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 황금 갑옷 (2)
[히히히힝-!]
말의 울음소리가 아딘의 상념을 깨웠다.
그는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눈을 감았다.
‘지금은 이딴 감상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야. 어쨌건 당장 내가 해야 할 일은 복수야.’
나는 과연 김현수인가? 아딘 콘스탄틴인가? 하는 존재론적 고민은 지금 현재로서는 지적 사치에 불과하다.
아딘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가 왜 자신이 만든 소설 설정집의 세계관으로 들어오게 됐는지, 왜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인물로 빙의가 됐는지는 당장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것은 그의 존재론적 고민도 마찬가지였다.
‘3대 신물을 모두 모으고, 지금 모은 돈으로 조직을 꾸려서 콘스탄티노바로 진군해야 해.’
신물의 힘만으로는 벨로디나 왕국이라는 국가의 힘을 가진 유리 콘스탄틴을 이길 수가 없다.
아딘의 정신력이 말도 안 되는 수준으로 향상된다면 모를까, 평범한 사람에 비해 비범하단 소리를 들을 수준의 정신력으로는 홀로 조직 전체와 맞서 싸울 순 없는 노릇이었다.
더구나 유리 콘스탄틴의 배후에 있는 제니스 공화국은 벨로디나 왕국에 자국 소드 마스터 세 사람을 용병대장으로 위장하여 주둔시켜둔 상태.
‘소드 마스터는 3대 신물을 모은 내가 어찌 상대할 수 있다 쳐도 나머지 병력을 상대하려면 나의 군대가 필요해.’
그 군대를 어떻게 모을지는 당장 감조차 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곁에는 3만 골드라는, 쳐다보기만 해도 듬직한 동지가 있었다.
김현수가 살던 세계나, 아딘 콘스탄틴이 사는 세계나 돈만큼 확실하고 든든한 존재는 없었다.
그렇게 아딘은 유리 콘스탄틴에 대한 복수심과 다음 신물을 얻을 방법 등을 생각하며 마음속에 떠오른 존재론적 고민을 억지로 무의식의 세계로 밀어 넣었다.
* * *
난 싸우는 게 싫다.
특히 주먹질을 하는 건 더더욱 싫다.
하지만 세상은 싸움이 없는 평화로운 곳이 아니었다.
그런 이상향은 적어도 대한민국에는 구현되지 않았다.
그랬기에 나는 내 의지와 무관하게 싸워야 했다.
하지만 주먹질을 그 누구보다도 혐오했기에, 난 주먹이 아닌 말과 의지로 싸우는 방법을 택했다.
말로 해결이 되는 싸움에서 나는 매번 승리했다.
언변이 화려했던 것도 아니었고, 특별히 목소리가 컸던 것도 아니었다.
내가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반드시 이길 수밖에 없는 논리로 싸웠기 때문이었다.
때론 말로 해결이 되지 않은 싸움도 겪어야 했다.
하지만 그때도 난 승리했다.
내가 말과 논리로 싸우려 하면 주먹질과 발길질을 하던 사람들도, 내가 매일같이 찾아가서 끈기 있게 논리적인 말로 밀어붙이니 결국 두손 두발 다 들고 말았다.
난 싸우는 게 싫다.
특히나 주먹을 쓰는 건 더더욱 싫다.
그래서 난 말과 논리, 의지로 싸웠다.
그리고 그 싸움의 끝에서, 난 지역 유지의 아들이자 백화점 VIP 신분으로 직원에게 상습적으로 손찌검을 하던 금수저에게 징역 1년의 실형이 선고되도록 했다.
* * *
슈드 자치령 최남단 도시 플루슈드를 지나 노드플루슈드를 거쳐 동북부에 자리한 항구도시 포르트지앵으로 가는 길을 사람들은 약초길 혹은 황금길로 불렀다.
약초숲에서 채취된 약초들이 플루슈드 시장에서 거래되고, 그것들을 실은 상단 혹은 개별 상인의 발길이 노드플루슈드를 거쳐 포르트지앵으로 이어지기 때문이었다.
물론 슈드 자치령에는 이 루트만 있는 건 아니었다.
노드플루슈드에서 정북향으로 쭉 올라가면 더 많은 도시나 촌락이 나왔다.
그리고 아딘은 황금길이 아닌 바로 그 루트를 이용하고 있었다.
[꼬꼬꼬꼬꼭-!]
[음무우우우-!]
닭들이 한가로이 마당을 돌아다니며 땅에 떨어진 곡식 알갱이를 주워 먹고, 소들이 꼬리를 흔들며 여물을 먹는 목가적인 풍경이 펼쳐진 촌락.
동쪽으로 10km 떨어진 소도시 마르탱이 관리하는 조그만 촌락, 갈색마을.
아딘은 맞은편에서 오는 소달구지와 잠시 대치하다가 달구지 쪽에서 살짝 길을 만들어 주자 마차를 전진시켜 마을에 들어설 수 있었다.
