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 황금 갑옷 (3)
플루슈드 시청과는 구름다리를 통해 연결돼 있는 시장 관사.
부인도, 자식도 없이 69년 평생을 홀로 지낸 조르주는 오늘도 어김없이 방에서 간단하게 샐러드와 호밀빵 한 덩어리로 저녁을 때우고 있다.
소식과 채식이 장수의 비결이라고 평소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슈드 자치령 남부에서 손에 꼽히는 소식가이자 채식가인 그 다운 식단이었다.
‘황금 갑옷이 나타나면 오래지 않아 남풍이 대지를 불태우고 석양이 강을 메마르게 할지어다.’
간단한 저녁을 먹던 조르주는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그가 어린 시절부터 귀에 못 박힐 만큼 들어왔던 예언 구절을 떠올리며 잠시 손을 멈췄다.
아삭한 야채를 입안에 머금은 채 그는 우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년이면…… 딱 7개월만 지나면 은퇴야. 이번 여름과 가을, 겨울만 딱 지나면 편안하게 노후를 보낼 수 있다고.’
샤펠 제국 동남부에 자리한 조용한 항구도시 바롱.
그곳에 지난 45년 동안 시장으로 재직하며 모은 봉급을 쏟아부어 마련한, 안락한 노후 거처를 떠올리며 조르주는 신경질적으로 야채를 씹었다.
그는 야채를 마저 씹고 물로 입을 행군 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안 돼. 딱 7개월만 버티면 돼. 그럼 그 위험한 놈하곤 엮이지 않을 수 있어.’
70세.
비교적 장수했다는 노인이 65세인 이 시대에, 70세가 됐다는 건 신들의 축복이라 사람들은 여겼다.
조르주처럼 비세습 공직에 있던 사람이 70세가 되면 막대한 퇴직금과 비록 명예뿐이긴 하지만 비세습 기사 작위가 내려온다.
또 죽을 때까지 매월 공직에 있을 때 받았던 봉급만큼의 연금도 나온다.
이는 비단 공적인 영역뿐만이 아니었다.
조르주와 르네가 속한 비밀 종교 단체, ‘묵시록 종단’ 또한 마찬가지였다.
70이 된 자에게, 샤펠 제국의 역사와 함께하는 이 비밀 종교 또한 명예로운 원로 칭호와 함께 은퇴를 허락했다.
그리고 1월 1일이 생일인 조르주에게 그런 명예와 은퇴가 오기까지는 이제 고작 7개월 정도밖에는 남지 않았다.
‘안 돼. 절대 황금 갑옷하고는 엮여서는 안 돼!’
그 말은 적어도 7개월 동안은 플루슈드 시장으로서 공직 수행과 묵시록 종단 전도자로서 임무 수행을 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묵시록 종단이 기다리던 황금 갑옷이 나타난 이 시점이 조르주에게 있어선 안락한 노후냐, 은퇴 직전의 개죽음이냐 하는 기로였다.
‘르네 드 페렛, 그 멍청한 귀족 집안 망나니 마법사가 나섰다곤 하지만 잡기는 쉽지 않겠지.’
묵시록 종단이 지난 492년 동안 지켜온 내부 규율, 즉 사회에서의 공적인 입장과는 무관하게 조직에 속한 자들은 조직의 서열에 따라 상위 계급에게 하위 계급이 복종하고 예의를 다한다는 규칙.
그리고 직속 상위 계급자가 아닌 이상 하위 계급자는 그 어떠한 상위 계급자에게도 함부로 업무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규범.
그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규율을 르네는 제대로 따르지 않았다.
당장 조르주가 자신보다 상위 계급인 장로 계급에 속한 자들에게 보고한다고, 그러니 슈드 자치령의 수도 슈드아퐁으로 돌아가 대기하고 있으라고 명령했음에도 그녀는 독자적으로 조사에 나섰다.
‘내가 그냥 시간만 죽이려고, 그래서 내년까지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하게만 하려고 그런 줄 아나?’
호밀빵을 씹어 먹으며 조르주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의 뇌리로 예언서에 나오는 황금 갑옷의 위용과 건달들의 시체를 통해 그가 보았던 황금 갑옷의 실제 무력이 떠올랐다.
‘괜히 조사한답시고 들쑤시고 다니다간 아주 똥 되는 거야. 하여간 요즘 젊은것들이 노인들이 나이를 무슨 똥구멍으로 먹은 줄 아나?’
얼마 남지 않은 호밀빵과 샐러드를 마저 먹어 치우고, 물로 입을 깔끔하게 행군 후 조르주는 하녀를 불러 식기를 들고 나가게 했다.
