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224)
어처구니없다는 시선을 보낼 거란 예상과 다르게 그들은 의외로 담담했다.
생각해 보자 이유는 간단했다.
여기서 저들에 대해 제일 정통할 사람은 나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 애초에 그와 관련된 문건이 있다 발표한 것도 나고, 밝힌 것도 나니까.
“당연히 전부 밝히지 않았을 거란 예상은 해 뒀지. 문제는 그게 우리한테 좋은 일이냐 나쁜 일이냐야.”
칼페온 왕국 대마법사단장. 8성급 중에서도 최상위인 에델린 스타이크가 톡톡, 책상을 두들기며 나에게 말했다.
“굳이 유리한 방어 포지션을 관두고 공격에 나서자 하는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겠지? 어디 한번 설명해 보게.”
“이번에는 세 왕국의 본토가 공격받게 될 겁니다.”
나는 재빨리 본론부터 꺼냈다.
“……우리 본토를? 어떻게?”
“저 문에는 공간이동 기능이 있으니까요.”
생각도 못 한 일인 듯 에델린 스타이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럴 리가! 공간 이동 자체도 말이 안 되지만, 설사 가능하다 해도 저렇게 거대한 물체가 움직이는 건 더더욱 불가능해!”
“저렇게 거대한 물건이 차원을 연결해 주는 건 말이 되고요?”
“그건 다른 차원의 문젤세! 아직 능력이 부족할 뿐, 우리도 언젠가는 가능할 기술이지.”
그런가?
아무래도 마법사 관점에서 보기에는 차원을 이동시켜 주는 문보다 공간 이동이 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 모양이다.
당연히 전자가 더 어려워야 하는 거 아닌가 싶지만…… 뭐, 굳이 파고들 만한 얘기는 아니지.
그래도 의문은 풀렸다. 저 똑똑한 녀석들이 이런 가능성은 왜 염두에 두지도 않나 궁금했었는데, 저런 사정이 있던 모양이다.
“기술적 문제야 어떻든, 저는 과거 기록을 보고 얘기할 뿐이에요.”
“그럼 당연히 그 과거 기록이 잘못된…….”
“만약 그랬다면 지금 저희가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지요. 에델린 스타이크.”
아르곤 왕국 대표, 4검 중 최선두인 아브람 네이션이 끼어들어 말했다.
“애초부터 그 문건이 상당히 신뢰성 있다 판단하고 보낸 지원군이 아닙니까. 저도 마법 기술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일단 기록된 사안에 대해선 최대한 믿는 것이 현명할 거 같은데요.”
“흥, 애초에 그 기록이란 걸 직접 읽은 건 저자뿐이지 않나. 저게 만약 꾸며 둔 말이라면 어쩔 거지?”
“그런 걱정이라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번에는 내가 끼어들어 말했다. 그러자 에델린 스타이크가 언짢은 듯한 얼굴로 내게 시선을 돌렸다.
“이유는? 아니, 증거는?”
“일단 이유는 제가 이런 거짓말을 친다고 해서 딱히 얻을 이득이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증거는…… 저들이 지금 저렇게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 바로 그 자체죠.”
이들도 한편으론 이상하다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손해가 크다 해도 적들이 지금 굳이 퇴각할 이유가 없으니까. 돌아가 봤자 보급할 자원도, 돌아서 공격할 루트도 없지 않나. 차라리 지금 좀 손해를 보더라도 끊임없이 공격하는 게 낫다.
애초에 그런 의심이 들었으니 지금 이렇게 회의까지 하고 있던 것이겠지.
저들이 후퇴가 아니라 진격을 하고 있다는 것을 납득시키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거다.
* * *
예상대로 공격대를 꾸리는 건 생각보다 빠르게 끝났다.
물적 증거는 없었지만 정황 증거가 있었으며, 무엇보다 그게 사실이 아닐 경우보다 사실이었을 때 줄 피해가 극심하다는 걸 모두가 받아들인 덕분이다.
문제는 간다고 해도 ‘문’이 이동하는 걸 어떻게 막느냔 것이었는데…….
‘그건 자네만 알고 있는 문제였으니 자네가 알아서 책임지게.’
……그렇게 됐다.
공도 과오도 전부 나한테 집중되는 원맨쇼라고 해야 하나.
아마 내 생각이 무엇이든 성공할 확률이 낮다고 보았기에 내린 결정이었겠지. 나를 버림 패로 쓰려는 거다. 만약 이런 사실을 알았는데도 손 놓고 있었다면 분명 나중에 책임 추궁이 들어왔을 테니까.
해방 왕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라는 걸 설명해서 그런가. 괜히 겁먹기는.
아무튼, 전화위복. 임무의 위험성만큼 성공한다면 그만큼 보상을 나 혼자 독식할 수 있는 구조다.
