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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19화 (19/175)

019 쫓기는 자들의 동행 (4)

발자크의 아들 마누엘.

올해 24세인 그는, 다른 귀족들이 보통 18세, 늦어도 20세에 결혼하여 일가를 이루는 것과 대조적으로 여전히 미혼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에 대해 발자크는 “마땅한 혼처가 없어서…….”라는 해명을 마누엘의 미혼을 문제 삼는 귀족들에게 내놓곤 했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농작물이라곤 감자에 약간의 밀 정도가 전부고, 특산물이라고는 아믈리에 가문에서 직접 담그는 사과주뿐인 가난한 영지로 어느 귀족 영애가 시집을 오려 할까?

하지만 아믈리에 가문의 비밀을 알고 있는 귀족들 입장에서는 발자크의 해명은 그저 어설픈 변명에 불과했다.

“흐흐흐흐흥~”

즐겁게 콧노래를 부르며 마누엘은 벽에 걸린 고문 도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채찍으로 할까? 회초리로 할까? 역시 시작은 가볍게 회초리가 좋긴 한데…….”

마누엘의 시선이 벽에 팔다리가 묶인 채 자신을 향해 등을 보이고 있는 로제에게로 향했다.

그녀의 등판에 가득한 흉터를 바라보는 마누엘의 눈이 욕망에 일렁였다.

“어이 너.”

마누엘의 부름에 차가운 벽돌에 얼굴을 파묻은 채 눈물을 흘리던 로제가 흠칫 몸을 떨었다.

“노예였냐?”

마누엘의 물음에 로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버지한테 듣기론 그 사내놈 동생이라든데, 거짓말이지?”

“……”

“보통 노예들 중 너처럼 채찍질을 많이 당한 애들이 인내심도 강하더라고.”

마누엘은 천천히 벽에 걸린 채찍 중 하나를 꺼내들었다.

끝이 갈라져 있고 거기에 날카롭기 그지없는 소형 톱날이 달린, 상당히 흉흉한 외양의 채찍이었다.

[휘이익-!]

마누엘이 채찍을 휘두르자 묵직하면서도 날카로운 소리가 공기를 찢어 발겼다.

“보통 이 채찍은, 회초리랑 일반 채찍 다음에 들었지만……”

마누엘의 시선이 로제의 등판으로 향했다.

“너는 이것부터 시작하면 되겠네.”

마누엘이 씩 웃으며 천천히 로제에게 다가갔다.

로제는 뒤에서 들려오는, 점차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눈을 질끈 감았다.

마음 깊숙한 곳으로부터 가장 먼저 올라온 것은 체념이었고, 그 다음으로 마치 발목을 잡고 나오는 쌍둥이 동생처럼 따라 올라온 것은 분노와 절망이었다.

‘다 죽여버릴 거야……’

그녀의 체념은 몸에서 힘을 빼도록 만들었다.

분노와 절망은 눈물을 통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그녀의 마음 속에서 나온 것은 간절함이었다.

채찍으로 얻어맞고 있는 자신을 악독한 주인으로부터 구해준 존재.

자신을 위해 금두꺼비를 아끼지 않은 존재.

두렵기만 하던 주인과 군인들을 무자비하게 두들겨 패던 존재.

앞길을 가로막는 도적 패거리를 단숨에 때려죽이며 자신을 안심시키던 존재.

자신의 손을 따스하게 잡아주던 존재.

‘스미스 씨…….’

간절한 마음으로 로제는 아딘을 염원했다.

채찍을 들고 다가오는 변태로부터 자신을 구해주길, 이 지옥과도 같은 곳에서 자신을 이끌고 나가주길 그녀는 간절히 소망했다.

“흐히히히히.”

그 염원과 소망은 마누엘의 변태적인 웃음소리와 함께 흩어졌다.

“넌 부디 몇 날 며칠이고 버텨주길. 다른 여자들은 하루도 못 버티더라고.”

마누엘이 희번득거리는 눈동자로 로제의 등판을 바라보며 팔을 뒤로 뻗었다.

그리고 그가 팔을 앞으로 뻗으며 채찍을 휘두르려 할 때였다.

[콰앙-!]

엄청난 진동과 함께 한쪽 벽이 무너져 내렸다.

마누엘은 화들짝 놀라며 몸을 뒤로 돌렸다.

[뻐억-!]

그의 왼쪽 광대에 황금 주먹이 꽂혔다.

“크하악-!”

마누엘은 허공에서 수차례 돌며 바닥에 쓰러졌다.

[빠악-! 빠악-! 빠악-!]

바닥에 누운 마누엘의 머리통을 황금 갑옷, 아딘이 사정없이 밟고 또 밟았다.

“크어억!”

발길질 한 번에 광대가 함몰됐고, 두 번에 치아가 몽땅 부서졌다.

세 번에 얼굴이 뭉개졌고, 네 번에 머리통이 박살 났다.

단 다섯 번의 공격에 마누엘은 숨을 거두었다.

