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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17화 (17/175)

017 쫓기는 자들의 동행 (2)

김현수는 영웅일대기에서 로제에 관해 어린 시절 굶주림과 학대로 육체적, 정신적 상처를 크게 입었다고 서술했다.

그리고 그 서술은 곧 16세 생일을 맞이함에도 마치 어린애처럼 조그만 체구와 그 좁디좁은 등판에 가득한 채찍 흉터로 구체적 현실이 됐다.

당연히 그러한 흉터가 만들어지는 동안, 제대로 된 식사조차 못 챙겨 먹으며 학대당한 지난 세월 동안 마음속 깊숙한 곳에 켜켜이 쌓인 응어리와 분노가 엄청날 터였다.

그리고 그러한 부정적 감정은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집단에 대한 지나친 공포와 더불어 그 집단의 죽음을 향한 기쁨과 비웃음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과연 넉 달도 안 되는 기간 안에 이 아이의 성격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말을 타고 도적들의 시체 위를 넘어가며 아딘은 생각했다.

‘일단 최대한 따뜻하게 대해줘야지. 결국, 사람의 비뚤어진 성격이란 건 정서적 공허에서 오는 거니까.’

김현수는 대학생 시절 가난한 동네 아이들을 위한 공부방에서 봉사활동을 한 적이 있었다.

김현수 본인도 그다지 부유한 형편은 아니었지만, 그 동네 아이들은 그런 김현수마저 풍요로운 삶을 사는 것으로 보일 정도로 빈곤에 시달리고 있었다.

빈곤은 자연스럽게 아이들의 성격을 뒤틀어놓았고, 김현수는 그런 아이들을 가르치며 온갖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어야만 했다.

그런 과정을 통해 김현수는 뒤틀린 심성을 지닌 아이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정서적 공허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정서적 공허는 가볍게는 부모의 방임부터 무겁게는 부모의 학대까지, 가정에서의 애정과 관심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로제는 그 아이들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지.’

하지만 그 아이들 가운데 가장 심하게 학대당하던 경우조차도 로제 앞에선 가벼운 훈육이라 볼 수 있을 정도였다.

12세부터 현재까지, 근 4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그녀가 아테인 가문에서 당한 학대는 학대라는 단어조차도 뭔가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대한 것이었다.

그녀의 심성의 뒤틀림이 심각한 수준인 건 당연했다.

‘일단 최대한 따뜻하게 다해주는 거야. 마음의 상처가 넉 달 만에 치유되긴 힘들겠지만, 최소한 바로 마녀로 각성해 버리지는 않도록, 자신의 힘을 올바른 일을 위해 쓰는 그런 사람이 되도록 최대한 유도를 해 봐야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아딘은 가만히 자기 허리를 감싸고 있는 로제의 손을 한 손으로 덮어 주었다.

로제는 잠시 움찔하더니 이내 편안하게 아딘의 등에 얼굴을 파묻은 채 눈을 감았다.

그렇게 두 사람을 태운 말은 머리가 터지고 광대가 함몰된 채 죽은 도적들의 시체를 지나 동북쪽으로 향했다.

* * *

원탁 가운데 놓인 촛대와 그 위에서 불타는 2개의 촛불만이 빛의 전부인 밤.

샤를은 촛불 아래에서 가만히 포도주를 마시며 포르트지앵의 분기별 세무 회계 장부를 보고 있었다.

슈드아퐁에서 내려온 목적 자체야 황금 갑옷에 대한 조사 차원이었지만, 어쨌건 슈드 자치령의 총독으로서 공적으로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한창 그가 장부를 검토하고 있을 때, 돌연 그림자 속에서 두 사람이 튀어나왔다.

한 사람은 샤를의 참모 로이였고, 다른 한 사람은 플루슈드 시장 조르주였다.

두 사람이 나타나자 샤를은 장부에서 시선을 떼고 그들을 바라봤다.

로이는 고개를 한 차례 숙인 후 샤를의 뒤편 2m로 가 자리했고, 조르주는 그대로 한쪽 무릎을 꿇은 채 허리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비천한 종복이 장로이시자 총독이시며 황태자이신 존귀한 분을 뵈옵니다.”

조르주의 인사에 샤를은 미소로 화답하며 입을 열었다.

“그래, 건강은 좀 어떻나?”

“염려 덕분에 이제는 시정에 복귀할 수 있게 됐사옵니다.”

“다행이군.”

직후 샤를은 입은 다문 채 포도주를 쭉 넘겼다.

빈 잔을 원탁 가장자리에 두자 배후에 있던 로이가 다가와 포도주병을 들고서 잔을 채워주었다.

