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 쫓기는 자들의 동행 (1)
포르트지앵.
슈드 자치령 남부에서 가장 거대한 도시.
제니스 공화국으로 오가는 배들의 정박지이자 플루슈드에서 거래된 약초들이 선적되는 곳.
그런 만큼 포르트지앵의 번영은 소도시 마르탱에 비할 바가 아니었고, 갈색마을과는 더더욱 비교가 불가할 정도였다.
그랬기에 슈드 자치령 총독이자 샤펠 제국 황태자인 샤를 드 퐁피두의 행렬이 포르트지앵에 도착했을 때, 그들을 모두 수용할 거대한 숙소를 시장이 마련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흐음…….”
자신을 위해 제공된, 가장 넓고 또 가장 호화로운 방에서, 샤를은 가만히 서신을 읽고 있었다.
파세레빌에 파견한 징세관 휴고가 보낸, 정중하지만 다급함이 느껴지는, 파세레빌에 나타난 황금 갑옷에 관한 보고서를 읽으며 한동안 샤를은 말없이 무심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사흘간 쉬지 않고 날아 보고서 배달에 성공한 휴고의 비서 필리프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6월 2일 아침에 휴고가 건넨 서신을 받아들고 독수리로 변해 남쪽으로 출발했다.
하루 동안 쉬지 않고 날아간 덕분에 다음날인 3일 새벽에 자치령의 수도 슈드아퐁에 도착할 수 있었지만, 그곳에서 그는 샤를이 남쪽 갈색마을로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다.
그래서 또 그는 종일 쉬지 않고 날아가 갈색마을에 도착했지만, 그곳에서도 그는 샤를이 다시 남쪽으로 떠나가 포르트지앵에 가 있을 거란 말을 들었다.
또다시 필리프는 독수리가 돼 허공을 갈랐고, 마침내 6월 5일 새벽, 포르트지앵에 도착했다.
다행히도 샤를은 그곳에서 며칠 휴식을 취하고자 머무르는 중이었고 이렇게 휴고의 서신은 6월 5일 오전에 안전하게 샤를에게 배달됐다.
“파세레빌이라…….”
샤를이 서신을 내려놓고 필리프를 바라보았다.
“플루슈드와 노드플루슈드의 길가에서 처음 등장했던 것이 불과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파세레빌에 나타났다라…… 허. 참 빠르게도 움직였군.”
그는 굳은 표정으로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모습에 필리프는 숨소리조차 쉬이 내지 못했다.
한동안 그렇게 고민하던 샤를은 곧장 종이를 꺼내 깃펜에다 잉크를 찍은 후 빠르게 무언가를 써 내려갔다.
종이 하단에 자신의 인장마저 찍은 뒤 샤를은 그것을 돌돌 접어 묶고는 로이에게 건넸다.
로이는 그것을 공손히 양손으로 받아든 후 필리프에게 가져다 주었다.
필리프가 서신을 받아든 것을 본 샤를이 입을 열었다.
“징세관에게 황금 갑옷 조사에 관한 전권을 주겠다. 일주일 후에 내가 파세레빌로 갈 테니, 그 사이에 황금 갑옷에 대한 모든 것을 조사해놓도록 하라.”
“네, 각하. 반드시 그리 전하겠사옵니다!”
샤를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휘휘 저었다.
필리프는 샤를을 향해 배를 접어 인사한 후 뒷걸음질로 그의 방에서 빠져나갔다.
‘젠장…….’
쉬지도 못하고 또 파세레빌까지 날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필리프는 방을 나서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묵시록 종단에 들어와 얻게 된 능력이 변신술, 그것도 조류로의 변신술인 만큼 어찌 보면 이것은 그의 숙명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렇게 필리프가 다시 독수리가 돼 북쪽으로 날아가고 있을 때, 방 안에선 샤를이 차갑게 웃으며 로이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재미있지 않나? 종단에서 가장 게으르고 인생을 날로 먹으려 하는 것들 앞에 황급 갑옷이 나타나는 게 말이야.”
“그 또한 그들에게 주어진 운명이라 생각합니다.”
“운명이라. 훗. 그렇지. 운명이겠지.”
샤를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동쪽으로 난 창밖으로 북적이는 항구와 어시장 그리고 드넓은 바다가 보였다.
“그러면 말이야. 곧 제국의 황제이자, 종단의 교주가 될 나의 앞에 황금 갑옷이 나타난 건 무슨 운명일까?”
그것은 답변을 바라고 내놓은 질문이 아니었다.
“밤이 되면 좀 빨리 움직여야겠어.”
샤를이 뒤로 돌아 로이를 바라봤다.
