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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20화 (20/175)

020 다가오는 그림자 (1)

광명력 992년 6월 13일.

“태워라! 태워라! 태워라!”

“우오오오오오오!”

아믈리에에서 남서쪽으로 40km 정도에 자리한 누벨리에.

아믈리에와 마찬가지로 조그만 규모의 촌락인 이곳에선, 반란군으로 변한 농노들의 복수가 진행되는 중이었다.

“이보시게들. 제발 살려주시게. 나를 죽여도 좋으니, 제발 내 손자 만큼은 살려 주시게.”

누벨리에의 늙은 영주는 주름진 손을 모아 자신과 며느리 그리고 손자를 내려다보는 농노들에게 사정했다.

“퉤-!”

그런 그의 얼굴에 농노 한 명이 침을 뱉었다.

“당신 손자는 그렇게 살리고 싶으면서 왜 내 손자는 때려 죽인 거야!”

영주 만큼이나 주름이 자글한 늙은 농노의 분노에 주변의 농노들이 동조해주었다.

“어린 애가 네놈 말을 놀라게 했다는 이유 만으로 병사들이 때려 죽일 때, 네놈은 사정하던 내 아들을 어떻게 했지? 어?!”

말을 하다 말고 늙은 농노는 열불이 터졌는지 들고 있던 삽으로 영주의 머리통을 갈겼다.

“끄억!”

영주는 그대로 옆으로 쓰러졌고, 그런 그를 여기저기 옷이 찢어진 며느리와 왼손이 짓이겨진 손자가 붙들었다.

“기름을 부어!”

“부어! 부어! 부어!”

곧 세 귀족이 묻힌 구덩이에 농노들이 기름을 부었다.

세 귀족은, 평소 그들이 멸시하던 농노들을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며 기름을 뒤집어 썼다.

“태워라! 태워라! 태워라!”

농노들의 분노에 찬 외침 가운데 한 농노가 들고 있던 횃불을 구덩이에 집어 던졌다.

[화르륵-!]

곧 거센 불길이 일어나며 구덩이에서 타오르기 시작했고, 그 속에선 세 귀족이 내지르는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우와아아아아-!”

그 모습을 보며 농노들은 환호했다.

영주가 보는 앞에서 그의 병사에 의해 어린 손자를 잃었던 늙은 농노는 슬픔과 통쾌함에 눈물을 흘렸다.

“미개한 것들……”

그리고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파세레빌 징세관 휴고는 주먹을 쥐며 부르르 떨었다.

그런 휴고를 플루슈드 시장 조르주가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해주었다.

“동부 전체가 이 모양입니다. 도대체 영주들은 뭘 하고 있답니까?”

휴고의 분노에 찬 으르렁거림에 조르주는 한숨을 내쉬며 이야기했다.

“동부는 황제 폐하께서도 버린 지역이오. 자연히 영주들 사정도 그리 좋지 않지. 중무장 보병만 있었어도 이 정도 민란은 막을 수 있었겠지만, 다들 경보병이니 원…….”

조르주의 말에 휴고는 이를 갈 뿐이었다.

“이 기회에 황제 폐하께서 동부에 조금 더 신경을 써주시고, 또 조직원들도 심어 두길 바라야지 않겠소이까.”

조르주는 그렇게 이야기하며 휴고의 어깨를 툭툭 쳤다.

휴고는 한숨을 내쉬며 조르주의 손을 잡은 후 발걸음을 뗐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인적 드문 들판에 도착했다.

인적이 드물다지만 이미 농노 반란군이 휩쓸고 지나갔기에, 곳곳에 남은 것이라곤 불에 타다 만 잡초들 뿐이었다.

[끼요오옷-!]

두 사람이 나타나자 허공을 배회하던 독수리가 우렁찬 울음 소리를 내뱉은 후 땅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독수리는 땅에 발이 닿자 마자 연기와 함께 사람으로 변했다.

“그래, 상황은?”

휴고의 물음에 비서 필리프는 자신이 허공에서 본 동부 일대를 상세히 말해주었다.

“반란군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지금 그나마 버티는 곳도 조만간 무너질 것처럼 보였고 말입니다.”

“빌어먹을 것들…… 그래. 일단 너는 이대로 아퐁으로 날아가라. 가서 그쪽에 있는 전도자에게 동부의 상황을 전해. 동부 귀족들도 자체적으로 외부로 소식을 전하겠지만, 너보다는 느리겠지.”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필리프는 휴고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 후 다시 독수리로 변해 허공으로 떠올랐다.

서쪽으로 날아가는 필리프를 잠시 바라보던 휴고는 다시 조르주와 손을 잡고 발걸음을 옮겼다.

공간을 접고 접어 10분간 이동한 끝에 두 사람은 마침내 아믈리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으윽…….”