이 사실을 일부러 숨긴 것도, 1기사단을 몰래 감춘 것도 대충 무마할 수 있겠지.
게다가 ‘문’을 고정시킬 수 없다면 인류 멸종은 예정된 수순이나 마찬가지니 딱히 실패했을 경우를 대비할 것도 없다. 어차피 책임을 물을 사람도 다 뒤진 후일 테니까.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진격할까요?”
대충 생각을 정리하고 있자니, 기사 한 명이 다가와 내게 그렇게 말했다. 나는 잠시 고개를 저어 상념을 털어 내고 내 명령만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담담하게 답했다.
“진격.”
쿵. 쿵. 쿵.
이 세계 군사제도의 장점이라고 한다면 바로 일반 병사들이 없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게, 마력도 사용하지 못하는 병사는 거추장스럽기만 하니까. 죽창 들려 줄 돈도 아깝다는 거다.
덕분에 군대 자체는 현대보다 훨씬 전문화되어 있었는데, 서로 다른 나라의 병력들이 모인 상태임에도 금세 호흡을 맞췄다.
기사고 신관이고 마법사고 할 것 없이 줄 맞춰 행진하는 모습을 보니 꽤 장관이다. 군부독재 국가의 정점이라도 된 기분이랄까.
아무튼, 그렇게 한참을 걸어가고 있다 보니 어느새 적들의 후미가 보였다. 세상 지친 표정으로 걸어가고 있던 그들은 우리를 보더니 세상 잃은 얼굴로 바뀌었다.
“지금부턴 적들을 뚫고 가죠. 다만, 항복하는 적들을 굳이 건들 필요는 없습니다.”
“예!”
언제나 그렇듯, 지금 최전방엔 우리 쪽 최고 전력을 몰아넣은 상태였다. 후퇴하는 패잔병들쯤은 학살이 가능하다는 거지.
덕분에 우리는 그냥 걷던 때와 별 차이 안 나는 속도로 계속해서 진격해 갈 수 있었다.
오히려 항복하는 녀석들을 살짝 제압해 두는 과정에 시간이 더 오래 끌릴 정도.
근처를 살펴봐도 우리 앞을 막을 만한 강자는 보이지 않았다.
하긴, 저들 대신에 앞장서 싸울 만큼 인정 넘치는 녀석이 저쪽에 존재하지도 않겠지만.
나는 안심하고 ‘문’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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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경하시겠습니까?]
위치를 뜻하는 포지션과 고정을 의미하는 픽스의 합성 코드.
해방 왕도 불가능한 작업을 해결할 수 있는, 나만의 능력이었다.
과연 상상하는 모든 게 가능할 거란 예전 예상은 틀리지 않았단 거다. 이래저래 제약이 있기는 하지만.
“…….”
사실 원래 생각대로라면 ‘문’을 고정시키는 건 지금이 아니었다.
예전 타냐와 함께 처음 이곳으로 왔을 때 이게 가능한 계획인지를 확실히 확인해 보고 될 수 있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고정시켜 버리는 것이었지.
하지만 문제는 역시 포인트.
아직 열리지 않은 문을 고정시키는 건 무려 20만 포인트가 소모됐다.
아무리 내가 노가다를 뛴다 해도 모으는 게 불가능한 수치. 대륙에 남아있는 재앙 전부를 해치운다 해도 벌 수 없는 금액이었다.
결국 떠올려 낸 게 바로 ‘조건’이다.
문은 열리는 이후부터 오히려 저항력이 약해진다는 설정을 순간 기억해 낸 것이다.
그리고 그 예상은 그대로 적중해서, 문이 열리는 당시엔 요구 포인트가 10만까지 줄어들었다.
여전히 내게 없는 액수란 건 마찬가지였지만, 아직 희망은 남아 있었다.
문의 개방 유무 말고도 포인트를 절약할 수 있는 조건은 남아 있었으니까.
대표적으론 문이 배출해 내는 적들의 수.
적들이 그곳을 향해 나올 때마다 요구 포인트가 점점 줄어들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회복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지금은 그 속도보다 저들이 뽑아내는 속도가 더 빠르니 그다지 상관없었고.
그렇게 본대까지 옮겨왔을 때의 기준이 총 3만.
그리고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포인트가…….
[현재 포인트: 15,000]
참고로 이것도 많이 는 거다. 이번에 침략해 온 저놈들 해치우면서 포인트가 증가되기도 했으니까.
다만, 역시 문을 고정시킬 만한 액수는 되지 않아서 세 번째 조건까지 충족시켜야 하긴 했다.
바로 거리.
내가 문에 가까워질수록 내가 녀석의 코드를 변경하는 것도 쉬워진다는 거겠지.
“끄으윽…… 푸, 푸 타카!”
“스렌더! 스렌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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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경하시겠습니까?]