그리고 그는 종이를 꺼낸 후 깃펜에 잉크를 바른 뒤 자신의 직속 상위 계급자인 장로에게 보낼 서신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친애하는 종단의 장로요 자치령을 총괄하시는 위대한 총독이시며 제국의 황태자이신 샤를 드 퐁피두 각하께 당신의 종복 조르주가 문안드립니다.>
최대한 멋들어진 문장을 쓰고자 노력하며, 그렇게 조르주는 자기 허락도 없이 황금 갑옷을 추적하러 간 르네를 욕하며 서신을 써 내려갔다.
* * *
갈색마을.
촌장 콜자크의 저택 3층 식당.
족히 20명은 앉아 식사할 수 있을 정도로 큰 테이블에 딱 세 사람이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상석에는 관습에 따라 집주인인 콜자크가 앉아 있었고, 그의 우편에는 르네가 앉아 있었으며 그녀의 맞은편이자 콜자크의 좌편에는 아딘이 앉아 있었다.
“제 아들이 비록 수석 마법사님보단 못하지만, 그래도 똑똑한 데다 또 효심도 지극해서……”
콜자크에게 있어서 아딘은 그다지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오랜만에 마을에 찾아온 외지인이요, 자칫 칼부림을 일으킬지도 모를 떠돌이 검객이었기에 그리고 적당한 숙식 비용을 지급하겠다고 했기에 재워주는 것뿐이었다.
반면 르네는 격이 다른 존재였다.
우선 그녀 자신부터가 25세라는 젊은 나이에 총독부 수석 마법사가 됐을 만큼 대단한 존재였다.
그리고 그녀가 속한 페레 가문은 자치령은 물론 제국 남부에도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역사와 전통이 있는 귀족 가문이었다.
즉, 여기서 그녀에게 최상의 접대를 제공한다면 총독부 관료로 재직 중인 아들의 관운이 트일 수도 있는 것이었다.
자연히 콜자크 입장에선 간도 쓸개도 모두 빼줄 자세로 그녀에게 아첨하는 수밖에 없었다.
“작년에는 이 녀석이 이 애비 생일이라고 글쎄 연어를 대접하는 것 아니겠습니까요? 그 비싼 냉동 마법이 걸린 상자에다 담아서 말입니다. 이런 놈이 그래도 이 수석 마법사님과 같은 총독부에서 일하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하지만 정작 르네는 콜자크나 그의 아들보다는 아딘에게 관심이 있었다.
‘만약 이 남자가 황금 갑옷이면…… 그래서 내가 이 남자를 잡아간다면…….’
묵시록 종단에 존재하는 4가지 계급 중 가장 최하위에 자리한 신도.
신도 계급의 조직원은 비록 그의 사회적 지위가 어떠하든 관계없이 수많은 제약으로 행동을 규제당했다.
그중 가장 큰 규제가 바로 직속 상위 계급자를 제외한 다른 상위 계급자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전도자만 되면 은퇴할 날이 얼마 안 남은 영감탱이가 아니라 좀 더 상위에 있는, 열의가 있는 사람과 소통이 가능하겠지.’
그랬기에 그녀는 지금 자기 맞은편에 앉아 묵묵히 양고기 스프를 떠먹는 남자, 아딘으로부터 어떻게든 황금 갑옷에 대한 정보를 캐내야만 했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충분히 그럴 만한 능력이 있었다.
“만약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제가 슈드아퐁으로 갔을 때 수석 마법사님을 아들과 함께 대……”
“당신 이름이 뭐야?”
콜자크의 말을 자르고, 르네가 아딘을 바라보며 물었다.
식당에 들어설 때부터 지금까지, 쭉 자신을 향해 있던 르네의 시선을 일찌감치 느끼고 있었던 아딘은 숟가락을 내려놓고 냅킨으로 입가를 닦은 후 르네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존 스미스라고 하오.”
그리고 르네는 볼 수 있었다.
아딘의 배후에 나타난 붉은 후광을.
‘이름부터 가명이라 이거네?’
르네는 미소를 지으며 계속해서 아딘에게 물었다.
“존 스미스? 제니스 사람인가 봐?”
“그렇소.”
“제니스 어디서 왔어?”
“아라곤에서 왔소.”
“아라곤? 수도 사람이네? 어디서 살았어?”
“그냥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살았소.”
“그래? 그럼 여긴 어쩐 일로 온 거야?”
“약초나 캐다가 팔 생각으로 왔소.”
“약초? 아하. 그럼 플루슈드에서 왔겠네?”
“그렇소.”
“그럼 왜 배편이 아니라 육로를 이용하는 거야? 포르트지앵에서 배를 타는 게 더 빠를 텐데?”
“배를 탈 돈이 없소.”
르네의 질문에 아딘은 막힘없이 대답했다.