다소 무리한 만큼 휴고는 도착하자마자 비틀거렸다.

그런 휴고를 부축하여 넘어지지 않게 한 조르주는 그가 자리를 잡자 천천히 바닥에 쭈그려 앉은 후 땅에 손을 갖다 댔다.

순식간에 그의 눈앞에 지난 과거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리고 이내 그는 아믈리에 영주 발자크와 함께 성채로 향하는 아딘을 확인할 수 있었다.

* * *

제국 동부는 가난한 곳이다.

역대 황제 그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지역이다.

제니스 공화국과 슈드 자치령 사이를 사보에 지방을 통해 오가는 영세 상인들을 제외하면 딱히 교역이라 할만한 것도 없었기에 도로도 발달하지 않았다.

도로가 발달하지 않으니 물자 수송에 문제가 생겼고, 자연히 동부 지역은 늘 물자 부족을 겪어야 했다.

그랬기 아믈리에 주변에 있던 영주들은, 아믈리에에서 시작된 농노 반란이 퍼졌을 때 제대로 대응을 할 수가 없었다.

반란군보다 병사의 숫자가 적은 것도 문제였고, 병사들이 모두 가죽 갑옷을 입은 경보병이었던 것도 문제였다.

삽시간에 농노 반란군의 물결이 아믈리에 지방을 중심으로 동부 전역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농노 반란군은 각 지역의 영주들에게 억압당한 농노들을 흡수하며 점차 그 규모를 키웠다.

귀족의 곳간과 무기고가 털렸고, 성채가 불탔다.

귀족들 대부분이 도망쳤고, 도망치지 못한 자들은 남녀 무관하게 농노들에게 조롱당하고 능욕당한 후 맞아 죽거나 생매장당했다.

“잠시 쉬었다 갈까, 로제?”

“네, 오라버님.”

동부 지역 민란의 방아쇠 역할을 한 아딘은 정작 그러한 혼란과 동떨어진 고블린산맥을 로제와 함께 조용히 지나고 있었다.

그 옛날, 아직 동부가 인간의 영역이 아니던 시절, 고블린들이 많이 살았다 하여 고블린산맥이라 이름 붙여진, 험준하지도 않고 위험요소도 없는 이 산맥을 따라 아딘은 쭉 북부로 올라가고 있었다.

“웃차.”

산 중 계곡에 이르렀을 때, 아딘은 로제와 함께 말에서 내렸다.

조용히 물을 마시는 말과 꼬리뼈를 문지르는 로제를 보며 아딘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말 고삐를 근처 나무에 묶어둔 후 아딘은 품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펼쳤다.

곧 두루마리 위로 제국 동부 지역에 관한 상세한 지도가 나타났다.

대륙 전체를 밝히 보이는 지도가 아니었던 만큼, 지도 위에는 아딘의 현재 위치가 조그만 담갈색 점으로 찍혀 있었다.

‘이건 나일거고, 여기 2개 중 큰 거는 말이고 작은 건 로제겠네.’

불칸의 갑옷을 포함한 3대 신물은 소유자의 정신력에 따라 그 사용 가치가 달라진다.

예컨대 불칸의 갑옷 같은 경우, 정신력이 극한에 이른다면 갑옷과 신체가 하나가 돼 구태여 갑옷을 꺼낼 필요가 없어진다.

즉, 신체가 무협에 나오는 금강불괴처럼 돼 그 어떠한 공격에도 당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딘이 버려진 신전에서 발견한 두루마리도 정신력의 성장에 따라 보이는 것의 정도가 달라졌다.

그리고 지금, 아딘은 고블린산맥에 있는 자신과 로제는 물론 산악지대 서쪽에 있는 영지에 나타난 농노 반란군 무리도 두루마리에 나타난 지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검은 점이 도대체 몇 개야?’

일일이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조그만 점들이 뭉쳐 마치 거대한 점처럼 보였다.

이미 아믈리에 가문의 사과밭에서 사과를 따면서 성채가 불타는 것을 봤던 만큼, 민란을 예상하긴 했지만 이 정도 규모가 되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불과 5일 만에 이 정도까지 퍼지다니…….’

아딘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시선을 우측 상단으로 돌렸다.

고블린산맥의 끄트머리에 자리한 조그만 영지와 그 너머에 광활하게 펼쳐진 엘프숲이 보였다.

아딘이 로제와 함께 지날 곳은 엘프숲 남쪽, 제니스 공화국 북쪽에 자리한 숲 외곽지대였다.

벨로디나 왕국에서 온 루트를 거꾸로 거쳐서 게마인샤프트 지방으로 들어서는 것이 현재 아딘의 계획이었다.

아딘은 마치 테블릿PC를 사용하듯, 고블린산맥 끝자락에 자리한 조그만 영지를 터치했다.

