 조르주가 이야기하자 휴고는 가볍게 인상을 찡그리며 이야기했다.
“우리 솔직해집시다, 조르주 전도자님.”
“……”
“이대로 우리가 더 추적해봐야, 재수 없으면 아믈리에 남작 꼴 나지 않겠습니까?”
“……”
“어차피 황금 갑옷을 입은 놈의 특징을 모두 파악했습니다. 담갈색 머리에 눈동자, 젊은 남자, 검은 머리의 조그만 소녀랑 함께 다님.”
“……”
“이대로 우리는 철수합시다. 괜히 더 따라가 봤자 시간만 낭비할 뿐입니다.”
휴고의 말이 진심임을 조르주는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인간도 내가 자기와 비슷한 부류인 걸 감지하고 있었어.’
조르주는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렇게 하지요.”
조르주의 대답에 휴고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좋습니다. 그렇게 합시다. 하하하.”
다시 파세레빌로 돌아가 여유로운 커피 한 잔을 할 수 있단 생각에 휴고는 들떴다.
그 들뜸이 그의 표정과 웃음소리를 통해 외부로 표출됐다.
그리고 그것은 두 사람을 주시하던, 반란군이 된 농노들의 눈에 포착됐다.
“귀족 놈들이다! 저기 귀족 놈들이야!”
농노들이 고함을 지르며 두 사람에게 달려왔다.
각자 손에 얼마든지 흉기가 될 수 있는 농기구를 든 채.
십수 명의 농노들이 흉흉한 기세를 내뿜으며 달려오자 조르주와 휴고는 모두 화들짝 놀랐다.
“네놈들! 귀족 놈들이지!”
농노 하나가 낫으로 두 사람을 가리키며 소리질렀다.
휴고가 거세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정했다.
“아, 아니요. 우린 귀족이 아니라 평민이오.”
“거짓말 마! 어느 평민이 반지를 그렇게 끼고 있어!”
농노의 말에 휴고는 황급히 손을 뒤로 돌렸다.
결혼반지와 징세관으로 임명받을 때 받았던 반지를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맞네! 귀족 맞아!”
“죽여! 죽여! 죽여!”
분노에 찬 농노들이 두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휴고와 조르주는 뒷걸음질 치다 성벽에 막혀버렸다.
“죽여! 죽여! 죽여!”
낫과 곡괭이, 삽이 두 사람의 머리통을 노리며 휘둘러졌다.
‘커피…….’
‘조금만 있으면 은퇴인데…….’
조르주의 능력은 과거를 볼 뿐, 다른 물리적 영향력을 행사할 순 없다.
휴고의 능력으론 도망가는 게 가능하지만 지나치게 힘을 소진해 당분간 능력을 사용할 수 없다.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두 사람은 괜한 일에 휘말렸다는 한탄과 함께, 눈을 감았다.
[까앙-!]
* * *
발스.
샤펠 제국과 제니스 공화국 사이의 자연 국경 역할을 하는 고블린산맥 북부 끝자락과 엘프숲 서남부 끝자락 사이에 자리잡은 조그만 영지.
질 좋은 철강이 생산되는 광산이 있고, 또 토지가 비옥하여 포도 농사가 잘 되기에 경제적으로 딱히 어렵거나 하지는 않은 곳.
풍족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은, 딱 적당한 수준의 영지라 그런지 사람들의 표정은 대체로 밝았다.
포도 농장으로 나가는 농민이나 광산으로 올라가는 광부나, 동네를 뛰어다니는 아이들이나 냇가에서 빨래를 하는 아낙네들이나.
모두 싱글벙글한 얼굴이었다.
‘확실히 영주가 정상적인 사람인가, 주민들 표정부터가 다르네.’
변태 가학성욕자가 다스리던 아믈리에의 주민들이 보여주던 우중충한 표정과는 대비되는, 발스 주민들의 밝은 표정을 바라보며 아딘은 속으로 안도했다.
최소한 영주의 패악질 때문에 또 힘을 쓰고, 마음을 쓸 일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외진 곳이라 그런가, 거 더럽게 사람 쳐다보네.’
물론 마냥 편하지는 않았다.
철강 때문에 가끔 상인들이 오는 것을 제외하면 외지인이 아예 드나들지를 않는 곳인 만큼 처음 보는 아딘과 로제를 향해 주민들은 저마다 한 차례 이상 눈길을 보냈다.
그리고 그것이 아딘에게는 굉장히 신경이 쓰였다.
‘벨로디나에서 도망올 때 여기를 지나쳤으면 아예 날 영주에게 끌고 갔겠네.’
벨로디나 왕국에서 슈드 자치령으로 갈 때, 최대한 인적 드문 곳으로 가기 위해 아딘은 산길을 이용했다.
그때 자신이 어떤 꼬락서니였는가를 떠올리며 아딘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어디 재워줄 곳은 있지 않으려나…… 가끔 상인들도 온다는데.’
그렇게 아딘은 한동안 자신과 로제를 향한 주민들의 시선을 애써 외면한 채 머물만한 곳을 두리번거리며 찾았다.