샤를은 다시 꽉 잔 찬을 든 채 가만히 향을 맡을 뿐, 가타부타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 시간이 제법 길었지만, 조르주는 감히 먼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늙은 몸으로 오랫동안 한쪽 무릎을 꿇고 있자니 관절이 욱신거리고 다리가 저리기까지 했지만, 별수 없었다.

그렇게 샤를은 꽉 찬 포도주를 한 모금, 한 모금 천천히 마신 후 다시 빈 잔을 로이가 채워줄 때 비로소 입을 열었다.

“신도 르네 드 페렛이 죽었다.”

“송구하옵니다.”

“자네가 송구할 건 없지. 듣자 하니 자네는 내 보고를 기다리라며 만류했다면서?”

“종복은 전통과 규범을 따라 행할 뿐이옵니다.”

“그래. 자네는 자네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야. 페레는 그런 절차를 무시하다 변을 당한 거고.”

샤를은 포도주를 한 모금 넘긴 후 말을 이었다.

“파세레빌에서 황금 갑옷이 또 출몰헀어.”

그 말에 조르주는 움찔했다.

“아테인 남작의 차남과 파세레빌 시장의 장남을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팬 후 달아났다는군.”

조르주는 침을 꿀꺽 삼켰다.

오래전, 현 황제이자 종단 교주인 프랑수아 14세 밑에서 험하게 구르고 또 구르던 시절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지나갔다.

“파세레빌 전도자 휴고 드 로이에르에게 조사 전권을 맡겼어. 하지만 그 인간이나 그 인간 휘하 신도가 가진 능력만으로는 조사에 한계가 분명하지.”

거기까지 들은 조르주는 눈을 질끈 감았다.

“로이를 빌려줄 테니, 함께 파세레빌로 가서 로이에르를 돕도록.”

샤를의 말에 그의 로이가 조르주의 곁으로 향했다.

“명을 받들겠나이다.”

조르주는 체념하는 마음으로 기계적인 경어를 내뱉곤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로이는 곧 조르주의 어깨에 손을 얹은 후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두 사람이 사라진 모습을 보며 피식 웃은 샤를은 포도주를 입에 머금은 후 눈을 감고 그것을 음미했다.

* * *

샤펠 제국에서 가장 번영한 곳은 수도 아퐁을 중심으로 한 서부 해안가였다.

농경에도 적합했고, 슈드 자치령의 개발 이후 파세레빌을 거점으로하는 교역로가 형성되며 상업적 발전도 이루었다.

그다음으로 번영한 곳은 목축업과 광업이 발달한 북부였다.

반면 동부의 경우 번영은커녕 제대로 된 발전조차 없는 곳이었다.

그나마 사보에 지방이 슈드 자치령에서 제니스 공화국으로 가는 영세 상인 덕분에 약간의 상업적 발달이 있었을 뿐, 그 외 지역은 낙후될 대로 낙후된, 그래서 황실에서 구매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가난한 시골 지역이었다.

10층 높이의 민간 상업 건축물이 존재하는 슈드 자치령의 대도시와는 사뭇 다른, 통나무로 된 농노의 초가집과 판잣집이 드문드문 존재하는 동북부 지방의 어느 조그만 영지를 아딘과 로제가 말 한 필에 의지에 지나고 있었다.

사보에 지방의 어느 산길에서 도적 패거리 절반을 쳐죽인 후 이틀간, 두 사람은 딱히 앞길을 가로막는 무언가를 만나지는 않았다.

애초에 사보에 지방 정도를 제외하면 도적이 생겨나 털어먹을 것조차 없는 곳이었던 만큼,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로제, 배고프지?”

“괜찮습니다, 스미스 씨.”

“배고프면 배고프다고 해도 돼.”

“…… 배고픕니다.”

“그래. 그럼 어디 밥을 먹을 만한 곳이……”

아딘은 주위를 둘러봤다. 하지만 그는 마땅한 곳을 찾을 수 없었다.

그가 지나고 있는, 제대로 정비조차 되지 않은 길 좌우로는 허름한 판잣집과 통나무 초가집 정도가 동쪽의 고블린산맥 아래로 음습한 기운을 내뿜고 있을 뿐이었다.

여관은커녕, 민박할 장소조차 없었다.

‘벌써 닷새째 노숙인데…….’

파세레빌에서 도망친 후 아딘과 로제는 닷새 동안 빠르게 샤펠 제국 동북지방을 뚫고 엘프숲으로 향하고 있었다.

도망자 입장이니만큼 어쩔 수 없이 강행군을 이어가고 또 노숙을 할 수밖엔 없었다.

로제는 결코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지만, 아딘은 모닥불 곁에서 잠이 들기 전 그녀가 꼬리뼈를 문지르며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계속 봐야만 했다.