그러자 두루마리의 화면이 바뀌며 영지에 대한 정보가 떠올랐다.

<발스>

<델로이 백작가의 영지.>

<현재 영주는 파스텔 드 델로이 백작.>

<고품질 철강과 포도가 주 생산물.>

‘발스라…….’

아딘의 손이 이번에는 영주 파스텔의 이름을 터치했다.

그러자 파스텔의 초상화와 관련 정보가 떠올랐다.

<파스텔 드 델로이>

<광명력 954년 5월 7일생>

<1년 전 부인과 사별 후 독신으로 생활 중이다.>

<세금을 적정 수준으로만 거두는 만큼 백성들의 평가는 좋은 편이다.>

<고대 종교와 신화에 관심이 많으며 관련 자료를 모으는 것에 주로 돈을 사용한다.>

<휴계자로 조카인 릭 드 델로이를 지명했다.>

아무리 고블린산맥을 통과한다 하더라도 어쨌건 한 번은 거쳐야만 하는 곳이 바로 이곳, 발스였다.

발자크에게 한 번 세게 데인 만큼,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미리미리 들러야 할 곳의 지배자에 관한 정보는 숙지해둘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두루마리는 그런 정보를 충분히 아딘에게 제공해주었다.

‘나쁘지는 않네. 이 정도면 그냥 조용히 지나갈 수는 있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아딘은 두루마리를 말아 넣으려 했다.

그때, 그는 자신을 유심히 바라보던 로제의 시선을 느꼈다.

아딘이 로제를 바라보자 그녀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아딘은 그녀의 시선이 자신보단 두루마리에 가 있음을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로제.”

“네, 네?”

“이것 좀 볼래?”

아딘은 로제에게 두루마리를 건네주었다.

로제는 조심스럽게 양손으로 두루마리를 받아 살며시 펼쳤다.

“뭐가 보여?”

“…… 그냥 두루마리만 보입니다.”

“다른 건 뭐 안 보여?”

“네.”

“흐음……. 그래. 알았어.”

로제로부터 두루마리를 돌려받아 품에 넣은 후 아딘은 생각했다.

‘두루마리 자체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보여. 하지만 딱 거기까지야. 그들은 나처럼 두루마리를 통해 무언가를 보거나 하지는 못해.’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로제에 한정된 이야기였다.

아직까지, 아딘은 단 한 번도 로제 이외의 다른 누군가의 앞에서 두루마리를 펼친 적도 없었고 또 보여준 적도 없었다.

‘10월 1일에 로제가 각성하고 나선 이야기가 다를 수 있지 않을까?’

아딘은 가만히 로제를 바라봤다.

조그만 양손에 사과를 쥔 채 작은 입으로 오물오물 사과를 씹어 먹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아딘은 10월 1일 이후 그녀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외모 묘사는 딱히 해두지 않았기에 저 모습 그대로겠지만…… 정신적 성장은…….’

용족.

김현수가 만든 이 세계에서, 천계의 신들이나 마계의 마귀들을 제외하면 가장 강한 종족.

종종 지상에 물리적 실체를 가지고서 강림하고자 하는 신이나 마귀가 육체를 빌리고자 할 정도의 존재.

그들의 정신력은 인간을 초월해 신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김현수가 만들기로는 적어도 그랬다.

그랬기에 고독을 즐기고, 다른 종족과의 접촉을 꺼리는 존재.

아주 가끔 인간이나 엘프와 접촉하긴 하지만, 그래서 그들에게 자기 씨를 뿌리기도 하지만 그 이후에는 딱히 신경을 쓰지 않는 존재.

그런 고등 종족의 유전자를 절반 타고난 로제가, 부친으로부터 받은 유전자를 각성한다면 어느 정도의 정신력을 지니게 될까?

아딘은 지금으로서는 감히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만약 그때가 되면 로제도 나처럼 두루마리를 통해 정보를 읽을 수 있을까?’

아딘은 가만히 두루마리를 바라보았다.

‘만약 이게 순수하게 나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거라면…….’

그러면, 아마도 로제는 평생 두루마리를 통해 무언가를 보지는 못하리라.

‘뭐, 그건 그때 가서 또 보여줘 보면 되지. 지금 내가 해야 할 건 로제가 마녀가 되는 걸 막는 거니까.’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아딘은 로제가 사과를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그녀와 함께 말에 올라타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틀만 더 참어. 그럼 마을에서 쉴 수 있을 테니까.”

“네, 오라버니.”

주인님이라는 표현이나, 스미스 씨 같은 표현보다는 오라버니 같은 표현이 더 좋다고 생각하며 아딘은 가만히 자기 허리를 감싼 로제의 손을 잡아주었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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