다행히 아주 가끔 상인들이 오는 곳이어서 그런지, 주점을 겸하는 여관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하룻밤에 10실버요.”
10실버. 즉 3,500원.
1골드의 10분의 1.
아딘은 곤란한 표정으로 여관 마당에서 자신을 올려다보며 힐끔거리는 여관 주인을 바라보았다.
“제가 실버가 없어서 말이죠.”
아딘의 말에 여관 주인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딘은 쓴웃음을 지으며 주머니에서 1골드를 꺼냈다.
골드를 보자 여관 주인의 표정이 일순간 밝아졌다.
“그냥 1골드로 퉁 칠 테니까, 사흘만 머무르고 가겠습니다.”
“어이쿠. 그래주면 저야 재수죠.”
여관 주인은 아딘에게 말에서 내리라 손짓했다.
아딘은 로제와 함께 말에서 내렸고, 여관 주인은 손수 말고삐를 잡고 말을 마구간에 넣어 두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딘은 마구간에서 돌아온 주인에게 1골드를 건네주었고, 주인은 누런 앞니를 드러내고 웃으며 양손으로 돈을 받았다.
“허름하지만 그래도 깔끔하게 평소에 잘 정리해두고 삽니다. 헤헤헤.”
곧 여관 주인의 안내를 받아 2층 방에 도착한 아딘은 좁고 낡았지만 지저분하지는 않은 방의 상태를 확인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는 나중에 1층 홀로 내려오면 됩니다요. 헤헤헤.”
여관 주인의 친절한 안내에 아딘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여관 주인은 아딘과 로제가 짐을 푸는 것을 확인한 후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아래로 내려갔다.
“확인했나?”
1층 홀에 홀로 앉아 맥주를 마시던 털보가 계단에서 내려오는 여관 주인에게 물었다.
여관 주인은 계단 위를 한 차례 살펴본 후 빠르게 털보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이거 봐. 이거.”
여관 주인은 털보에게 아딘에게 받은 1골드를 보여주었다.
털보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10실버를 내라니까, 실버는 없다면서 이걸 주더라고.”
“흐음…….”
“아니, 그 장사꾼 놈들도 들고 다니는 실버를 왜 안 들고 다닐까?”
여관 주인의 의문에 털보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여관 주인은 1골드를 다시 품에 넣은 후 테이블 너머로 들어가 잔에 맥주 하나를 채운 후 쭉 들이켰다.
“서부하고 슈드 자치령에서는 실버가 거의 안쓰인다고 들었어.”
주인이 맥주를 다 마실 때 쯤, 털보가 입을 열었다.
“자치령?”
“그래.”
“자치령이면…… 아니, 자치령이건 서부건 여기서 굉장히 먼 곳이잖아?”
“그렇지.”
“장사꾼 놈들이 그쪽하고 뭐 중계인지 지랄인지를 한다지 않았나?”
“그랬어.”
“근데 거기는 왜?”
주인의 물음에 털보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 인간아. 저 외지인 놈이 그쪽 출신일 수도 있단 이야기잖아.”
“아……”
“하여간 이 돌대가리 진짜.”
털보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실실 웃으며 맥주를 쭉 들이켜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영주님한테 말씀드려야겠어. 뭐, 수상한 놈인지 아닌지는 영주님이 판단하시겠지.”
털보는 그 자리에 1실버를 얹어 놓은 후 여관을 빠져나갔다.
“수상한 놈이긴 하겠어?”
여관 주인은 살짝 불안감을 느끼며 1실버를 챙기고 자리를 치웠다.
* * *
‘내 연금……’
조르주의 눈앞으로, 그가 보아왔던 은퇴 시장들의 노후가 지나갔다.
누군가는 제니스 공화국의 화려한 도시에서, 누군가는 샤펠 제국의 조용한 농촌에서, 누군가는 자신이 다스렸던 도시의 교외에서.
‘아무도 게마인샤프트나 벨로디나로 가진 않았지…… 나도 그럴 생각이었는데…….’
플루슈드 시장으로 재직하며 모아둔 돈으로 구매한, 슈드 자치령 동부 해안가의 어느 조그만 마을에 자리한 으리으리한 저택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내 커피……’
휴고도 마찬가지였다.
저 멀리, 동부 야생의 땅 렝고스에 자생한다는 담갈색 원두.
자그마치 두 달 치 월급만큼의 값어치를 하는 그 비싼 물건을 주문시켜두고, 그 향을 맡아보지도 못한 채 이렇게 죽다니.
마치 코앞에 있는 것처럼, 그 그윽한 향이 느껴지는 것만 같은 느낌에 휴고는 결국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그런 둘을 향해 성난 농노들의 삽과 곡괭이가 내려쳐 졌다.
[까앙-!]
“이, 이게 뭐야?!”
“어, 어디서 나온 거야!”
농노들의 당혹스러워하는 목소리에 조르주와 휴고는 천천히 눈을 떴다.
‘이, 이건?’
거대한 청동 덩어리가 두 사람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 청동 덩어리는 두 사람을 향해 날아드는 농노들의 연장을 대신 맞아주었다.
“가, 갑자기……”
농노들이 당황해하는 사이, 별안간 청동 덩어리가 푸른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