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2화 (2/175)

002 불칸의 신전 (2)

그 두루마리는 내가 설정한 것이 아니었다.

이 버려진 신전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것을 집어 들어 펼쳤다.

태블릿 PC 정도 크기의 두루마리는, 누리끼리한 것이 상당히 오랜 기간 인간의 손을 타지 않은 물건인 듯했다.

그 바탕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그랬기에 나는 실망했다.

혹시라도 내가 설정해두지 않은 버려진 신전에서, 내가 만들지 않은 버려진 두루마리가 나에게 지금 이 현상을 설명해주지는 않을까, 약간은 기대를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그저 누리끼리한, 종이도 아니고 동물의 가죽도 아닌 재질의 텅 빈 바탕만이 있을 뿐이었다.

허탈함이 몰려왔고, 그 이후에는 나에 대한 슬픔과 나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원망이 터져 나왔다.

난 두루마리를 손에 쥔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영문도 모른 채 내가 쓴 소설 속으로, 1부의 메인 빌런이자 죽음이 확정된 인물로 빙의했다는 것.

그것이 나를 힘들게 했고, 좌절하게 했다.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서 소리 없이 울어야만 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부모님과 친구들을 생각하며 슬피 울고 나서 다시 내가 눈을 떴을 때, 두루마리에는 글자가 나타나 있었다.

<3대 신물>

<불칸의 갑옷 – 슈드 자치령 최남단 약초숲 한가운데 자리한 무저갱의 호수 아래, 불칸의 동굴 끝 불칸의 신전에서 습득 가능.>

<네르갈의 목걸이 – 렝고스 중심부 네르갈의 신전에서 습득 가능.>

<불멸의 검 – 엘프숲 최북단 불멸의 신전에서 불멸자 샤푸르에게서 습득 가능.>

그것은 내가 지난 12년간 소설을 쓰면서, 이름만 몇 차례 간접적으로 언급되기만 하고 끝끝내 등장시키지 않은, 일종에 맥거핀으로 남긴 3대 신물에 대한 상세한 정보였다.

* * *

“후우…….”

아딘은 길게 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몸 어디에서도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퉁퉁 부은 느낌도 물론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손을 내려다보니 확실히 붓기가 완전히 가라앉아 있었다.

아딘은 그대로 호수로 향했다.

혹시 몰라 너무 가까이 가지 않는 선에서 아딘은 수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담갈색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지닌 22세의 백인 미남이 미소를 지은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손으로 얼굴을 쓱 만진 후 아딘은 등을 돌려 동굴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투구뿔버섯의 효능대로 그는 완벽하게 회복됐다.

독충에 쏘여 퉁퉁 부은 피부도, 회로가 꼬인 신경도, 죽어가던 근육까지.

단 하나, 회복되지 않은 것은 그의 마음이었다.

‘내가 왜 여기에 떨어졌는지는 당장에 알 수가 없어. 이건 두루마리도 이야기해주지 않고 있어.’

습기와 종유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그리고 종유석 사이사이에 박힌 구슬에서 뿜어지는 빛이 가득한 동굴을 거닐며 아딘은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유리 콘스탄틴이 내게 끔찍한 고문을 했고, 날 죽이려 했다는 것은 확실히 알고 있지. 그리고 안톤이 나를 위해 스스로 희생했다는 것도.’

자기도 모르게 아딘은 이를 갈았다.

‘아무리 소드 마스터라도 500명의 중기병과 홀로 싸운다는 건…….’

그의 담갈색 눈동자가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유리 콘스탄틴에 의해 고문을 받았던 부위들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실제 고통이 아니었다.

그의 원한이 다시금 떠올려주는 기억이었다.

허벅지와 어깨, 팔뚝에서 느껴지는 불타는 통증과 종아리와 엉덩이에서 느껴지는 살점이 뜯겨 나가는 통증, 등과 배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통증을 다시 느끼며 아딘은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후우-!”

눈을 감은 채 끓어오르는 분노를 심호흡하며 억누른 아딘은 다시 천천히 눈을 떴다.

‘이 세상은 내가 창조한 세상이다.’

그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창조주 대접을 받을 생각은 없다. 그리고 이 세계와 나 사이에는 그 어떠한 인간적 인과관계도 없었다.’

고요한 동굴 속에서 오로지 종유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튀는 소리만이 들리는 가운데 아딘은 전진하고 또 전진했다.

‘하지만 날 고문한 순간부터 유리 콘스탄틴과 나 사이에는 원한이 성립됐고, 날 구출한 순간부터 안톤과 나 사이에는 은혜가 성립됐다.’

