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 첫 단추 (1)
샤펠 제국의 식민지이자 황태자가 통치 수업을 위해 총독으로 부임해 다스리는 슈드 자치령.
그곳의 최남단에 자리한 약초숲은 예로부터 독충과 약초의 천국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오로지 약초숲에서만 나는 약초들이 많았던 탓에, 샤펠 제국이 이곳을 식민 통치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숲으로는 숱한 약초꾼들이 찾아왔다.
그중 상당수가 독충에 물려 비명횡사했지만, 또 상당수가 약초를 구해 샤펠 제국이나 제니스 공화국에다 판매하여 짭짤한 수익을 냈다.
그리고 수익을 올린 사람들의 이야기가 퍼지며 또 수많은 약초꾼이 목숨을 걸고 찾아왔다.
이러한 일이 반복됨에 따라 약초숲 근처에는 슈드 자치령 최남단 도시 플루슈드가 형성됐다.
그리고 플루슈드는 약초꾼들의 돈과 피를 받아먹으며 폭풍적으로 성장했다.
너도밤나무 여관은 그런 플루슈드에서도 상당히 규모가 작은 곳이었다.
방은 고작 4개에 불과했고, 식당에는 테이블이 5개 뿐이었다.
음식 메뉴도 그리 많지 않아 기껏해야 맥주에 훈제 닭고기, 달걀 수프가 식사의 전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늘 손님들로 붐볐다.
약초꾼 중 영세한 규모의, 실상 약초꾼이라 부르기 힘든 사람들에게는 일주일에 2골드로 숙식이 해결되는 것이 큰 메리트였기 때문이었다.
“레니는?”
바니와 칼, 레니가 그런 케이스였다.
“잠들었어.”
“휴우…….”
칼의 말에 바니는 한숨을 내쉬며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독충에 쏘여서 헛걸 봤나 봐. 의사의 말로는 심각할 정도는 아니라 한 이틀 정도 쉬면 회복된다더라.”
의사의 진단을 바니에게 알려주고 칼도 고개를 가로저으며 맥주를 들이켰다.
바니가 나무잔에 든 맥주를 다 마신 후 새 맥주를 시킨 후 이야기했다.
“그냥 돌아가야겠어. 약초는커녕 독충에 사람이 물려서 헛걸 다 보고…….”
“레니가 정확하게 뭘 봤다고 했지?”
“황금 갑옷이 걸어 나왔다고 하더라.”
“황금 갑옷은 무슨, 들고 있는 금화부터 다 떨어지게 생겼는데.”
칼과 바니는 동시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구석진 곳에서 홀로 달걀 수프를 떠먹고 있던, 로브를 걸친 사내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는 순간 흠칫했다.
‘하필 같은 여관이야.’
로브 너머로 맥주를 들이켜는 바니와 칼을 보며 아딘은 인상을 찌푸렸다.
‘다 좋은데 이 색깔이 너무 눈에 띈단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며 아딘은 숟가락을 들지 않은 왼손으로 복부를 쓱쓱 만졌다.
그의 내부로 들어가 장기 및 뼈와 일체가 된 벨트가 공명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아딘은 마저 달걀 수프를 들었다.
‘하필 내가 나오던 지점에 사람이 있을 줄이야.’
불칸의 갑옷.
그것은 김현수가 일본 특촬물과 할리우드 히어로물 영화를 보고 영감을 받아 설정한 것이었다.
갑옷은 평상시에는 벨트의 형태로 착용자의 뱃속에 들어가 신체 중 일부로 존재한다.
그러다 착용자가 필요로 하면 벨트가 겉으로 드러나고, 벨트로부터 뿜어져 나온 황금빛이 전신을 감싸며 온몸을 가린 전신 갑주가 된다.
신물답게 그 방어력은 엄청나서 소드 마스터의 검기로도 흠집 정도밖에는 낼 수 없을 만큼 단단하다.
단, 착용자의 정신력에 따라 착용 시간이 달라지며, 착용자의 정신력을 초과하는 충격이 가해지는 경우 자동으로 변신이 해제되고 벨트는 다시 몸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내가 소설 속에 들어올 줄 알았다면 이딴 제약은 안 걸어 뒀을 텐데…….’
이런 제약이 걸린 갑옷을 획득한 아딘은 무저갱의 호수로부터 다시 숲 밖으로 나오기 위해 갑옷을 착용했다.
숲을 통과해 무저갱의 호수로 갈 때는 심심하면 나타나 찌르거나 물던 독충들은 갑옷을 입은 아딘의 근처에도 오지 않았다.
그리고 아딘이 마침내 숲의 초엽에 이르렀을 때, 그는 약초를 캐던 한 남자와 마주쳤고, 그 남자는 그를 보고는 화들짝 놀라며 기절했다.
