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1 황금 갑옷 (5)
‘내가 왜 웃고 있지?’
아딘의 시선이 새까맣게 탄 르네의 시체로 향했다.
‘이게 웃을 일인가?’
비록 선빵을 날렸다곤 하지만 어쨌건 사람이 죽었다.
그것도 한창 꽃다운 나이에, 자신이 쏜 마법에 고스란히 맞아서 말이다.
구태여 그녀를 동정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웃고 있을 필요도 없었다.
본의 아니게 잠에서 깨 싸움을 구경하게 된 목격자들을 모두 죽여버리겠다는 발상 또한 정상적인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김현수의 생각은 그러했다.
하지만 조금 전, 아딘은 김현수가 아닌 아딘 콘스탄틴의 생각과 감정을 품은 채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굳은 표정으로 아딘은 천천히 르네에게 다가갔다.
새까맣게 타버린 채, 눈을 부릅뜨고 죽은 그녀의 시체 앞에서 아딘은 가만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곤 천천히 그녀의 눈을 감겨 주었다.
‘정당방위였어요. 이해하세요. 부디 다음 생이란 것이 있다면, 나와 엮이진 마시길.’
그렇게 가볍게 그녀의 명복을 빌어준 후 아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고개를 들어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콜자크 저택 사람들을 훑어봤다.
‘일단 여길 빠져나가는 게 우선이야.’
아딘은 땅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검을 집어 들어 칼집에 넣었다.
그리곤 로브 후드를 푹 뒤집어쓴 채 마구간으로 향했다.
[히히히힝-!]
그곳에서, 콜자크 저택 하인들처럼 싸우는 소리에 잠에서 깬 갈색 말을 꺼내 올라탄 후 그대로 아딘은 저택을 빠져나갔다.
‘건달들을 죽인 거랑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범죄다.’
슈드 자치령 총독부 수석 마법사.
자치령과 제국 남부에 걸쳐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페렛 가문의 여식.
그런 사람을 태워 죽인 만큼, 앞으로 그에 대한 수배령이 자치령은 물론 제국에도 떨어질 게 자명했다.
‘서둘러 제국 국경을 넘어야지.’
그렇게 아딘은 여러모로 찝찝한 감정을 뒤로한 채 서둘러 갈색마을을 벗어났다.
* * *
“커허억-!”
새벽 중에 조르주는 심장을 칼로 찌르는 통증에 비명을 지르며 눈을 떠야만 했다.
당장이라도 심장이 찢어질 것만 같은 통증에 그는 가슴을 주먹으로 치며 고통을 호소해야 했다.
‘설마…… 설마!’
이것이 단순한 노환이 아님을 조르주는 알고 있었다.
정확히 20년 전, 이와 똑같은 통증을 느낀 적이 있었으니까.
‘르네 드 페렛이…… 죽었어?’
직속 하위 계급자가 죽으면, 그 직속 상위 계급자에게는 이렇게 심장을 뜯어내는 통증이 발생한다.
이것은 하위 계급자에 대한 상위 계급자의 관리 책임을 요구하는 것임과 동시에 혹시라도 하위 계급자가 객사할 경우 그 시신을 수습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누가…… 누가 페렛을 죽일 수 있단 말이야?!’
조르주의 뇌리로 딱 한 사람이 떠올랐다.
‘황금 갑옷……!’
그 순간, 조르주는 식도를 타고 역류하는 비린내 나는 피를 느낄 수 있었다.
“쿠워억-!”
그대로 그는 바닥에다 피를 토해냈다.
피를 한 바가지를 쏟자 심장의 통증이 멎었다.
그는 현기증을 느끼며 그대로 침대에 다시 누웠다.
[딸랑-! 딸랑-! 딸랑-!]
힘겹게 손을 뻗어 조그만 종을 울린 후 조르주는 그대로 대자로 뻗어버렸다.
‘황금 갑옷이…… 르네 드 페렛을…… 죽였다고? 왜? 어쩌다가…….’
점차 희미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 조르주는 왜 황금 갑옷이 르네를 죽였을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마땅한 대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7개월만 있으면 은퇴인데…….’
조르주는 말년에 다가온 최악의 위기에 정신이 혼미해짐을 느꼈다.
‘빌어먹을 페렛……’
자신의 안락한 은퇴 생활을 망치려고 작정한, 이제는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 말을 듣지 않던 직속 하위 계급 신도 르네를 향해 조르주는 속으로 욕을 내뱉고는 그대로 의식을 잃고 혼절했다.
* * *
아딘 블라디미로비치 콘스탄틴.
극단적 나르시시즘에 빠진, 오만한 왕족이자 망나니.
소설 1부의 메인 빌런.
그래서일까?
영혼은 분명 대한민국 모범 시민 김현수였지만, 뇌는 벨로디나 망나니 아딘 콘스탄틴인 만큼 가끔 그의 자아가 내 의식을 지배하곤 했다.
