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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18화 (18/175)

018 쫓기는 자들의 동행 (3)

아믈리에.

가난하기로 소문난 샤펠 제국 동부에서도 특히나 가난한 이곳은 “훔칠 게 없으니 도둑도 없다.”라는 조소 어린 속담이 있을 만큼 낙후된 영지였다.

그리 크지 않은 조그마한 영지에는 비옥한 땅도, 광물도, 특수한 약초도 없었다.

그저 감자나 자라는 척박한 밭과 겨울철 단백질 공급원이 돼 주는 멧돼지나 토끼 정도가 이 땅의 전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주 발자크 드 아믈리에의 손님 대접은 여타 귀족과 비교해 꿀리지 않을 수준은 됐다.

잘 자란 씨암탉을 통으로 구워 만든 훈제 요리에 향신료를 머금은 돼지 목살을 아낌없이 넣은 수프 그리고 30년 묵은 포도주까지.

목욕으로 때를 벗겨낸 후 그야말로 오랜만에 아딘과 로제는 육포나 생선이 아닌, 제대로 된 음식으로 배를 채울 수 있었다.

“정말 훌륭한 식사였습니다. 이렇게 떠돌이 여행가에게, 그것도 제국 신민도 아닌 사람에게 이런 과분한 대접을 해주시니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아딘이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발자크에게 이야기했다.

발자크는 인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화답했다.

“하하하. 비록 가난한 영지지만 손님만큼은 내 가족처럼 대접한다는 것이 우리 아믈리에 가문의 전통이자 가훈이라오. 하하하.”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빈 접시와 그릇들이 치워졌고 후식으로 갓 구운 빵과 버터 그리고 과일 모음이 나왔다.

“이 후식은 또 포도주보다는 사과주랑 함께 먹는 게 최고라고 생각하오. 하하.”

발자크는 그렇게 이야기하며 하인을 바라봤다. 하인은 잠시 아딘과 로제를 힐끔거린 후 발자크를 향해 고개 숙인 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발자크가 아딘에게 이런저런 사소한, 정말 사소해서 별 의미도 없는 것들을 묻는 사이 하인은 쟁반에 잔 3개와 사과주가 담긴 병을 들고 들어왔다.

“오면서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고블린산맥 중간에 우리 가문 소유의 농장이 있는데, 증조부님부터 조부님, 아버님 그리고 나에게 이르기까지 아믈리에 남작 4대가 손수 기른 사과나무가 있소이다. 거기서 직접 따서 담은 것이라오. 하하하.”

발자크는 사과주를 잔에 채운 후 아딘과 로제 그리고 자기 앞에 놔주었다.

“배려에 감사합니다.”

아딘은 미소를 지으며 잔을 들었다.

로제는 아딘의 눈치를 살피다 그가 잔을 들자 따라 들었다.

“우리 스미스 씨와 그 동생분의 즐거운 여행을 위하여.”

발자크가 잔을 내밀었고, 아딘이 그 잔에 자기 잔을 가볍게 접촉했다.

눈치를 보다 타이밍을 놓친 로제의 잔에다가도 가볍게 잔을 접촉한 후 아딘은 홀라당 사과주를 목구멍 너머로 넘겨버렸다.

로제도 아딘을 따라 홀라당 사과주를 넘겼다.

“크으…….”

식도와 위장에서 느껴지는 화끈함 그리고 혀에서 느껴지는 달콤함에 아딘은 순간 정신이 몽롱해짐을 느꼈다.

‘응?’

문제는 그 몽롱해짐이 지속적이란 것이었다.

‘뭐지?’

시야가 희뿌예졌고, 사물이 2개, 3개, 4개로 나뉘어 보이기 시작했다.

“수면제를 한 번에 음식에 다 담아서 먹이면, 가끔 민감한 놈들이 눈치를 채더라고.”

발자크는 눈이 풀리고 입을 벌린 채 자신을 바라보는 아딘과 이미 얼굴을 식탁에 처박고 잠든 로제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그래서 너희들 음식에 아주 조금씩 나눠서 탔지. 수프에 조금, 포도주에 조금 그리고 너희들 앞에 놓인, 너희들이 닭을 찍어 먹은 소금에다가 또 조금.”

발자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사과주는 그런 수면제를 한 번에 태워주는 역할을 할 뿐이고.”

때맞춰 문이 열리며 두 사람이 천천히 들어왔다.

한 명은 하인이었고, 다른 한 명은 발자크와 비슷하게 생긴, 조금은 더 젊은 나이의 청년이었다.

“마누엘. 저 꼬마애는 네가 알아서 처리해라.”

발자크의 말에 청년, 마누엘 드 아믈리에가 씩 웃으며 로제에게 다가갔다.