아딘은 이내 달리기 시작했다.

드넓은 동굴 벽과 천장에 그의 발소리가 닿으며 이내 메아리를 만들어냈다.

마치 누군가가 쫓아 오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으며 아딘은 달리고 또 달렸다.

‘원한과 은혜는 마땅히 갚아야지. 이 세계에 빙의한 원인과 이유를 찾는 건 그다음이야.’

김현수를 향해 갑질을 하며 언어폭력을 가했던 진상 고객에게 징역형을 안겨주고 손해배상을 받아내기 위해 노력했을 때처럼, 아딘의 눈동자는 강렬한 열망으로 불타고 있었다.

* * *

왜 나는 이 세계에 빙의돼 이 고생을 하는 걸까?

왜 나는 아딘 콘스탄틴이 돼 팔자에도 없는 고문을 당하고, 목적지 없는 도주를 해야 하는 걸까?

100골드, 즉 350만 원 수준의 금화를 들고서 난 도대체 앞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질문에 두루마리는 답해주지 않았다.

그랬기에 나는 한동안 버려진 신전에서 멍하니 상반신 절반이 사라진 신상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마냥 좌절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금수저 진상 고객의 갑질과 언어폭력에 법정 소송을 준비할 때, 많은 사람이 김현수를 말렸다.

직장 동료는 물론 상사부터 부모님까지.

금수저에게 법으로 싸움을 걸어 봐야 이길 가능성이 적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였다.

그리고 그것은 꽤 현실적인 이야기였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간 모은 돈을 쏟아부어 변호사를 고용했고, 녹음 파일과 매장 CCTV 녹화 파일을 바탕으로 소송을 진행했다.

금수저 측으로부터는 회유와 압박이 동시에 왔다.

거액의 합의금으로 날 회유하고자 했고, 백화점과 브랜드 본사에 압박을 넣어 내가 직장을 그만두게까지 만들었다.

하지만 나는 굴복하지 않았다.

그리고 7개월간의 지루한 법정 공방 끝에 나는 금수저에게 징역 1년의 실형이 떨어지게 하는 데 성공했다.

기자 친구와 훌륭한 변호사, 공명정대한 판결 그리고 나의 끈기가 만든 쾌거였다.

그들이 주겠다고 회유책으로 썼던 합의금은 민사상 손해배상 판결로 다 받아내기까지 했다.

김현수는 그랬다.

포기하지 않았다.

온갖 어려움이 닥쳐도 끝끝내 이겨냈다.

그렇다면 아딘 콘스탄틴이라고 못할 건 없지 않을까?

김현수가 끈기로 금수저를 감옥에 보냈듯, 아딘은 끈기로 유리 콘스탄틴을 지옥으로 보낼 것이다.

반드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생각을 하며 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광명력 991년 12월 5일, 난 다시 힘을 냈다.

기운을 차리고, 원한과 은혜를 힘으로 삼아 말을 타고 엘프숲 외곽을 우회해 샤펠 제국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샤펠 제국의 남쪽, 슈드 자치령으로 내려갔다.

슈드 자치령 최남단 약초숲.

내가 맥거핀으로 남긴 3대 신물 중 하나인 불칸의 갑옷이 있는 곳.

그곳이 내 목적지였다.

* * *

동굴은 낮과 밤의 구분이 없다.

그랬기에 아딘은 동굴 속에서 흘러간 시간이 얼마나 되는가를 인지하지는 못했다.

단지 중간에 잠을 두 차례나 더 자야 했고, 주기적으로 배가 고픈 것을 기준으로 하여 대략 사흘 정도가 흘렀지 않았나 하고 추론할 따름이었다.

동굴에는 모든 것이 존재했다.

빛, 열, 물 그리고 음식까지.

비록 물은 천장 종유석에서 떨어지는 것이었고, 음식이라곤 투구뿔버섯 뿐이었지만, 그런대로 육체가 건강을 잃지 않을 정도는 됐다.

문제는 정신이었다.

사방이 꽉 막힌 공간에서 홀로 걷다가 뛰었다가 다시 걷기를 반복하는 것은 정신적으로 굉장한 스트레스를 가져왔다.

하지만 아딘은 그것을 극복하려 노력했다.

가끔 걷다가 힘들어 지치면 잠시 멈춰 물기가 덜한 곳에 앉아 숨을 돌렸다.

그때 그는 머릿속으로 계속해서 자신이 아딘 콘스탄틴에 빙의한 이유나 유리 콘스탄틴에 대한 원한, 안톤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을 떠올리기보다는 노래를 부르거나 두루마리를 펼쳤다.