처음엔 이게 너무도 당황스러웠다.
사람을 죽여놓고도 죄책감은커녕 도리어 즐거움을 느낀다든가, 목격자를 모두 죽여 입을 막아버리겠다는 생각은 자연스럽게 할 때, 난 너무도 놀랐고 또 무서움을 느꼈다.
하지만 사흘 동안 인적 드문 숲과 산으로 이동하면서, 난 생각을 달리 품게 됐다.
이 세계는, 나 김현수가 창조한 이 판타지 세계는 대한민국처럼 보편적 인권이나 중앙정부의 복지, 경찰 조직의 치안 서비스같은 게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도리어 공고한 신분제와 견제받지 않는 절대왕권이 존재하는, 그래서 한 개인의 범죄가 그 행위자의 신분에 따라 유죄가 되기도 하고 무죄가 되기도 하는 세상이다.
그런 만큼 김현수의 부드럽고 나약한 자아보다는 차라리 아딘 콘스탄틴의 단단하고 강한 자아가 살아감에 있어선 더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 식으로 발상을 전환해보니 가끔 아딘 콘스탄틴의 자아가 의식의 표층으로 떠오르는 게 나쁜 건 아니란 생각을 하게 됐다.
날 고문한 유리 콘스탄틴에게 복수하기 위해 더 나아가 내가 이 세상에 빙의된 이유를 알아가기 위해 난 김현수보단 아딘 콘스탄틴에 가까워질 필요가 있다.
김현수가 지닌 따스한 마음씨와 보편적 정의에 대한 믿음이 아딘 콘스탄틴이 지닌 단호함과 하나가 된다면 오히려 더 좋아질 수도 있다.
물론 김현수가 지닌 나약함과 아딘 콘스탄틴이 지닌 극단적 나르시시즘이 하나가 된다면 최악이 되겠지만.
그렇게 나는 존재론적 갈등을 일단락 짓게 됐다.
사실, 존재론적 고민을 하기엔 당장 내가 복수해야 할 대상은 물론 도주해야 할 대상도 만만찮은 상대이기에, 이런 고민은 빨리 매듭짓는 게 좋다.
그리고 아마 이런 빠른 매듭짓기는, 김현수보단 아딘 콘스탄틴이 지닌 강점에서 비롯된 결단일 것이다.
* * *
슈드 자치령 최북단 도시 파세레빌은 서쪽으로는 아름다운 바다를, 동쪽으로는 장엄한 회색 산맥을 끼고 있는, 제국과 자치령 사이의 관문 도시다.
그곳에 아딘이 도착한 건, 그가 갈색마을에서 새벽에 도망친 지 딱 사흘째가 되던 날 저녁이었다.
초창기 샤펠 제국을 슈드 자치령이 자리한 이스파니 반도의 야만인들로부터 지켜주던 스틸레 요새를 중심으로 넓게 형성된 파세레빌은 플루슈드나 노드플루슈드와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의 번잡함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사흘 동안 미친 듯이 달린 나머지 결국 파세레빌을 5km 앞둔 숲에서 죽은 말을 묻어주고, 천천히 걸어서 도시에 도착한 아딘은 로브 후드를 눌러쓴 채 도심 광장으로 향했다.
‘나를 아직 특정하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정이 있는 것인지 아직 수배가 되진 않았어.’
말을 묻어주고 아딘이 두루마리를 펼쳤을 때, 두루마리는 아딘에게 슈드 자치령 주요 수배자 명단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거기에 아딘은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이 저지른 행위, 즉 건달패 학살과 총독부 수석 마법사 살해에 관한 조사 상황까지는 두루마리가 보여주지 않았지만, 수배자 명단에 자신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했다.
‘오랜만에 여관에서 목욕이나 해야겠어.’
그렇게 아딘은 천천히 광장으로 들어섰다.
“흑갈나무 여관으로 오십쇼! 매끼 식사마다 맥주 1잔이 무료!”
“진주조개 여관으로 오십시오! 목욕비가 공짜입니다!”
“바위꽃 여관으로 오십시오! 즐거운 공연이 매일 밤마다 있습니다!”
관문 도시답게 파세레빌의 유동인구 숫자는 슈드 자치령 전체를 통틀어 1위였다.
그만큼 광장에는 고객을 유치하려는 여관의 치열한 광고 경쟁이 펼쳐지고 있었고, 비단 아딘 뿐 아니라 다른 여행자들 또한 그곳에서 자신이 가고자 하는 여관을 찾았다.
‘흐음…… 맥주도 필요 없고, 한밤중의 공연은 더더욱 필요 없지. 이왕이면 목욕을 할 수 있는 곳으로 가는 게 낫겠지.’
아딘이 나름 필요에 따라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고, 진주조개 여관을 홍보하는 10대 소년에게 다가갔다.
그러다 문득, 아딘은 발걸음을 멈췄다.