‘엘프숲 외곽으로 들어서면 게마인샤프트로 들어갈 때까지 노숙의 연속이야. 중간중간 버려진 민가에서 잠을 청한다고 하더라도, 어쨌건 강행군이 이어지는 건 어쩔 수 없지.’

아딘은 가만히 자기 허리를 감싼 로제의 손을 잡아주었다.

‘어떻게 엘프숲에 진입하기 이전만이라도 당분간은 노숙을 피하고 싶은데…….’

그렇게 아딘이 한참을 주변을 두리번거릴 때였다.

‘응?’

아딘은, 저 멀리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말 한 필을 볼 수 있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적절한 속도로 아딘을 향해 다가오는 백마 위에는 수염을 기른 건장한 중년 남성이 앉아 있었다.

길가에서 느릿느릿, 농기구를 어깨에 진 채 걷던, 누더기에 가까운 옷을 입은 농노들은 백마가 자신의 곁을 지나가자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바닥에 처박았다.

농노들의 행동과 중년인의, 동부 지방치고는 세련된 복장을 통해 아딘은 그의 정체를 유추할 수 있었다.

‘영주인가?’

잠시 후, 중년인이 탄 백마는 아딘과 로제의 붉은 말 앞에서 멈춰섰다.

동쪽 고블린산맥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아딘의 담갈색 머리카락을 서쪽으로 흔들거리게 했다.

아딘은 살짝 턱을 숙인 채 담갈색 눈으로 백마 탄 중년인을 바라봤다.

백마 탄 중년인은 아딘을 보며 묘한 미소를 짓더니 입을 열었다.

“나는 이곳 아믈리에의 영주 발자크 드 아믈리에 남작이오.”

“…… 존 스미스라고 합니다.”

“호오. 스미스. 제니스 공화국 사람인가 보오?”

“그렇습니다. 여행자입니다.”

중년인, 아믈리에 남작 발자크의 시선이 아딘의 허리를 감싼 채 그의 등 뒤에서 고개만 빼꼼 내밀고 있는 로제에게로 향했다.

로제는 발자크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아딘의 등 뒤로 얼굴을 감췄다.

그 모습을 보고 발자크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따님이오?”

“아…… 이 아이는…….”

순간 아딘은 망설였다.

타인에게 로제를 무어라 소개해야 하는지를 미처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은 까닭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아딘은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동생입니다.”

아딘은 등 뒤에서 로제가 움찔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허허허. 동생분과 함께 여행 중이셨던 모양이오. 그래, 여행은 즐겁게 하고 있소?”

“그럭저럭 괜찮게 하고 있습니다.”

“허허. 헌데 모습을 보아하니 마냥 편안한 여행은 아닌 것 같소만?”

발자크의 말에 아딘은 쓴웃음을 지었다.

닷새 째 노숙을 한 만큼, 그리고 꽤나 강행군을 이어온 만큼 아딘과 로제의 몰골은, 영지의 농노들보단 나았지만, 초라했다.

아딘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하질 않자 발자크가 은근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괜찮다면 내 성으로 초대를 하고 싶은데. 어떻겠소? 여행도 좋지만, 마냥 노숙만 하는 여행은 여행이 아닌 고행이라고 난 생각하오만.”

발자크의 말에 아딘은 잠시 고민했다.

‘시골 영주의 선의에 기반한 호의일까? 아니면 무언가 대가를 바라는 걸까?’

마음 같아서는 두루마리를 꺼내 발자크에 관한 정보를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당장 그가 빤히 쳐다보는 데 그런 의심스러운 행동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 뭐, 여차하면 불칸의 갑옷이 있으니까. 로제만 잘 챙기면 별 문제는 없겠지?’

하지만 닷새 동안 이어진 노숙은 아딘의 판단력을 최대한 육체적 편의를 위한 방향으로 이끌었다.

“영주님께서 이토록 호의를 베푸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딘의 말에 발자크는 활짝 웃어보였다.

“따라오시오. 어차피 할 일이 없어 말을 타고 영지를 한 바퀴 돌고 있던 참인데, 같이 들어가면 되겠소이다.”

발자크의 말에 아딘은 그에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떠날 때 값을 제대로 치르겠습니다.”

“하하하. 값이라니, 그럴 필요는 없소. 이런 말 하면 어떻게 들릴진 모르겠지만, 제니스 공화국과는 달리 우리 샤펠 제국은 그렇게 계산적이게 살지는 않소. 하하하.”

그렇게 아딘과 발자크는 말머리를 나란히 한 채 천천히 북쪽, 발자크가 소유한 아담한 규모의 성채로 이동했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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