그는 로제를 어깨에 들쳐멘 채 다시 식당을 빠져나갔다.

“내가 준비할 동안 넌 저 남자를 지하실에 고이 모셔둬라.”

발자크의 명령에 하인이 가볍게 고개를 숙인 후 아딘을 업어 들고 식당을 빠져나갔다.

“자, 그럼 준비해볼까?”

홀로 남은 발자크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씩 웃었다.

그 웃음 속에는 이전까지 보여주었던 인자함은 오간 곳 없이 그저 먹잇감을 앞에 둔 맹수와 같은 느낌만이 남아 있었다.

* * *

광명력 992년 6월 5일 밤.

조르주는 샤를의 참모 로이와 함께 어둠을 따라 북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림자와 그림자를 타고 다니는 로이의 능력에 힘입어 두 사람은 족히 일주일은 걸리는 포르트지앵과 파세레빌 사이의 거리를 불과 이틀만에 주파할 수 있었다.

해가 떨어지면 움직이고, 해가 뜨면 쉬기를 반복한 1박 2일의 강행군을 끝내고 두 사람이 파세레빌에 도착한 6월 7일 밤.

“우웨엑-!”

파세레빌 세관청 뒷마당에서 조르주는 수없이 토악질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로이는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우욱…… 퉤-!”

토악질을 끝내고 침을 뱉은 뒤 조르주는 허리를 폈다.

“올라갑시다.”

로이의 기계적이고 차가운 목소리에 조르주는 속으로 온갖 쌍욕을 내뱉으면서 그를 따랐다.

다행히 그림자와 어둠이 아닌, 정상적인 루트를 통해 징세관 집무실로 올라갔기에 조르주의 고통이 더해지는 일은 없었다.

“어서들 오십시오.”

징세관 휴고는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로이와 조르주를 반기며 양팔을 활짝 벌렸다.

하지만 로이는 더 이상 휴고에게 다가가지 않았고, 조르주는 숨을 헐떡이며 손만 들 뿐이었다.

어색해진 모양세로 잠시 팔을 벌리고 있던 휴고는 이내 기지개 켜는 척을 한 뒤 팔을 내렸다.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휴고의 말에 로이는 특유의 무뚝뚝한 표정으로 짤막하게 대답했다.

“큰 수고는 없었소.”

순간 그의 곁에 서 있던 조르주가 갈고리눈으로 로이를 한 차례 힐끔거렸다.

휴고는 어색하게 웃으며 두 사람을 원탁으로 안내했다.

“난 다시 주군께 가봐야 하오. 조르주 전도자가 주군의 뜻을 징세관에게 잘 전해줄 것이오.”

로이는 그 말만 남기고 다시 그림자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휴고는 어색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고, 조르주는 로이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며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의자에 앉았다.

조르주가 앉자 휴고도 그와 마주보고 앉았다.

“커피 한 잔?”

휴고의 말에 조르주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물이나 좀 주시오.”

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원탁 위에 올려져 있던 물 주전자를 들어 잔에 채운 후 조르주에게 건넸다.

조르주는 고개를 숙이며 고마움을 표한 후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크우. 좀 살 것 같구만.”

조르주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잔을 내려놓자 휴고가 그의 잔을 다시 물로 채워주며 말했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말도 마시오. 포르트지앵부터 여기까지 딱 이틀만에 도착했으니까. 어후…….”

휴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틀만에 말입니까?”

“그렇소. 로이 선견자님의 능력이 대단한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소.”

“허어…… 이틀만에 남쪽에서 북쪽까지라…….”

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조르주는 물을 한 모금 더 마신 후 천천히 운을 뗐다.

“그래, 내 총독 각하께 듣기로는 이곳에서 황금 갑옷이 난동을 피웠다고 들었는데 말이오?”

“그렇습니다.”

휴고는 조르주에게 6월 2일 아침에 황금 갑옷이 시장 의류 점포 거리에서 저지른 폭력에 대해 상세하게 이야기해주었다.

그간 그가 조사한 것도 있었던 만큼, 정보의 양은 제법 많았다.

“현재까지 황금 갑옷에 대해 특정한 것은 담갈색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지닌 잘생긴 청년이라는 점과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조그만 체구의 노예 소녀와 함께 붉은 말을 타고 다닌다는 것 뿐입니다.”

“담갈색이라…… 제국이나 자치령 쪽 사람 중에는 흔치 않고…… 게마인샤프트나 벨로디나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색이지.”

“그렇습니까?”

역시 헛늙은게 아니야.

휴고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기 잔에 따른 커피를 한 모금 넘겼다.

“일단 오늘은 너무 늦기도 했고, 또 여러모로 사정이 여의치가 않은 것 같으니 내일 아침 일찍 조사를 시작하는 게 어떻겠소?”