‘독충에 물리길래 근처에 해독 열매를 찾아 먹여서 다행히 죽지는 않았다만…….’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상념을 떨쳐낸 아딘은 달걀 수프를 비운 후 맥주를 한 모금 넘겼다.
“크으…….”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으며 아딘은 나무잔에 든 맥주를 바라봤다.
‘한국 맥주랑은 비교가 안 되는데?’
그는 가만히 잔에 코를 넣고 향을 맡았다.
묵직하면서도 은은한 향기가 그의 코를 찌르고 침샘을 자극했다.
그는 마저 맥주를 쭉 들이켠 후 한 잔 더 주문을 추가했다.
새로 나온 맥주를 마시며 그는 생각에 잠겼다.
‘이 세계는 그저 김현수의 창작일 뿐이야. 상당히 구체적인 설정도 있지만, 음식 같은 경우에는 이렇게 구체적으로는 설정해두지 않았어.’
김현수가 쓰고자 했던 이야기는, 하이로드 가문이 대를 이어 대륙의 패자가 되는 그런 스토리였다.
음식 같은 건 그다지 관심사가 되지 않았고, 그랬기에 아예 설정조차 제대로 해두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가 먹은 달걀 수프나 마시고 있는 맥주는 굉장히 맛이 좋았다.
‘도대체 이런 맛들은 어떻게 구현이 된 걸까?’
문득 그는 자신이 어쩌면 통 속의 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품었다.
‘외부에서 전기 자극을 줘서 내가 무언가를 보고 듣고 느끼는 거라면?’
진지하게 통 속의 뇌 이론을 떠올리며 고민하던 아딘은 별안간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런 생각 해봤자지.’
그는 그대로 맥주를 쭉 들이켜 잔을 비운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을 마시며 어떻게 고향으로 돌아갈지를 고민하는 칼과 바니를 지나쳐 2층으로 올라간 아딘은 곧 구석에 자리한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로브와 옷을 훌러덩 벗고 침대에 대자로 누운 아딘.
멀뚱멀뚱 천장을 바라보던 그의 표정이 이내 심각해졌다.
‘내가 김현수라는 것을, 자기의 창조자라는 것을 인간들은 물론 신들조차도 모르고 있다. 불칸은 나를 아딘 콘스탄틴으로 인지했지, 김현수로는 인지하지 않았으니까.’
그는 양손으로 복부를 쓰다듬었다.
‘어차피 내가 왜 이 세계에 왔는지, 어떻게 다시 김현수로 돌아갈 수 있는지는 당장 알 수가 없어. 중요한 건, 당장 내가 해야 하는 복수야.’
눈을 감자 벌써 6개월도 더 넘은 일이 불과 어제의 일처럼 떠올랐다.
횃불만이 유일한 빛인 음습한 지하 감옥.
쥐와 벌레가 죄수에게 제공되는 푸석푸석한 빵과 물을 모조리 먹어 치우던 그 지저분한 곳.
그곳에서 아딘은 유리 콘스탄틴이 지켜보는 가운데 모진 고문을 당했다.
김현수이던 시절, 사극에서나 보던 인두로 지지기나 주리 틀기, 볼기 때리기는 물론 끝이 갈라진 채찍으로 살점을 뜯어가는 고문까지…….
그야말로 끔찍하다는 표현밖엔 떠오르지 않는 고문들이 매일같이 그를 괴롭혔다.
그리고 유리 콘스탄틴은 정말 잔인하게도 고문이 끝나면 대기 중이던 사제를 시켜 신성력으로 아딘의 외상을 모두 치유하게 했다.
‘유리 콘스탄틴…… 네놈이 날 고문한 순간 나는 이 세계와 관계하게 됐다. 그리고 이 관계를 다 청산하고 나서 난 집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힘을 키워야 했다.
벨로디나 왕국은 제니스 공화국이 허수아비에 불과한 19대 국왕 유리 콘스탄틴을 얼굴마담으로 내세운 채 통치하는 괴뢰국이 됐다.
이것이 1부의 끝이자 이후 쓰여질, 진주인공 존 크리스토퍼 하이로드의 이야기를 위한 밑작업이었다.
덕분에 벨로디나 왕국은 낙후된 경보병 및 경기병이 아닌, 전문적으로 훈련된 5만의 중보병과 중기병으로 구성된 용병이 주둔하는, 제니스 공화국의 괴뢰국이 됐다.
그랬기에 아딘은 3대 신물을 찾고자 결심했다.
이미 아딘 콘스탄틴이란 인물이 모든 세력을 잃은 상황에서, 정치적으로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정치적 해법이 불가능한 이상, 복수를 위해선 물리적 해법 이외에 다른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물리적 해법을 위해선 맥거핀으로 남은 3대 신물을 모두 모아야만 했다.
‘신물을 모두 모으고…… 그다음에는…….’
복수에 대한 구체적인 로드맵을 구상하며 아딘은 그렇게 밤을 보냈다.