홀로 닫힌 공간에서 생각만 많아지면 우울증을 비롯한 각종 정신질환에 시달릴 수 있다는 것을, 이미 김현수로 살던 시절에 겪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결정은 제법 합리적이었다.

자기가 자주 부르던 한국 가요나 미국 팝송을 부르고, 두루마리를 펼쳐 자신이 만들어 둔 이 세계의 기본적인 설정들 - 예컨대 벨로디나 왕국의 체제와 주요 국가들의 상태 및 주요 지역들의 상태 그리고 3대 신물에 관한 정보를 보는 것은 그를 자기 파괴적 상념으로부터 지켜줬다.

“허…… 허허……”

덕분에 마침내 아딘은, 제법 멀쩡한 정신 상태로 목적지에 도착하게 됐다.

높이는 어림잡아 100m, 좌우 넓이는 어림잡아 30m에 이르는 거대한 기둥 5개가 거대한 지붕을 지지하고 있었다.

기둥 너머에는 가로 50m, 세로 10m에 이르는 제단이 있었다.

그리고 그 제단 너머로는 높이 50m의 거대한 신상이 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아딘은 떨리는 손으로 두루마리를 꺼내 펼쳤다.

두루마리 위로 신전의 그림과 설명문이 나타났다.

<불칸의 신전>

<근면의 신 불칸이 아주 오래전에 만든 신전이다.>

<제단 앞에서 불칸을 향해 3차례 절을 하며 진심으로 기도하면 불칸과 만날 수 있다.>

아딘은 두루마리를 말아 품에 넣었다.

그리곤 경건한 마음으로 천천히 신전을 향해 걸어갔다.

신전 구조물 자체가 워낙에 거대했기에 가까운 것처럼 보였지만, 제법 거리가 됐다.

그 상당한 거리를, 느린 걸음걸이로 아딘은 걷고 또 걸었다.

자신이 만든 세계에서, 대중적으로 숭배되는 신을 향해 간절한 마음을 담아 아딘은 걷고 또 걸었다.

김현수가 살던 세계에서 신 혹은 그에 필적하는 존재는 직접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고, 그랬기에 실존 여부에 대해 왈가왈부가 심했다.

하지만 이곳, 아딘이 사는 세계는 신 혹은 그에 필적하는 존재는 강렬하게 자기 자신을 드러냈다.

성직자의 신성력이란 힘을 통해서 그들은 인간 세계에 간섭하고, 자신의 실존을 증명했다.

그리고 그것은 김현수가 만든 설정이다.

‘나는 여기서 창조주로서의 권리나 지위를 요구할 생각은 없습니다. 인간에게 길이와 무게, 부피를 측정하는 단위를 가르쳐 준 신이 되게 해 준 은혜를 갚으라 할 생각도 없습니다.’

신전을 지붕을 받치는 기둥을 지나서 거대한 광장과도 같은 신전 내부에 들어선 아딘은 양손을 모은 채 불칸 신상을 올려다보며 기도했다.

‘당신에게 다시 날 김현수로, 내가 살던 세계로 돌려보내 달라고 요구할 생각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에겐 그럴 힘이 없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칸을 비롯해 천계의 신들은 모두가 김현수의 창작물이었다.

그랬기에 아딘은 불칸은 물론 천계의 신들 가운데 그 누구도 자신을 본래 세계로 되돌아가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돌아갈 방법은 내가 찾을 겁니다.’

어느새 아딘은 거대한 신상과 제단 앞에 섰다.

거대한 제단 앞에서 아딘은 천천히 무릎을 꿇고 불칸 신상을 향해 절을 했다.

‘다만 이 세계에서, 아딘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아딘의 원한과 은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선, 당신을 비롯한 신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1차례 절을 한 다음 아딘은 몸을 일으켰다.

경건한 마음으로 그는 다시 절을 했다.

그리고 마지막 절을 한 후 그는 한동안 엎드린 채 일어나질 않았다.

‘당신의 창조주이자 당신들의 피조물인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간절한 마음으로 아딘은 기도했다.

3대 신물.

그것이 맥거핀이 되는 것.

그게 김현수가 만든, 5부작 60권에 달하는 소설의 내용이자 이 세계의 운명이었다.

그 운명대로라면 3대 신물은 결단코 세상에 나타나서는 안 됐다.

하지만 지금, 아딘은 이 세계의 창조주이자 피조물로서 그 운명을 뒤틀길 원하고 있었다.

한동안 아딘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10분 정도를 그 자리에 엎드려 기도하던 아딘은 자신을 향한 시선을 느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는 볼 수 있었다.

거대한 불칸 신상이 물끄러미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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