하지만 아딘의 대답이 거의 다 거짓임을 아딘의 배후에 나타난 붉은 후광이, 오로지 르네에게만 보이는, 사람의 말에 대한 참과 거짓을 판별하는 빛이 명명백백히 밝혀 주었다.
오로지 플루슈드에서 왔느냐는 질문에 대해 대답할 때만 후광의 색이 붉은색에서 푸른색으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플루슈드에서 여기로 온 것 빼면 다 거짓이라 이거지?’
르네는 미소를 지으며 포도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약초? 플루슈드에서 캔 약초라면…… 약초숲에서 캔 걸 이야기하는 건가? 호오. 내가 요즘 관절이 안 좋은데 혹시…….”
대화에서 배제될까 싶어 잽싸게 콜자크가 끼어들었다.
하지만 르네가 가볍게 그에게 손짓하자 그는 결국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콜자크를 침묵시킨 후 그녀는 다시 아딘에게 물었다.
“플루슈드에서 왔다면 그 이야기도 들었겠네?”
“무슨 이야기 말이오?”
“황금 갑옷의 살육 이야기 말이야.”
순간 아딘의 왼쪽 눈썹이 꿈틀했다.
그는 포도주를 한 모금 넘긴 후 짧게 대답했다.
“못 들었소.”
그리고 그의 등 뒤로 붉은 후광이 나타나 그의 말이 거짓임을 증명해주었다.
“그래? 이상하네. 최근에 플루슈드랑 노드플루슈드에서 유명한 이야기인데 말이야.”
그리고 딱 그 순간에, 르네의 정신력이 한계에 도달했다.
곧 그녀의 능력이 다시 의식의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고, 아딘의 등 뒤에 나타나 있던 후광도 사라졌다.
‘됐어. 이 정도면 충분해.’
앞으로 일주일 동안 그녀의 능력은 계속해서 잠들며 힘을 보충할 터였다.
아딘이 황금 갑옷인지 아닌지는 다른 능력이 밝혀 줄 것이다.
르네는 그렇게 생각하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포도주를 들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아딘은 알 수 없는 불길함을 느껴야만 했다.
‘뭔가 수상해. 저 여자…….’
르네가 더 이상 아딘에게 질문을 하지 않자 콜자크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미 이 식사를 소집한 이유가 해소됐기에, 르네는 더 이상 그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딘 또한 배를 충분히 채웠기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홀로 남은 콜자크만이 맞춰주기 힘든 르네의 성질머리를 속으로 욕하며 남은 음식을 먹어 치울 뿐이었다.
* * *
두루마리는 내게 모든 걸 이야기해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많은 걸 이야기해주었다.
내가 만들지 않은, 3대 신물에 필적할만한 수준의 이 기이한 아이템도 어쩌면 3대 신물처럼 내 정신력의 수준에 따라 이야기해주는 정보의 양과 질이 달라지는 걸까?
만약 그런 거라면, 저녁 식사를 핑계로 나를 심문한 저 마법사라는 여자가 불칸의 갑옷을 추적하고 있다는 정보를 알려주었듯, 언젠가는 내가 왜 이 세상에 떨어진 이유도 알려주지 않을까?
* * *
늦은 새벽.
모두가 잠든 시간.
아딘은 홀로 마구간으로 와 마차를 재정비했다.
말들을 꺼내 마차와 연결했고, 금이 든 마법 상자를 짐칸에 실었다.
‘총독부 소속 마법사가 왜 불칸의 갑옷을 쫓는진 모르겠지만 여기 계속 있으면 위험해.’
르네와의 대화 이후 방으로 돌아가 두루마리를 펼쳤을 때, 아딘은 그녀가 불칸의 갑옷을 쫓는다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알려주지 않았지만, 자신이 그다지 안전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히 추론할 수 있었다.
‘건달들을 죽인 것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인지 그건 모르겠지만 서둘러야겠어.’
그렇게 아딘이 마차의 세팅을 끝낸 후 가면서 마실 물을 가죽으로 된 수통에 담기 위해 우물가로 가던 때였다.
[꽈르릉-!]
갑작스러운 천둥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퍼서석-!]
그리고 천둥과 함께 어디선가 날아든 번개가 마차를 때렸다.
번개에 정통으로 맞은 마차는 말과 함께 재가 돼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오로지 짐칸에 있던 금이 든 마법 상자만이 흠집 하나 없이 멀쩡할 뿐이었다.
“금이 든 상자는 남겨둔 채 마차랑 말만 재로 만드는 거, 대단하지? 내 실력?”
여인의 목소리에 재가 된 마차를 바라보던 아딘은 고개를 들어 허공을 바라봤다.
지상 5m 허공에 뜬 르네가 씩 웃으며 아딘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