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15화 (15/175)

015 각성 직전의 마녀 (4)

파세레빌의 공식적인 대표자는 시의 유지들이 선출해 총독이 임명을 최종 승인한 시장이다.

그리고 스틸레 요새의 아테인 남작은 공식적으로 파세레빌에 관한 그 어떠한 직책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가 이끄는 요새의 군대가 치안을 총괄하는 만큼 제법 영향을 끼치고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아무리 시의 공식적 대표자이고 또 군대로 영향력을 행사한다 하더라도, 실질적으로 파세레빌에 대한 최고 결정권을 지닌 사람은 총독이 직접 파견한 징세관이다.

“으음-!”

그리고 지금, 파세레빌 징세관 휴고 드 로이에르는 이른 아침부터 진한 커피를 음미하며 일과 직전의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징세관님! 징세관님!”

드넓은 바다가 보이는 그의 집무실로 징세관 비서, 필리프가 다급하게 들어온 것은, 휴고가 커피를 거의 다 마셨을 때쯤이었다.

“징세관님! 큰일 났습니다!”

육중한 몸으로 마치 구르듯이 달려온 필리프의 말에도 휴고는 느긋함을 잃지 않았다.

“워워워, 진정하라구. 아침부터 그렇게 소란을 떨면 온종일 요란법석을 떨게 되니깐 말이야. 커피나 한잔하는 게 어때? 게마인샤프트 상인들에게 받은 선물인데 향이 아주 좋아.”

그렇게 말하며 휴고는 새 잔에다 커피를 따로 따랐다.

“지금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징세관님.”

“어허. 커피 한잔 마시고 이야기하래두.”

휴고의 말에 필리프는 갑갑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그는 휴고가 건네준 커피잔을 들고 그대로 한 방에 잔을 비웠다.

“크허억-!”

목과 입을 잡으며 고통을 호소하는 필리프의 모습에 휴고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혀를 찼다.

“쯧쯧. 뜨거운 걸 그렇게 무식하게 한 번에 넘기다니…… 이래서야 원, 세심한 징세 업무 보좌나 제대로 하겠어?”

그렇게 이야기하면서도 휴고는 시원한 물을 필리프의 잔에 따라 주었다.

“감사…… 합니다……”

찬물로 통증을 가라앉힌 필리프는 잠시 숨을 몰아쉰 후 다시 다급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큰일입니다.”

“무슨 일인데?”

“아테인 남작의 둘째 아들이랑 시장의 장남이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맞고 지금 의식 불명입니다.”

“또 어디서 누구한테 시비 걸었나 봐? 뭐, 그 두 머저리들은 언젠간 그렇게 될 거라 다들 생각은 했었잖아? 그게 무슨 큰일이라고…….”

“그 둘을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팬 놈이 황금 갑옷입니다.”

황금 갑옷이란 말에 휴고의 표정이 변했다.

여유로 가득하던 그의 얼굴에서 긴장과 당혹감이 지배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뭐?! 황금 갑옷? 자세히 말해봐.”

“제가 아침에 속옷을 사려고 시장에 나갔는데 말입니다.”

필리프는 차분히 자신이 본 바를 휴고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의류 상점 거리에서 보게 된, 황금 갑옷을 입은 남자가 아테인 남작의 경기병 두 사람을 묵사발을 낸 것.

말을 타고 도망치려던 자크와 올랑드를 끌어 내려다가 얼굴 생김새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지근지근 밟아버려 앞니를 다 망가뜨리고 코를 주저앉게 해버렸으며 광대가 부풀어 오르게 한 것.

그리고 같이 있던 조그만 흑발 소녀와 함께 경기병의 붉은 말을 타고 파세레빌을 도망친 것까지.

“그래서, 어디로 도망쳤는데?”

“북쪽으로 가는 것만 확인했습니다.”

“야 인마, 그 이상을 확인해야 할 것 아니야!”

“어떻게 확인합니까? 그땐 저 혼자서 사적으로 그냥 간 거였는데.”

“인마! 말을 타고서라도 쫓아갔어야지!”

“어후…… 저 혼자 쫓아갔다간 죽었을 겁니다.”

필리프의 말에 휴고는 갑갑한 듯 가슴을 치더니 자기 잔에 커피를 따른 후 그걸 홀라당 목구멍으로 넘겨 버렸다.

“크하악-!”

그가 고통을 호소하자 이번엔 필리프가 혀를 차며 물 주전자를 들어 휴고의 잔을 채워주었다.

“물 주전자를 놔두고 커피 주전자를 가져다 부어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필리프가 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켠 후 휴고는 몇 차례 더 가슴을 친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이, 일단 서신을 써야겠어. 장로님께.”

휴고의 말에 필리프는 곧장 종이와 깃펜, 잉크를 가져다 책상에 올려놓았다.