‘잠시만, 혹시 두루마리가 여관도 추천해주려나?’
플루슈드에서 두루마리가 도시 내 약초 시세를 알려준 것을 떠올리며 아딘은 호기심을 가득 안고 두루마리를 꺼내 펼쳤다.
<흑장미 여관>
<1일 숙박 비용 1골드, 아침저녁 제공, 점심 별도 구매, 대형 목욕탕 보유>
<광명력 992년 6월 1일 오늘 저녁 메뉴 : 훈제 돼지 목살 스테이크, 새우 크림 수프, 15년 묵힌 포도주>
두루마리에는 광장에서 따로 광고하지 않는 흑장미 여관에 관한 정보와 광장에서부터 여관까지 가는 약도가 나타났다.
‘1일 숙박 비용 1골드라…….’
굉장히 비싼 값이었다.
구태여 플루슈드에서 아딘이 머물렀던, 일주일 숙박비가 2골드에 불과하던 영세한 여관과 비교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비싼 숙박비였다.
‘대형 목욕탕을 가졌다고 하니까…… 뭐 나쁘지 않겠지. 두루마리가 설마 뭐 이상한 걸 추천해줬을 리도 없고.’
아딘은 씩 웃으며 두루마리를 말아 품에 넣고는 흑장미 여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구태여 약도를 볼 필요도 없었다.
광장에서 동북쪽으로 조금만 나가면 흑장미라는 단어가 철제 간판에 음각된 거대한 여관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이러니 광고할 필요가 없었겠지.’
여관 입구를 지나자 아딘은 어마어마한 규모의 식당과 마주했다.
플루슈드는 물론 갈색마을 콜자크의 저택도, 심지어 한국에 있을 때 딱 한 번 어머니 생신을 기념해 큰맘 먹고 갔던 5성급 호텔의 뷔페보다도 규모가 컸다.
족히 200개는 돼 보이는 테이블은 어느 하나 빈자리 없이 가득 차 있었다.
‘뭐지? 그냥 제일 좋은 여관을 소개한 건가? 내가 가야 할 여관이 아닌?’
아딘이 황당하단 표정으로 사람들로 가득 찬 식당을 보고 있을 때, 그가 여관문을 열고 들어올 때부터 그를 주시하던 종업원이 다가왔다.
“크험.”
종업원은 헛기침을 하며 아딘의 주목을 이끌었다.
아딘이 종업원을 바라보자 그는 점잖은 말투로 아딘에게 이야기했다.
“파세레빌에서 가장 크고 좋은 여관을 구경하러 오셨다면, 죄송하지만 지금은 한창 저녁 식사 시간이라 구경꾼까지 수용하기 힘들 듯합니다. 죄송하지만 나가주시기 바랍니다.”
말투는 점잖았지만 명백한 모욕이요 축객령이었다.
순간 아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 새끼가?’
아딘은 로브 후드를 벗었다. 그리곤 턱을 살짝 치켜든 채 황당함과 분노, 가소로움으로 가득한 담갈색 눈으로 종업원을 바라보며 물었다.
“여기 1박에 얼마야?”
아딘의 행동에 종업원은 잠시 움찔하다가 이내 다시 예의 그 정중한 자세로 대답했다.
“그쪽이 부담할 수 없는 가격입니다.”
“1박에 1골드가 그렇게 가치가 있었나?”
아딘의 말에 종업원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죄송하지만 그건 일반 침실의 가격입니다. 안타깝게도 현재 우리 흑장미 여관에 남은 방은 특실 1곳뿐이며, 그곳의 숙박 비용은 일반 침실보다 수십 배나 값이 나갑니다.”
아딘은 콧방귀를 뀌었다.
“거 참 혓바닥 더럽게 기네. 그래서 얼마냐고?”
아딘의 목소리가 제법 크기도 했고, 사흘 동안 노숙을 한 그의 행색이 궁색하기도 했기에 식당의 손님들은 아딘과 종업원의 실랑이를 주목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됨을 느낀 종업원이 씩 미소를 지었다.
“1박에 50골드입니다. 가격이 가격인 만큼 당연히 서비스의 질도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물론 그쪽이 그것을 누릴 기회는 없……”
[툭-!]
종업원의 말은 아딘이 주머니에서 꺼낸 두 개의 금덩이가 그의 가슴팍을 때리고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중간에 끊겼다.
종업원은 눈을 부릅뜨며 아딘이 던진 금덩이를 내려다봤다.
“개당 1백 골드짜리 금괴 2개. 도합 2백 골드.”
“……”
“3박 4일간 머물 예정이니 방값 150골드는 충분할 거고, 나머지 50골드는 당신 답뱃값이나 하쇼. 종업원 씨.”
종업원은 떨리는 손으로 허리를 굽혀 바닥에 떨어진 금괴를 집어 들었다.
총독부 재무국 마크와 제조일이 양각된 진품이었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