하지만 아딘은 쉴새 없이 마누엘의 머리통을 밟고 또 밟아 완전히 그 형상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뭉개 놓고 나서야 발길질을 멈췄다.

“개자식들!”

욕설과 함께 아딘은 로제에게 다가갔다.

발자크를 죽이고 강탈한, 이 성 내부에 있는 모든 족쇄와 수갑을 열 수 있는 열쇠로 빠르게 로제의 팔다리를 봉쇄한 쇳덩이를 해체했다.

손목과 발목을 감싸던 족쇄와 수갑이 사라지자 로제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로제. 괜찮니?”

아딘의 물음에 로제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스미스 씨……”

황금빛 찬란한 불칸의 갑옷을 입은 아딘을 바라보며 로제는 눈물을 흘렸다.

“그래. 나야. 나 여기 있어.”

“스미스 씨…… 흐윽……”

로제는 참아왔던 눈물과 오열을 터뜨렸다.

아딘은 안쓰러운 마음에 가만히 그녀를 안아 주었다.

마냥 차갑지 않은 갑옷이 그녀의 조그만 몸을 감쌌다.

로제는 그렇게 한동안 흉갑에 얼굴을 파묻고 지난 4년여의 세월 동안 참아왔던 슬픔을 한꺼번에 터뜨렸다.

* * *

광명력 992년 6월 8일 아침.

아믈리에 남작의 성채가 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모든 농노가 볼 수 있는 남쪽 성벽에 두 구의 시체가 매달렸다.

둘 다 얼굴이 뭉개져 있었지만, 벌거벗겨진 두 사람의 가슴팍에 칼로 새겨 넣은 이름이 둘의 정체를 만천하에 알려주었다.

“저, 저거 영주님 아녀?”

“맞네. 영주님이네.”

“그 옆에는 소영주님이신가?”

“맞네.”

“어쩐 일이랴? 응?”

영주의 밭을 일구러 가던 농노들은 모두 농기구를 어깨에 짊어진 채 남문 어귀에 모여들었다.

그 가운데 비위가 약한 사람들은 형태조차 제대로 남지 않은 발자크와 마누엘의 얼굴에 역함을 느끼며 토악질을 해댔다.

“누가 죽인 거래?”

“모르지.”

“누군진 모르겠지만 잘 죽인겨. 저 두 사람은 천벌은 받은 거란 말이여.”

“암. 천벌이지. 천벌이야!”

농노들의 목소리가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저 더러운 것들이 내 조카한테 한 짓거리만 생각하면……”

그중 혈족을 발자크와 마누엘의 변태 성욕에 희생당한 이들을 중심으로 분노가 활화산처럼 터져올랐다.

“에라이!”

급기야 한 농노가 바닥에서 돌을 주워 발자크의 시체에 던졌다.

그 행위가 농노들의 억눌린 분노를 자극했다.

“병사들도 없는 모양이야!”

“다 들어가!”

“다 털어!”

영주와 그 아들이 얼굴이 뭉개진 채 시체가 돼 알몸으로 남쪽 벽에 매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체를 수습하는 병사는커녕 늘 성문 어귀에서 어슬렁거리던 병사들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아무리 배운 것 없는 농노들이라 하더라도 모를 수가 없었다.

“우와아아!”

순식간에 남문 어귀에 모여 있던 농노들이 성채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그들이 본 것은 곳곳에 죽어 나자빠진 병사들과 활짝 열린 곳간 그리고 유골과 부패가 상당 부분 진행된 남녀의 시체로 가득한 비밀공간이었다.

곳간에 쌓인, 소금에 절인 고기와 밀가루로 가득한 포대는 그들이 힘겹게 일해 바친 감자를 팔아 만든 돈으로 산 것들이었다.

비밀공간에서 부패되기 시작한 그리고 이미 부패된 시체들은 모두가 그들의 잃어버린 가족이요 이웃이었다.

굶주림과 분노가 농노들을 지배했다.

순식간에 영주의 곳간이 비었고, 시체로 가득한 성채에 불이 붙었다.

불은 성채 전체를 휘감으며 타올랐고 그 연기는 하늘 높이 솟구쳐 올라 주변에 있던 모든 영지에서 보일 정도였다.

성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고블린산맥 중턱에 자리한 영주의 사과밭에서 사과를 따던 아딘과 로제는 성채를 휘감은 불꽃과 연기를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로제.”

한참 그것을 바라보던 아딘이 입을 열었다.

“네, 스미스 씨.”

“너 그냥 내 동생해라.”

“네?”

로제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아딘을 바라봤다.

아딘이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그런 로제를 내려다봤다.

“내 동생하라고.”

“하, 하지만 스미스 씨. 저는…… 저는 스미스 씨의 노예입니다.”

“아니. 난 너를 노예로 삼은 적이 없어.”

“하지만 스미스 씨께서 저를 구매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로제의 말에 아딘이 미소를 지었다.