휴고는 곧장 깃펜에 잉크를 찍어 빠르게 서신을 쓰기 시작했다.

<경애하는 종단의 장로이며 위대한 자치령의 총독이시며 장차 제국을 영도할 황태자이신 샤를 드 퐁피두 각하께 전도자요 파세레빌 징세관인 신 휴고 드 로이에르가 문안합니다.>

최대한 격식을 갖추면서도 필요한 내용을 요약하여 적은 후 휴고는 서신 말미에 자신의 인장을 찍었다.

잠시 바람에 잉크와 인장을 말린 후 휴고는 그것을 돌돌 말아 끈으로 묶은 후 필리프에게 건네주었다.

“당장 슈드아퐁으로 보내. 내일 아침까지는 이 서신이 선견자 총독 각하께 도달해야 해.”

“맡겨만 주십시오.”

필리프는 서신을 받아 품에 넣은 후 창가로 향했다.

[펑-!]

한 차례 조그만 폭음과 함께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연기가 걷힐 때쯤, 휴고는 커다랗고 뚱뚱한 독수리 한 마리가 창밖에서 허공을 맴돌다 남쪽으로 날아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황금 갑옷이 나타났다고?’

휴고는 오른쪽 엄지손톱을 앞니로 깨물며 왼쪽 검지와 중지로 책상을 빠르고 리드미컬하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하필 왜 내가 살아 있을 때 나타나고 난리야!’

갑갑한 마음에 휴고는 잔에다 시원한 물을 따른 후 그걸 또 벌컥벌컥 들이켰다.

‘남풍이 대지를 불태우고 석양이 강을 메마르게 하리라…… 젠장…….’

휴고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기 시작했다.

‘쿠만으로 도망가야 하는 거야? 거긴 땅도 없고 강도 없는데…… 아오, 씨.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휴고는 양손으로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긁은 후 그대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렇게 광명력 992년 6월 2일, 휴고의 오전 커피 타임은 우울한 전망 속에 지나가고 있었다.

* * *

[두두두두두-!]

붉은 말 한 마리가 슈드 자치령과 샤펠 제국의 경계가 있는 황무지를 통과하고 있었다.

“하-! 하-! 하-!”

말 위에서 아딘은 미친 듯이 말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의 뒤에선 로제가 그의 허리를 꼭 끌어안은 채 눈을 질끈 감고는 꼬리뼈와 엉덩이에서 느껴지는 통증을 견디고 있었다.

“워-워-워-!”

중천에 뜬 해가 점차 서천으로 질 때까지 쉬지 않고 달리던 아딘은 눈앞에 나타난 조그만 개울가에서 말을 멈추게 했다.

[푸르릉-!]

말은 콧김을 내뿜으며 그 자리에서 멈췄다.

아딘은 천천히 말을 몰아 개울가에 닿게 한 후 말에서 내렸다.

“로제, 내려.”

“네, 주…… 네.”

힘겹게 내리는 로제를 안아 땅에 내려준 후 아딘은 한 차례 말의 갈기를 쓰다듬은 뒤 고삐를 주변에 있던 조그만 나무에 갖다 묶었다.

“괜찮니, 로제?”

아딘의 물음에 꼬리뼈와 엉덩이를 문지르던 로제는 재빨리 두 손을 앞으로 모았다.

“괘, 괜찮습니다.”

“괜찮기는.”

아딘은 고개를 가로젓고 혀를 차며 품에서 상처약을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등까지는 내가 어떻게 발라 주겠는데 꼬리뼈랑 엉덩이는 도저히 못 하겠다. 그건 네가 알아서 해 봐. 아픈 곳을 네가 잘 알 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주…… 네…….”

로제가 상처약을 받아 들고 바지를 벗으려는 모습을 확인한 아딘은 등을 돌려 개울가로 향했다.

그는 개울에 입을 처박고 물을 마시는 말 옆으로 가 무릎을 꿇은 후 함께 머리를 처박고 물을 마셔댔다.

한참을 물을 마시며 오는 길에 목구멍으로 들어가 쌓인 흙먼지를 쓸어내린 아딘은 고개를 들고 로제에게 물었다.

“다 발랐어?”

“네.”

“그럼 바지 입고 와서 물이나 마셔. 너도 목에 어지간히 흙먼지 쌓였을 건데.”

“네, 감사합니다.”

로제는 종종걸음으로 아딘의 옆으로 왔다.

그녀는 두 손으로 공손하게 아딘에게 상처약을 건넨 후 조심스럽게 양손에 물을 담아 조금씩 마셨다.

그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짓던 아딘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말 안장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대충 가죽 부대에 구겨 넣어 온 옷가지들을 꺼낸 아딘은 적당히 로제에게 맞을 법한 바지와 상의를 골라냈다.

“로제!”

“네, 네!”

