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14화 (14/175)

014 각성 직전의 마녀 (3)

피의 마녀 로제.

김현수의 소설 영웅일대기 2부의 메인 빌런이자, 2부부터 주인공으로 활약하기 시작하는 존 크리스토퍼 하이로드가 출세하게 되는 계기를 선사해주는 존재다.

두루마리의 설명대로 광명령 977년 10월 1일에 용과 인간 여자의 혼혈로 태어난 그녀는 12세가 되던 해에 어미로부터 버림받고 슈드 자치령 일대를 떠돌며 거지로 살았다.

그러다 13세가 되던 해에 노예상에게 납치됐고, 같은 해 스틸레 요새 사령관 아테인 남작가의 노예로 팔렸다.

본래라면 광명력 992년 10월 1일, 자신을 겁탈하려던 아테인 남작을 피해 도망하다 그가 휘두른 칼에 찔려 죽음의 문턱에 도달하던 차에 용의 유전자를 각성하게 되고, 이후 아테인 남작가 식솔들을 모두 쳐 죽일 예정이었다.

이후 자신의 막강한 힘을 이용해 제국 동부에서부터 슈드 자치령 북부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자신의 땅으로 삼고 그곳의 맹주로 군림하게 될 터였다.

그러다 24세가 되던 해에, 주인공 존 크리스토퍼 하이로드의 미남계에 넘어가 결국 그의 손에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 그녀에게 정해진 운명이었다.

그 부분을 쓸 때가 고등학교 3학년부터 군 복무 기간 사이였는데, 그것을 쓰면서 김현수는 ‘만약 이걸 웹소설 사이트에 연재한다면, 독자들은 주인공의 선택을 어떻게 볼까?’에 대해 고민했다.

그리고 지금, 침대에 엎드린 로제의 등에 난 상처에 종업원을 통해 구해온 상처약을 바르며 아딘은 다시금 그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완전 개자식인 거지 뭐.’

고개를 흔들며 생각을 털어낸 아딘은 현실적인 부분에 집중했다.

‘우연도 참…… 여기서 내가 피의 마녀를 다 만나네. 그것도 각성까지 딱 4개월 남은.’

피의 마녀 로제는 노예 출신인 만큼, 기존 체제에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녀는 죽는 와중에도 그녀 자신이 끝까지 사랑했던 존 크리스토퍼 하이로드에게 노예 없는 세상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목적을 이루었지만, 그 과정에서 역시나 마음에 상처가 생겼던 존은 이후 황제로부터 제국 동부를 영지로 하사받고 하이로드 공작으로 임명되자 자신의 영지 내에서 노예제를 전면 철폐해버렸다.

주인공이 중세적 세계관을 개혁하는 밑거름이 되는 존재.

그게 바로 노예 출신 피의 마녀 로제였다.

‘신중하게 설정을 짰어야 했던 걸까?’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아딘은 남은 상처 부위에 조심스럽게 약을 바른 후 약병 뚜껑을 닫았다.

“한 30분 정도 그렇게 누워 있어야 해. 약이 적당히 말라서 상처에 스며들어야 옷을 입든가 할 테니까. 불편해도 그대로 있어. 알겠지?”

“네, 주인님.”

엎드려 있는 로제의 대답에 아딘은 쓴웃음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나한테 존댓말을 쓰는 것까지는 뭐, 네가 나보다 훨씬 어리니까 그러려니 하겠지만, 앞으로 주인님이란 단어는 절대 쓰지 마. 알겠지?”

“네.”

순순히 자신의 명령에 따르는 로제를 바라보며 한 차례 웃음을 머금은 아딘은 그러나 이내 다시 서글픈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그는 창가로 걸어가 창밖 파세레빌 도시 전경과 북쪽 언덕에 자리한 스텔레 요새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내가 이 소설 속에 들어올 거라곤, 아니 애초에 이 소설이 현실적인 세계가 될 거라고 상상을 하지 않았기에 그랬다곤 하지만…… 너무 끔찍해.’

영웅일대기란 제목처럼 김현수는 주인공 존 크리스토퍼 하이로드가 봉건적 구체제로 얼룩진 세상에서 혁명을 일으키고 차례로 다가오는 위협들을 극복하는 그런 이야기를 쓰려고 했다.

그랬기에 최대한 구체제가 억압적이고 모순으로 가득한 것으로 보이게끔 만들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막상 그것이 현실이 되니 이만큼 끔찍한 것이 또 있을까 싶었다.