“너를 아테인 가문으로부터 산 건 맞지만, 노예로 삼은 건 아니야.”

“…… 그게 어떻게……”

노예 해방을 위해 노예를 샀다는 개념을 로제는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튼, 너 앞으로 내 동생해. 누가 어디가서 묻거든, 넌 내 노예가 아니라 동생인 거야. 알았지?”

“그게 스미스 씨의 명령이라면…… 앞으로 저는 스미스 씨의 동생이 되겠습니다.”

“가족 사이에, 남매 사이에 명령은 없어.”

아딘은 가볍게 로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로제는 얼굴을 붉히며 배시시 웃었다.

“아, 그리고 난 존 스미스가 아니야.”

“네? 그럼……”

“내 이름은 아딘. 아딘 블라디미로비치 콘스탄틴이야.”

“콘스탄틴…… 말입니까?”

“그래.”

아딘의 시선이 동북쪽으로 향했다.

제니스 공화국과 엘프숲 너머에 있을 벨로디나를 바라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아딘은 이야기했다.

“벨로디나 왕국 제18대 국왕 블라디미르 2세의 장남 아딘 블라디미로비치 콘스탄틴. 그게 내 이름이자, 진정한 신분이야.”

굳은 표정으로 동북쪽 하늘을 바라보던 아딘이 다시 미소를 지으며 로제를 바라봤다.

“그러니까 넌 앞으로 로제 콘스탄틴이 되는 거야. 나 아딘 콘스탄틴의 여동생이자, 당당한 콘스탄틴 왕가의 왕족이 되는 거지.”

그 말을, 로제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눈을 깜빡이며 아딘을 올려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 * *

“흐음…….”

파세레빌 북부.

슈드 자치령과 샤펠 제국의 분기점 중 하나인 조그만 계곡.

그곳에서 조르주는 땅바닥에 쭈그려 앉은 채 손을 갖다 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휴고와 필리프가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던 조르주는 이내 눈을 뜨며 자리에서 힘겹게 일어났다.

“뭔가 보셨습니까?”

휴고의 물음에 조르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금 갑옷은 여기서 계곡을 건너 동쪽으로 향했소이다.”

“동쪽이라면…… 사보에 지방으로 말입니까?”

“그렇지요. 영세 상인들이 제니스 공화국으로 향하는 길이지요.”

“흐음…… 사보에 지방으로 향했다…….”

휴고의 시선이 동쪽으로 향했다.

“황금 갑옷이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황제 폐하께서 직접 다스리시는 서쪽이 아닌 동쪽으로 가는 게 당연하긴 합니다만…… 흐음…….”

샤펠 제국 동부.

지독하게도 가난한, 그래서 황실이 지난 300년간 중앙 통제를 강화하는 와중에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곳.

황실이 사실상 버리다시피 한 곳인 만큼, 그곳을 지배하는 귀족들의 아집은 대단했다.

비록 황제에게 대놓고 반기를 들지는 못했지만, 중앙에서 가끔 관료들이 올 때면 지독한 텃세를 부리기로 유명했다.

하물며 제국에서 보낸 관료에게도 그러한데 자치령에서 온 관료에게는 어떠할까?

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일단 움직입시다.”

휴고의 말에 담긴 찝찝한 감정을 조르주는 읽을 수 있었다.

“조직조차도 버린 동부라오. 텃세는 어느 정도 감안 해야겠지. 에잉…….”

황실로부터도, 묵시록 종단으로부터도 외면당한 동부의 사정을 떠올리며 조르주는 가볍게 불만을 토로했다.

“그냥 적당히 괜찮은 귀족 하나를 신도로만 영입해 뒀어도 이 정도로 피곤하진 않았을 텐데…….”

구시렁거리며 불평하는, 은퇴까지 6개월도 남지 않은 노인을 바라보며 휴고와 그 비서는 쓴웃음을 지었다.

“자, 손을 잡읍시다.”

휴고가 조르주와 필리프 사이에 서서 손을 내밀었다.

조르주와 필리프가 휴고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휴고는 한 차례 심호흡을 한 후 발걸음을 떼었다.

그가 오른발을 든 순간, 공간과 공간 사이에 왜곡이 발생했다.

순식간에 그의 시야에 있던, 500m 전방의 공터와 세 사람이 서 있는 개울가 사이의 공간이 접어졌다.

그리고 휴고가 오른발을 땅에 디딘 순간, 세 사람은 공터에 서 있게 됐다.

다시 휴고는 왼발을 들었다.

300m 전방에 자리한 커다란 떡갈나무와 세 사람이 선 공터 사이의 공간이 접어졌다.

그리고 휴고가 왼발을 땅에 디디자 어느새 세 사람은 떡갈나무 아래에 서 있게 됐다.

다시 휴고가 오른발을 들었고, 공간이 접혔으며 발을 내디딜 때 세 사람은 떡갈나무를 한참 뒤로하게 됐다.

그렇게 세 사람은 빠른 속도로 제국 동부로 향했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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