“이걸로 갈아입어. 그런 옷을 입고 계속 돌아다닐 수는 없잖아.”

“네.”

아딘은 로제에게 옷을 건넨 후 그녀가 갈아입는 동안 등을 돌린 채 오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속 시원하게 밟아준 건 좋았는데…….’

아테인 남작의 차남 자크와 파세레빌 시장의 장남 올랑드가 경기병을 이끌고 아딘을 찾아온 이유는 단순했다.

자신의 자존심을 뭉겐 아딘에게 복수를 함과 동시에 누명을 씌워 노예와 금두꺼비를 동시에 꿀꺽하겠다는 발상.

단순하면서도 유치하고 악랄한 발상에 아딘은 결국 분노가 폭발했다.

현실이 된 소설의 처참한 모습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던 찰나에 아딘 콘스탄틴의 오만한 나르시시즘에서 비롯된 분노에 기름을 끼얹고 불을 붙인 셈이나 다름없는 두 사람의 행동은 아딘으로 하여금 그 어느 때보다도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게끔 만들었다.

불칸의 갑옷으로 무장한 후 경기병 둘을 기절시킨 뒤 말을 타고 도망치던 자크와 올랑드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둘을 끌어내렸다.

바닥에 누워 고통스러워하는 두 사람의 얼굴을 아딘은 무자비하게 밟고 또 밟았다.

소드 마스터의 검기에도 흠집밖엔 나지 않을 만큼 단단한 재질의 전신 갑옷 부츠로 온 힘을 다해 밟은 만큼 자크와 올랑드의 얼굴은 순식간에 걸레처럼 망가지고 말았다.

한참 두 사람을 구타한 아딘은 둘이 모두 정신을 잃은 채 게거품을 물때쯤 폭력을 멈췄다.

곧장 변신을 해제한 아딘은 근처 옷가게에서 대충 아무 옷이나 다 주운 후 경기병의 말 안장에 달린 가죽 부대에 집어넣고는 그것을 훔쳐 타고 무작정 파세레빌을 빠져나와 북쪽으로 달렸다.

그렇게 아딘은 장장 6시간 만에 슈드 자치령과 샤펠 제국의 자연 경계선 중 하나인 검은 개구리 개울에 도착했다.

“다 입었습니다, 주…….”

로제의 말에 아딘은 짧은 상념을 끝마치곤 뒤로 돌아봤다.

키가 고작해야 143cm 밖엔 되지 않는 로제에게도 작은, 일종에 유아복이었지만 그런대로 이전에 입었던 허름한 옷보다는 나았다.

아딘은 미소를 지으며 로제에게 다가갔다.

“그래, 옷을 이렇게 입으니까 얼마나 예쁘니.”

“가, 감사합니다, 주…… 네…….”

“정 말끝마다 주인님이니 뭐니 그런 표현을 붙여야겠니?”

“……네. 죄송합니다…….”

“흐음…….”

아딘은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했다.

‘주인님이란 표현은 듣기 거북해. 그래, 차라리 누구누구 씨라고 부르게 하는 게 낫겠어.’

아딘은 고개를 숙이고 있는 로제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차라리 주인님이란 표현 대신 다른 표현을 쓰는 게 어떻겠니?”

“다른 표현 말입니까?”

“그래. 주인님 말고 차라리…… 음…… 그래, 스미스 씨라고 부르는게 어때?”

“스미스…… 씨 말입니까?”

“그래.”

“네,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스미스 씨.”

“그래. 한결 듣기 좋네.”

아딘은 씩 웃으며 로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아딘의 손이 자신의 머리로 향할 때 움찔하던 로제는 이내 그 손이 따스하게 자신을 어루만져주자 긴장을 풀곤 배시시 웃었다.

‘과연 피의 마녀를 내가 좋은 마법사로 이끌어 줄 수 있을까?’

소설 대로라면 4개월 후 로제는 각성할 것이다.

혹 소설 내용대로 이어지지 않아 다른 전개가 펼쳐진다 해도 어쨌건 그녀는 각성할 것이다.

그녀의 몸에 잠들어 있던 용의 유전자가 깨어나면 아딘이 3대 신물을 다 모으기 전까지, 인간계에선 그 누구도 힘으로 그녀를 이길 수 없을 터였다.

‘올바른 길로 이끌어 준다면 내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원군이겠지만…….’

만약 로제가 이대로 본래 김현수가 설정했던 피의 마녀로 각성해 버린다면…….

아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닥쳐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걱정을 아딘은 일단 접어두었다.

“배고프지? 조금만 참어. 내가 개울에서 물고기를 잡아다 구워 줄 테니까.”

“네, 감사합니다, 스미스 씨.”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 숙이는 로제를 바라보며 아딘은 미소를 짓고 다짐했다.

‘그래. 어떻게든 따듯하게 대해주면 마녀로는 안 되겠지.’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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