항상 그와 2m 거리를 두고 있는 로이의 정수리를 바라보며 샤를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플루슈드로 가서 조르주를 좀 데려와 줬으면 좋겠어. 여기서 플루슈드 정도면 갈 만하지?”
샤를의 말에 로이는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명령을 받들겠사옵니다. 해가 떨어지는 즉시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하라고.”
샤를은 다시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다가오는 미래를, 황금빛으로 찬란히 빛나는 자신의 운명을 그리며 그는 입이 찢어져라 웃고 또 웃었다.
* * *
슈드 자치령은 슈드아퐁의 총독부가 중심이 돼 각 도시의 자치 행정을 총괄하는, 느슨한 형태의 중앙집권적 체제를 갖추고 있다.
이것은 슈드 자치령이 애초부터 샤펠 제국 황제에 의해 계획적으로 조성된 곳이기에, 그리고 슈드 자치령에 속한 각 도시의 개척자들이 소수 유력자가 아닌 다수 시민 원로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반면 역사가 492년이나 된 샤펠 제국의 경우 어느 정도 황제에 의한 중앙집권적 통치가 이루어지고는 있다지만 여전히 봉건적 체제가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300년 전, 샤펠 제국 8대 황제 조르주 3세가 슈드 자치령을 만들고 총독으로 황태자를 임명한 것은 중앙집권을 위한 자금 마련이 그 이유였지.’
분명 김현수는 그렇게 설정했다.
그리고 그 설정 그대로, 근 300년 동안 슈드 자치령의 총독이 황제가 되고, 그 황제가 슈드 자치령에서 번 돈으로 때로는 정당한 거래를 통해, 때로는 음흉한 계략을 통해 봉건 귀족의 영지를 황실 소유로 만들었다.
덕분에 샤펠 제국은, 건국 492년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노쇠하긴커녕 오히려 더 부강해졌다.
‘고려나 조선이 450년 좀 넘으니 비실비실해지다 망한 거랑 대조적이긴 하네.’
김현수가 살던 현실에서, 500년에 가까운 역사를 지닌 국가는 필연적으로 망조가 들었다.
고려와 조선이 그러했다.
하지만 아딘이 사는 현실에서, 김현수가 만든 영웅일대기의 세계에서, 곧 500세가 되는 샤펠 제국은 여전히 강했다.
이는 전적으로 근 300년 동안 황제의 권력이 강해짐에 따라 황제 직속 상비군의 규모가 커진 결과였다.
‘그리고 사보에 같은 쓰레기 땅은 쳐다도 안 본 결과였고.’
아딘은 쓴웃음을 지으며 눈앞에 나타난 도적 패거리를 바라봤다.
굶주린 농민이나 도망친 농노 혹은 노예로 구성된, 그런 허접한 수준의 도적들이 아니었다.
주기적으로 단련한 단단한 몸매에 철퇴와 곤봉, 톱날 검 등으로 무장한, 전문적인 도적 패거리였다.
‘사보에 같이 별다른 먹거리도 없는 곳에 도적 패거리가 들끓는 이유는 간단하지.’
포르트지앵에서 선박 수송을 통해 제니스 공화국으로 가는 해상 루트는 제법 가격이 비쌌다.
선박을 독점 운용하는 제니스 공화국 콘테 상단이 이용료를 비싸게 부르기 때문이었다.
물론 거기에도 이유는 있었다.
선박 독점 운용을 위해 제니스 공화국 정부와 슈드 자치령 총독부에 콘테 상단이 매해 건네는 뇌물의 액수와 사보에 해협에서 선박을 위협하는 해적을 퇴치하기 위해 고용하는 용병의 비용이 만만찮았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사정으로 인해 영세한 상인들은 선박을 이용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자연히 그들은 육로를 이용했고, 그중 최단 루트인 샤펠 제국 사보에 지방이 영세 상인들이 제일 많이 이용하는 땅이었다.
영세 상인은 곧 척박한 사보에 지방에서 유일하게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존재였다.
사보에 지방을 다스리는 살로이 백작가는 일찍이 영세 상인을 통해 수익을 창출하는 방법을 찾았다.
드넓은 사보에 지방에서 몇 안 되는 마을과 촌락을 대대적으로 개조해 전체가 숙박 시설이 될 수 있게 한 것이었다.
물론 그래 봐야 영세한 상인이 주 고객이었던 만큼, 큰 수익이 창출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최소한 살로이 백작가의 식솔들이 귀족다운 생활을 할 정도의 수익은 만들어졌다.
그리고 살로이 백작가는 자신들의 귀족적 생활을 위한 것에만 신경을 쓴 나머지 영세 상인을 노린 전문 도적 패거리가 들끓는 상황을 방임했다.
“후우…….”