‘그나저나 존은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문득 아딘은 김현수가 주인공으로 설정했던 존 크리스토퍼 하이로드의 근황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프랭클린은 한창 하이로드 상단의 힘을 총력 가동해서 벨로디나를 먹고 있을 거고, 존은…… 라폴리움 수도원에서 인성 수업을 받고 있겠네.’

주인공의 근황에 대한 궁금함을 시작으로 아딘은 자신이 곳곳에 설치해둔 설정들 그리고 앞으로 반드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사건들에 대해 하나씩 떠올리기 시작했다.

‘결국, 이 세상은 전쟁과 기근, 파괴와 살육으로 얼룩질 수밖에 없다는 건데…….’

그의 눈에 창밖으로 평화로이 밤거리를 걸어 다니는 파세레빌 시민들과 나그네들이 들어왔다.

곧이어 벨로디나에서 발생한 내전 와중에 약탈과 살육의 대상이 되었던 카판 대평원 유목민들이 떠올랐다.

‘내가 반드시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게끔 설정한 사건이 정말로 발생한다면…… 결국, 그 피해는 힘없는 백성들에게 전가되겠지.’

“후우…….”

아딘은 한숨을 내쉬었다.

단순히 자신을 고문한 유리 콘스탄틴에 대한 복수만이 아니라, 김현수가 설정해놓은, 다가올 재앙을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힘을 키워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그의 뇌리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잠시만…… 내가 만약 흑장미여관이 아니라 다른 여관을 선택했다면…… 오늘 피의 마녀를 만날 일도 없었을 것 같은데…….’

아딘은 황급히 두루마리를 꺼내 펼쳤다.

하지만 지금은 두루마리에서 그 어떠한 문자나 그림도 떠오르지 않았다.

‘설마…… 나를 로제와 만나게 하려고 일부러 여기로?’

아딘은 침을 꿀꺽 삼켰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이 두루마리는 단순히 정보를 담고 있다 보여주는 백과사전 같은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하나의 생명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이 두루마리가 살아있는 존재라면…… 나를 피의 마녀와 만나게 하고자 일부러 이곳 흑장미여관으로 이끈 것이라면…… 내가…… 김현수가 왜 이 세상에서 아딘 콘스탄틴에 빙의 됐는지도 설명해 줄 수 있는…….’

한동안 아딘은 떨리는 손으로 두루마리를 지켜보았다.

하지만 이내 그는 깊은 한숨과 함께 두루마리를 말아 품에 집어넣었다.

‘3대 신물은 소유자의 정신력에 비례해 그 능력을 끌어낼 수 있어. 그리고 인간의 정신력은 신물의 능력을 최대 40%까지 끌어쓸 수 있을 정도로 성장이 가능하고.’

아딘의 시선이 다시 파세레빌의 불야성으로 향했다.

‘그때가 되면, 이 두루마리는 내게 내가 알고자 하는 것을 가르쳐 줄까?’

그렇게 아딘은 로제의 등에 바른 약이 상처에 다 스며들고 마를 때까지 창밖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 * *

거대한 석관 속에는 새까맣게 탄 여인의 시체가 눈을 감은 채 누워 있었다.

집주인 콜자크와 영묘에서 관을 꺼낸 하인들이 살짝 거리를 둔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고, 총독 샤를은 무심한 얼굴로 석관 옆에서 르네의 시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래, 황금 갑옷이 주먹에서 번개를 수석 마법사에게 쏘았고, 그것을 맞은 수석 마법사가 타 죽었단 말이지?”

샤를의 물음에 콜자크의 바로 곁에 있던 하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그러하옵니다, 총독 각하. 이, 이 비천한 것이…… 지, 직접 봤사옵니다.”

“흐음…… 주먹에서 나온 번개라…….”

샤를은 오른손을 뒤로 뻗었다. 배후에서 대기 중이던 참모가 들고 있던 조그만 지팡이를 그에게 건넸다.

샤를은 지팡이로 르네의 시체를 쿡쿡 찔렀다. 바짝 탄 고기를 찌르는 것 같은 느낌이 지팡이를 통해 손으로 전해졌다.

그리고 손으로 전해진 감각을 통해 샤를의 눈은 죽은 르네의 기억과 동조를 이룰 수 있었다.

샤를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가 눈을 감는 순간, 새로운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죽은 르네의 살아생전의 눈으로 샤를은 그녀가 죽기 전 일어났던 일들을 보게 됐다.

콜자크의 말마따나 치열한 전투가 눈앞에서 펼쳐졌다.

기사들의 대련이나, 아주 가끔 일어나는 귀족 자제들의 결투 따위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마법사와 예언의 황금 갑옷을 입은 전사 간의 목숨을 건 싸움.

르네의 시선으로 그 싸움을 바라보며 샤를은 살짝 전율했다.