커피를 마시는 휴고를 향해 조르주는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늦은 밤에 괜히 돌아다니다 또 무슨 봉변을 당할 지도 모르고…….”

그 짧은 대화의 순간, 조르주와 휴고는 서로가 지닌 공통적인 면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저 인간.’

‘저 늙은이.’

‘엄청 게으르구만.’

‘되게 게으르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좋소. 그렇게 하는 게 좋겠소.”

“네, 그렇게 합시다, 그럼.”

그렇게 두 게으른 전도자들은 동류를 만난 기쁨을 가볍게 만끽하며 각각 물과 커피를 넘겼다.

* * *

“끄으으…….”

머리가 깨질 것 같은 통증이 아딘의 의식을 깨웠다.

“이제야 눈을 뜬 건가?”

느끼함이 소리의 형태로 존재한다면 이런 것일까?

아딘은 갑작스럽게 속이 메스껍다는 느낌을 받으며 천천히 눈을 떴다.

‘여, 여긴…….’

사방이 벽돌로 가로막힌 공간.

빛이라곤 오로지 벽에 걸린 9개의 횃불 뿐.

‘감옥?’

순간 아딘은 허벅지와 등이 욱신거리는 환상통을 느꼈다.

벨로디나 왕국 수도 콘스탄티노바 왕궁 지하 감옥에서 유리 콘스탄틴의 주도하에 당한 고문이 또 떠올랐다.

환상통에 아딘이 고개를 떨군 채 인상을 찌푸리고 있을 때, 누군가가 다가와 기다란 나무막대기로 아딘의 턱을 들어 올렸다.

덕분에 아딘은 본의아니게 느끼한 목소리의 존재를 볼 수 있었다.

“어쩐지 꿈자리가 좋았었는데, 이렇게 월척을 낚게 됐어.”

발자크가 미소를 지으며 아딘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제는 그의 복장이었다.

‘썅!’

간신히 신체 주요 부위만 가죽옷으로 가린, 사실상의 노출 상태로 발자크는 아딘 앞에 서 있었다.

그의 가슴에 수북이 난 털과 핏줄인지 힘줄인지 모를 것이 불끈거리는 팔뚝을 바라보며 아딘은 속으로 온갖 쌍욕을 해댔다.

“그대는 아마도 오면서 내 영지에서 어린 아이들이 돌아다니는 광경을 보질 못했을 거야.”

발자크의 말을 귓등으로 들으며 아딘은 주변을 살폈다.

그의 옷과 마법 주머니가 구석에 자리한 바구니에 담겨 있었다.

“그거 왜 그런지 아나?”

발자크가 나무 막대기로 아딘의 시선을 자신에게 고정했다.

“잘생긴 남자애는 이렇게 여기서 나를 위해 힘쓰다 죽고, 예쁜 여자애는 내 아들을 위해 힘쓰다 죽거든.”

발자크가 씩 미소를 지었다.

“나는 조금 독특한 취향을 가지고 있어. 아주 많이 독특하지. 그래서 나와 결혼했던 부인도, 사제들도 다 나의 취향을 이해하질 못했지.”

발자크의 나무막대기가 아딘의 턱과 목젓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단순히 남색을 즐기는 사람은 삼류에 불과하고, 단순히 가학 행위를 즐기는 사람은 이류에 불과하지.”

발자크가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나처럼 남색과 가학 행위를 동시에 즐기는 사람은 일류지.”

그런 발자크를 노려보며 아딘이 물었다.

“로제는 어디있지?”

“로제?”

“내 여동생 말이야!”

아딘의 고함소리에 발자크는 움찔하기는커녕 황홀경에 빠진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 네 여동생?”

발자크가 씩 웃었다.

“부전자전이란 말을 들어 봤나?”

“……”

“내 아들도 나랑 비슷해. 아주 비슷한 취향을 가지고 있지. 다만 차이가 있다면…… 내가 일류인 것과는 다르게 내 아들은 고작해야 이류에 불과하다는 거야.”

“……”

“지금쯤 네 여동생은 내 아들의 방에서 채찍으로 기쁨을……”

그 순간, 섬광이 번쩍였다.

섬광 이후로는 찬란한 황금빛이 감옥 전체를 휘감았다.

“크윽……”

발자크는 눈이 멀 것만 같은 통증에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감고 양팔로 얼굴을 가렸다.

잠시 후, 빛이 잠잠해졌을 때 벽에 달린 수갑이 끊어지는 소리가 먼저 발자크의 귀를 때렸다.

그리고 발자크가 눈을 떴을 때, 그가 본 것은 자신의 얼굴로 날아오는 황금 주먹이었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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