* * *
플루슈드 중심부에는 슈드 자치령의 총독이자 샤펠 제국의 황태자가 임명한 시장이 업무를 보는 시청과 숙식을 해결하는 관사가 있다.
거주민 수는 적지만 유동인구는 슈드 자치령 전체를 통틀어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였던 만큼, 시청은 늘 사람들로 붐볐다.
하지만 밤이 되면, 세상 모든 관청이 그렇듯 이곳 시청도 불이 꺼진 채 조용한 침묵에 잠겼다.
현직 시장 조르주는 보통 업무가 끝나면 홀로 조용히 관사 서재에 앉아 고전을 탐독하며 포도주를 마시곤 했다.
하지만 지금, 그는 관사 서재가 아닌 시청 집무실에 앉아 있었다.
“확실한가?”
그의 물음에 그의 우측 사선 방향 의자에 앉아 있던 로브를 쓴 젊은 여인, 슈드 자치령 총독부 수석 마법사 르네 드 피레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금 갑옷이 나타났다…….”
조르주는 심각한 표정으로 갈색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한동안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
“전도자인 당신이 빨리 방침을 정해주세요. 그래야지 우리 신도들이 빨리 행동할 수 있으니까요.”
르네의 말에 조르주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침착하게 신도여. 이건 내가 독단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세. 아무래도 장로님을 뵈어야 할 것 같네.”
“그럴 시간이 없다니까요! 황금 갑옷이 조직의 명령 체계가 작동할 동안 가만히 기다린대요? 왜 이렇게 갑갑해요?”
그녀의 말에 조르주는 잠시 움찔한 후 고개를 가만히 가로저었다.
“어차피 봤다는 진술만 있지 물증은 없어. 무엇보다도 설령 진짜 황금 갑옷이 등장했다 하더라도 그게 지금 어디에 있는지 우리가 알 방법이 없지 않은가?”
“그건……”
“일단 장로님께 말씀을 드리면, 그분이 교주님께 보고를 올릴 걸세.”
“…….”
“교주님께 보고가 올라가면, 어떻게든 그분은 우리 조직뿐 아니라 공적인 조직까지 모두 동원해서 황금 갑옷을 추적할 걸세.”
조르주의 말에 결국 르네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황금 갑옷이라…….”
조르주의 표정이 점차 어두워졌다.
그는 탁자에 놓인 잔을 들어 포도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예언이…… 시작된단 말인가?”
조르주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필 이 시기에?’
굳은 표정으로 포도주를 마시는 조르주를 보며 르네도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포도주를 들이켰다.
* * *
침대를 대강 정리하고 창을 활짝 열어 햇볕이 들어오게 한 다음 아딘은 로브를 걸쳤다.
그리고 품에 손을 넣어 돈주머니를 꺼낸 뒤 가진 돈을 확인해 보았다.
‘20골드밖에 안 남았어…….’
처음 안톤에게 받은 돈은 100골드였다.
적은 돈은 분명 아니었지만, 콘스탄티노바에서 플루슈드까지 이동하는 경비로는 조금 빠듯한 돈이기도 했다.
그것을 알았기에 아딘은 최대한 아낀다고 아꼈지만, 물가가 상상을 초월하는 슈드 자치령에 들어서면서 결국 절약은 아무 의미가 없어졌다.
‘이 돈으로 렝고스까지 가는 건 불가능해.’
아딘 콘스탄틴은 벨로디나 왕국과 그 배후에 있는 제니스 공화국 모두에게 위협적인 존재다.
정통성 약한 유리 콘스탄틴과는 달리 강한 정통성을 가진 존재이니만큼 반드시 제거해야만 하는 존재다.
‘배를 타고 가면 20골드로도 충분하겠지만 그건 불가능해. 언제든지 검문검색에 걸릴 테니까.’
아딘이 찾고자 하는 두 번째 신물, 네르갈의 목걸이는 이곳 슈드 자치령과는 정반대인 대륙 동부, 광활한 초원의 대지이자 야생의 땅인 렝고스에 있다.
그리고 그곳으로 가는 가장 싸고 빠른 수단은 당연히 배다.
하지만 선박은 필연적으로 제니스 공화국의 검문검색을 받을 수밖에 없다.
결국, 아딘이 동부로 가기 위해선 제니스 공화국의 영향력이 없는 샤펠 제국을 통과해 엘프숲 외곽을 지나는 루트를 택하는 것뿐이었다.
‘20골드로는 턱도 없는데…….’
잠시 궁리하던 아딘은 씩 미소를 지었다.
‘돈은 벌면 그만이지.’
그는 곧장 돈주머니를 품에 집어넣고, 이번에는 두루마리를 꺼내 펼쳤다.
누리끼리한 바탕에 곧 그림과 글자가 빼곡히 떠올랐다.
현재 플루슈드 시장에서 거래되는 약초의 시세를 바라보며 아딘의 눈이 빛났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