특히나 황금 갑옷이 르네가 뿌린 번개 다발을 그대로 흡수한 다음, 고스란히 르네에게 전달해 주었을 때, 샤를은 르네가 당한 일격을 직접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어야만 했다.

그리고 모든 싸움이 끝나고, 황금 갑옷의 승리가 확실시될 무렵, 샤를은 황금 갑옷을 해제한 남자의 담갈색 머리카락과 눈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남자가 르네를 지켜보는 장면을 끝으로 더 이상의 장면은 진행되지 않았다.

멈춰있는 담갈색 눈빛을 바라보며 샤를은 미소를 지었다.

‘담갈색 눈이라…… 단서 하나는 잡혔네.’

샤를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는 지팡이를 도로 참모에게 건네며 이야기했다.

“애들 시켜서 피레 가문에다 시신을 전달해.”

“네.”

샤를은 천천히 콜자크에게 다가갔다.

콜자크와 하인들은 샤를이 다가오자 바짝 얼어붙은 채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하룻밤 자고 가야 할 것 같은데, 보다시피 우리 쪽 사람이 많아.”

샤를이 무얼 말하고자 하는지를 콜자크는 곧장 알아들었다.

“별채가 따로 있사옵니다. 저와 하인들은 그곳으로 가 잠을 자겠사오니 총독 각하께옵서는 이 집에서 편히 쉬옵소서.”

콜자크의 말에 샤를은 피식 웃었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발걸음을 옮겼다.

참모가 그의 뒤를 따랐고, 콜자크와 하인들은 이내 각자 짐을 챙겨 별채로 이동하고자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상처약이 상처에 스며들고 마를 때쯤, 아딘이 종업원들을 통해 부른 사제가 나타났다.

아딘은 사제에게 10골드를 헌금했고, 사제는 감사를 표한 후 로제의 곁으로 가 그녀를 위해 기도해주었다.

사제의 기도는 단순한 기도가 아니었다.

그가 기도하는 순간 신성력이 강한 빛의 형태로 뿜어져 나왔고, 그 빛이 닿자 로제의 상처는 말끔하게 치유됐다.

상처가 모두 아물고, 사제도 떠나자 아딘은 그녀가 먹을 밥을 챙겨주었다.

그리고 로제는 자신을 향한 아딘의 호의를 묵묵히 받아내면서도 끊임없이 그의 눈치를 살폈다.

“난 널 어찌할 생각이 없어. 그러니 안심하고 밥이나 먹어.”

그녀가 무엇을 염려하는지를 알았기에 아딘은 로제를 안심시켜주었다.

완전하게 아딘의 말을 신뢰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로제는 그 말이 나온 이후부턴 비교적 아딘의 눈치를 덜 봤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갔다.

아딘이 자신이 입을 옷과 로제가 입을 옷을 사기 위해 여관을 나서서 시장에 도착했을 때였다.

[두두두두두-!]

길 한복판을 뚫고 경기병 2기와 소년 2명을 태운 말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무작정 달리는 말을 피하고자 상인과 손님들은 모두 분주히 갓길로 피해야만 했다.

한참을 달리던 네 명은 아딘과 로제 앞에서 말을 세웠다.

“어이!”

경비병을 뚫고 두 소년이 말을 타고 나왔다.

아테인 남작의 차남 자크와 파세레빌 시장의 아들 올랑드였다.

경기병 2기를 배후에 둔 채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나타난 두 사람을 바라보며 아딘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따로 볼 일이 남아 있었나?”

자크의 시선이 아딘의 곁에 서 있는 로제에게로 향했다.

그 시선을 받자 로제는 화들짝 놀라며 아딘의 등 뒤로 숨었다.

그 모습을 보며 자크는 피식 웃은 후 경기병들을 향해 명령했다.

“체포해.”

자크의 말에 경기병들이 아딘을 향해 다가왔다.

아딘은 황당하단 표정으로 경기병들을 바라보다가 자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크와 올랑드는 그런 아딘을 바라보며 킬킬거리고 있었다.

“감히 둘째 도련님의 노예를 강탈하다니!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무기를 겨눈 경기병이 아딘을 향해 말했다.

그제야 아딘은 전후 상황을 파악하고는 황당하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경기병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말에서 내려 아딘에게 다가갔다.

“넉 달 뒤에 죽을 놈을 살려줬더니 이딴 식으로 나온다 이거지?”

그리고 아딘이 웃음을 멈추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두 명의 경기병들과 그 뒤에 있는 두 철부지 소년들을 바라봤다.

“그럼 나도 똑같이 나가 줘야지.”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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