소 주인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한 후 아딘은 천천히 마차를 몰고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이런 곳은 화폐가 거의 통용이 안 될 건데…….’
사흘 동안 노숙을 하며 마른 과일과 육포만 먹었기에 아딘은 따뜻한 음식이 정말 간절했다.
하지만 한낮에 대로변에서 그가 저지른 살육으로 인한 혹시 모를 수배와 추적을 피하고자 도시에서 살짝 벗어난 루트로 움직였기에 물물교환을 위한 가죽이나 실 따위를 구매하질 못했다.
‘노드플루슈드에서 좀 사 뒀어야 하는 건데…….’
다급하게 길에서 먹을 음식만 구한다고 미처 가죽과 실을 구하지 못했던 사흘 전을 떠올리며 아딘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도 일단 부딪혀는 봐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아딘은 지나가던 농민들에게 물어물어 마침내 촌장의 집에 도착했다.
나름 마을 유지랍시고 제법 큰 벽돌 저택 마당에 들어선 아딘은 상자를 들어 어깨에 둘러멘 채 촌장이 나오길 기다렸다.
‘실용 마법. 크으. 이건 편하네.’
김현수가 설정해 놓은, 실생활의 영역에 속하는 실용 마법.
덕분에 3만 온스, 즉 850kg이 넘는 금을 담은 상자의 무게는 실제 무게의 100분의 1 수준으로 느껴졌다.
“어흠.”
아딘이 김현수가 설정해둔 실용 마법의 편리함을 느끼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있을 때, 저택 현관문이 열리며 촌장이 걸어 나왔다.
시골 사람치고는 기름기 좔좔 흐르는 모습으로 고급스러운 재질의 옷을 입은 촌장은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아딘의 앞에 와 섰다.
“그래, 여행자라고?”
촌장의 말에 아딘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래, 무슨 일로 우리 집에 찾아온 건가?”
“사흘 동안 노숙한 만큼, 말들도 피곤하고 저 또한 피곤합니다.”
“허어. 숙식이라도 제공해달라 이런 말인가?”
“대가는 섭섭하지 않게 챙겨 드리겠습니다.”
대가라는 말에 촌장은 콧방귀를 뀌며 아딘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대가? 어디 뭐 노동력으로라도 때울 생각인가?”
촌장의 이죽거림에 아딘의 눈썹이 순간 꿈틀거렸다.
그는 어깨에 들쳐 메고 있던 상자를 내려놓은 후 품에서 금화 주머니를 꺼냈다.
그 과정에서 아딘이 허리에 찬 검이 살짝 드러났다.
로브에 가려져 있던 검을 확인하자 촌장의 표정에서 거드름이 살짝 사라졌다.
아무리 돈이 많고 또 집안에 하인이 많다 하더라도 떠돌이 검객이 작정하고 칼질을 하면 감당하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살짝 식은땀을 흘리는 촌장을 향해 아딘은 금화 주머니에서 1골드를 꺼내 건넸다.
촌장은 1골드를 받으며 씩 웃었다.
“얼마나 묵고 갈 생각이오?”
약간 공손해진 그의 말투에 아딘은 냉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틀이면 충분하지 싶습니다.”
촌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하인 하나를 불러 아딘에게 붙여 주었다.
아딘은 금화 주머니를 도로 집어넣고 상자를 어깨에 다시 들쳐 멘 후 하인을 따라 방으로 향했다.
나름 깔끔하게 정리된 방에 들어선 아딘은 상자를 내려놓고 로브를 벗어 그 위에 올려 두었다.
‘떠나기 전에 로브라도 하나 새로 달라 해야겠어.’
흙먼지가 묻은 로브를 바라보며 아딘은 피식 웃었다.
그는 그대로 침대 위에 몸을 뉘었다.
‘오랜만에 목욕이나 좀 해야지 원…….’
하지만 그는 목욕을 하기도 전에 그만 잠에 빠지고 말았다.
지난 사흘 동안 딱딱한 마차 짐칸 바닥에서 잠을 자느라 피로가 쌓인 까닭이었다.
* * *
“카악-! 퉤-!”
슈드 자치령 총독부 수석 마법사 르네는 바닥에 침을 뱉으며 지도를 펼쳤다.
벌써 사흘째, 그녀는 슈드 자치령 총독부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남부에서 길을 헤매고 있었다.
‘망할 영감탱이. 늙어서 색깔 구분도 제대로 못 하나. 갈색 말은 개뿔!’
“카악-! 퉤-!”
조르주의 진술에 따라 그녀는 갈색 말 2마리가 이끄는 마차의 행방을 쫓았다.
하지만 갈색 말이 이끄는 쌍두마차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덕분에 그녀는 이틀이란 시간을 노드플루슈드에서 허비했다.
‘로브를 쓴 남자 혼자 탄 쌍두마차라서 다행이었지. 아니었으면 아예 자취를 놓쳤을지도 몰라.’
“퉤-!”
다시 한번 더 침을 뱉은 후 그녀는 지도 위에다 깃펜으로 X를 표시했다.