아딘은 도적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잔뜩 겁에 질린 채 그의 허리를 꼭 껴안고 바들바들 떠는 로제의 손을 한 차례 잡아 준 후 말에서 내렸다.
“잠시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네, 네. 스, 스미스 씨…….”
홀로 말에 남겨진 로제는 아딘 대신 말의 목을 꼭 끌어안으며 바들바들 떨었다.
아딘은 천천히 도적 패거리에게 다가갔다.
그런 아딘을 바라보며 도적들은 자기들끼리 무어라 지껄이며 낄낄거렸다.
로브를 쓰지 않은 만큼, 태양 아래 드러난 아딘의 잘생긴 외모에, 그를 별 볼 일 없는 허접한 존재로 인지한 까닭이었다.
“어이, 허여멀건 놈.”
도적 중 한 사람이 아딘을 곤봉 끝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뒤지기 싫으면 저 말이랑 여자애만 남겨두고 얼른 뛰어가. 살려는 드릴게.”
그의 말에 20명에 달하는 도적들이 모두 낄낄거리며 웃었다.
게 중 일부는 말 위에 앉아 말의 목을 꼭 끌어안은 채 오들오들 떨고 있는 로제를 음탕한 눈으로 바라보며 입맛을 다시기도 했다.
그 모습에 아딘은 목구멍으로 올라오려는 뜨거운 열기 같은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길게 콧김을 내뿜은 후 마음을 가라앉혔다.
아딘은 천천히 눈으로 도적들의 숫자를 헤아렸다.
그에게 조롱하는 말을 날린, 곤봉을 든 놈을 포함해 합이 22명의 도적이 눈앞에 있었다.
‘이 자식들 중 하나라도 로제에게 손을 데게 해서는 곤란하니까, 최대한 빨리 끝내야겠어.’
의지는 곧 실행으로 옮겨졌다.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벨트가 튀어나왔고, 벨트로부터 찬란한 황금빛이 흘러나와 아딘의 몸을 감쌌다.
도적들이 눈을 감고 팔로 얼굴을 가린 사이, 아딘은 순식간에 불칸의 갑옷으로 무장했다.
[타탓-!]
그대로 아딘은 도적들 틈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쿵-!]
곤봉을 들고 조롱하던 도적을 향해 아딘은 몸통박치기를 시전했다.
“커헉-!”
도적은 피를 토하며 뒤로 날아가 바닥에 몇 차례 뒹굴고는 그대로 목이 꺾인 채 죽었다.
놈이 날아가며 놓친 곤봉을 쥔 아딘은 곧장 그것을 휘둘러 도적들을 때려잡기 시작했다.
[빠악-! 빠악-! 빠악-!]
손잡이부터 전체가 쇠로 만들어진 것이었던 만큼, 그리고 그것을 휘두르는 갑옷 입은 아딘의 근력이 상상을 초월하는 만큼 한방 한방이 필살기였다.
순식간에 10명의 도적이 머리가 깨지거나 광대가 함몰된 채 죽어버렸다.
“으아아악-!”
숨 몇 차례 쉴 동안 순식간에 11명의 동료가 죽어버리자 나머지 11명의 도적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전문적으로 훈련을 한 만큼 무기를 버린다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달아나면서 서로 발이 엉켜 자빠지거나 하는 추태를 보이기는 했다.
그런 그들을 아딘은 뒤쫓지 않았다.
그는 곤봉을 땅바닥에 집어 던졌다.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순식간에 갑옷은 해체됐고 벨트는 스르륵 그의 복부 속으로 빨려들 듯 사라졌다.
아딘은 도적들의 시체를 발로 툭툭 밀어내며 쓸만한 무기가 없는지를 찾아보았다.
하지만 조금 전 사용한 곤봉만큼의 타격감을 주는 무기는 없었다.
아딘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시 말을 향해 다가갔다.
“끝났어, 로제.”
아딘의 말에 로제가 살며시 고개를 들며 눈을 떴다.
그녀는 바닥에 누운 11구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바들바들 떨며 굳어 있던 그녀의 표정이 환해졌다.
“수고하셨습니다, 스미스 씨. 저번에도 봤지만, 황금 갑옷은 정말 강한 것 같습니다.”
시체를 보며 미소를 짓는 로제의 모습에 약간 섬뜩함을 느끼며 아딘은 어색하게 웃었다.
로제가 살짝 뒤로 이동하자 아딘은 말에 올라탔다.
“항상 감사합니다, 스미스 씨.”
자신의 허리를 꼭 껴안은 채 밝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원래대로라면 약 4개월 후 피의 마녀로 각성했을 로제에게 아딘은 대답했다.
“별 말씀을 허허.”
그러면서도 아딘은 속으로 고민했다.
과연 이 아이를 마녀가 아닌 일반적인 마법사로 만들 수 있을까?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