‘계속 북쪽으로 이동한 흔적은 보인단 말이야. 이때까지 루트를 보면 마르탱으로 갔을 리는 없고…… 여기로 갔으려나?’
그녀의 시선이 지도 위에 있는 한 마을로 향했다.
소도시 마르탱의 관할인 갈색마을.
‘여기를 거쳐 갔을 것 같단 말이야.’
그녀는 지도를 접은 후 가볍게 마법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 순간, 그녀의 몸은 허공으로 떠올랐다.
‘네가 마차로 간다면 난 하늘을 날아간다 이거야.’
그녀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그대로 서북쪽으로 날아갔다.
* * *
갈색마을 촌장 콜자크.
다른 시골 촌락 촌장들과는 달리 갈색마을 전체가 사실상 그의 소유나 다름이 없었기에, 그가 누리는 부는 마르탱의 부유층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딱히 도시로 나갈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도시로 나가서, 자신과 비슷한 규모의 부호들과 어울리며 시장이나 수비대장 등 관료들에게 굽신거리기보단 촌락에서 영주처럼 대우받으며 거들먹거리길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자기 집에 찾아와 상전처럼 행세하는 여인은 그가 가장 피하고자 하는 유형의 인간이었다.
“갈색마을 촌장이 대단한 부자라던데…… 도대체 대단한 부자는 어디로 간 거야?”
로브를 걸친 여인, 르네는 콜자크가 바로 뒤에 따라붙었는데도 대놓고 그를 무시하는 발언을 내뱉었다.
콜자크 입장에선 화가 나는 일이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도리어 비굴한 미소가 번졌다.
“헤헤. 검소하게 사느라…….”
그의 말에 르네는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헤헤. 여깁니다요, 수석 마법사님.”
콜자크는 직접 그녀를 이 집에서 제일 좋은 방으로 안내했다.
슈드 자치령의 수도 슈드아퐁에 자리한 총독부에서 관료로 근무하는 아들이 가끔 명절을 맞이해 고향으로 내려오면 제공하는 방이었다.
“흥. 그럭저럭 사람 사는 곳 같긴 하네.”
그런 방을 슥 바라보고 르네는 한 마디 툭 내뱉었다.
“헤헤헤. 제 자식이 가끔 오면 머무는 곳입니다요.”
르네는 방 안으로 뒤따라 들어온 콜자크를 바라보았다.
“그쪽 아들이 총독부에서 근무한다고 했지?”
“헤헤. 그렇습니다요.”
“이름이 뭐라고?”
“재무부에서 일하는 로베르입니다요. 헤헤헤.”
“아들은 과연 알고 있을까? 오늘이 자기 관운이 결정되는 날이란 걸?”
르네의 말에 콜자크는 흠칫했다.
그는 비굴한 웃음을 흘리며 이야기했다.
“헤헤헤. 지내시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요.”
콜자크의 입에 발린 아첨을 한 귀로 흘리며 르네는 창가로 향했다.
창밖으로 갈색마을의 전경이 보였고, 그 너머로 드넓은 밀밭이 눈에 들어왔다.
밀밭을 바라보던 그녀의 시선이 저택 내에 있는 마구간으로 향했다.
‘응?’
그녀의 눈에 마구간 안에서 구유에 담긴 물을 마시는 건강한 흑마 두 마리가 들어왔다.
그리고 마구간 바로 옆에 세워진 마차 몸통도.
‘설마?’
그녀는 곧장 콜자크를 바라보며 물었다.
“저 흑마랑 마차. 촌장 당신 건가?”
“네?”
“저기 마구간에 있는 흑마 두 마리랑 마차 말이야. 촌장 당신 것이냐고!”
“아, 아닙니다요. 저건 손님의 것입니다요.”
“손님?”
콜자크는 르네에게 어제 자기 집으로 찾아온 손님, 아딘에 대해 이야기했다.
가만히 촌장의 이야기를 듣던 르네의 입가에 미소가 걸쳐졌다.
‘황금 갑옷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정황으로만 따지자면…….’
미소짓는 그녀를 바라보며 콜자크는 영문도 모른 채 따라 미소를 지어 보여야만 했다.
그런 콜자크를 바라보며 르네가 이야기했다.
“그 손님이란 남자. 아직 여기 있지?”
“네? 아. 네. 있습니다요.”
“언제 떠난다는 말 같은 건 없었고?”
“내일 아침에 떠나겠다고 오늘 아침에 이야기했습니다요.”
“그래?”
르네는 오똑한 콧등을 손가락으로 한 차례 쓱 훑은 후 미소를 지으며 콜자크에게 말했다.
“오늘 밤에 그 남자랑 같이 저녁을 좀 먹었으면 하는데 자리 좀 주선해 봐.”
누구의 부탁이라 거절하랴?
“네, 알겠습니다요. 헤헤헤. 그럼 편히 지내시다 저녁때 식당으로 모시겠습니다요.”
콜자크는 그렇게 그녀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 후 방문을 나섰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