어느덧 문과의 거리는 점점 더 가까워져서, 어느새 눈에 보일 만한 속도로 요구 포인트가 떨어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무난하게 1만 5천 포인트 부근까지 도달할 수 있겠네,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이런 변방의 무지렁이 새끼들이 어딜 감히…….”
“얼른 해치워 버리고 복귀하죠. 저런 노예 새끼들이 얼마나 죽든 무슨 상관이라고 우리까지 보내는지…….”
매끄러운 통역 마법. 이차원 출신의 강자들이라는 걸 알려 주는 증명 같은 거다.
나는 황급히 그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젠장, 1급 경지의 기사만 열. 심지어 그걸 뛰어넘은 초월자까지 셋이나 있다. 우리 쪽엔 아이언이랑 리카르도 둘뿐인데.
저런 새끼들이 X밥들 앞에 보내 놓고 여태껏 뒤에서 뒷짐만 쥐고 있었다 이거지…….
새삼 저쪽 세계 구조가 얼마나 뒤틀려 있는지 실감 난다. 여기선 상당한 강자 취급받는 3급까지도 벌레처럼 여겨지는 곳이니.
그나마 문의 한계 때문에 저런 놈들을 마구 보낼 수 없어서 다행이다.
“…….”
아무튼, 지금은 이런 한가한 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아까와는 상황이 역전된 판이니까.
나는 일단 아이언과 리카르도에게 초월자 셋을 맡기고, 앞장서 길을 뚫었다.
문이 이곳을 벗어나는 순간, 상황은 돌이킬 수 없게 될 테니.
“사, 살려줘! 1급! 1급이다!”
“끄아악!”
적들의 비명으로 가득 찼던 통로는, 이제 우리들의 것으로 대체되었다.
그럼에도 문과의 거리는 점점 좁혀져 갔다. 그들의 희생을 발판 삼아 앞으로 나아갔으니까.
만약 다른 왕국의 지휘부들이 왔으면 이것보단 상황이 나았을 텐데.
이래서야 우리가 저쪽을 욕할 처지도 못 되겠단 생각이 문득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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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경하시겠습니까?]
그래도 이제 별로 안 남았다. 앞으로 5천 포인트만 더 줄이면…….
그때였다. 내 옆으로 신형 하나가 부딪혀 온 건.
쿠우우웅!
“단장님!”
“커헉.”
만신창이가 된 모습으로 버티고 선 건 바로 리카르도였다. 힐끔 보니 아이언이 초월자 둘을 상대하는 중이었고, 리카르도는 나머지 하나와의 싸움에서 밀려난 듯했다.
“젠장맞을 세계. 500년 전부터 그랬지만, 대체 어디서 저런 놈들이 계속 나오는 거야? 여기 진짜 변방 차원 맞나?”
그 순간, 리카르도와 싸우던 상대인 듯한 남자가 툭툭 옷을 털며 가까이 다가왔다.
“어이, 이만하면 됐잖아. 그냥 순순히 투항하라고. 지치지만 않았으면 나랑 비슷했을 실력 같은데, 그 정도면 우리 쪽에서도 엄청 대우해 준다니까?”
그 말에 리카르도가 말없이 상대를 노려봤다. 그럴 생각은 전혀 없다는 것을 표정으로 증명이라도 하듯이.
“……아, 그래. 뭐 그렇게까지 저항이 심하면 우리도 어쩔 수 없지.”
남자는 퉤, 하고 침을 뱉더니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어차피 후환이 될 거 지금 처리하는 수밖에.”
구구구궁!
온 사방에 진동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SG-0에 5,000포인트를 투자하셨습니다.]
[일시적으로 혼원력의 기운이 극대화됩니다.]
나는 남자를 공격째 삼켜 버렸다.
콰아아앙!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소멸해 버린 녀석의 자리. 각혈을 통하던 리카르도가 나를 경악한 눈으로 바라봤다.
“……자네 대체 어떻게…….”
“얘기는 나중에 하죠. 지금은 따로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믿기 힘든 업적! / 「초월자 사냥」]
[당신은 최단 시간에 초월자 등급의 인물을 ‘사냥’해 냈습니다!]
[믿을 수 없는 업적을 이루어 낸 당신에게 포인트 5천 점이 부여됩니다!]
조삼모사도 아니고, 무슨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냐?
나는 리카르도에게 대꾸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앞으로 몸을 박찼다.
아무리 지금 능력이 극대화되었다고 해도, 한정된 시간에 불과했으니까. 여기서 발목이 잡혔다간 목적을 이룰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내가 일을 끝마치고 올 때까지 다른 이들이 버티길 바라는 수밖에.
다행히 저들도 최중요 전력을 더 보낼 생각은 없었던 듯, 이어지는 방해는 없었다.
그렇게 후퇴하는 녀석들의 머리를 짓밟으며 지나가길 한참. 정신없이 문을 보았을 땐, 드디어 내가 코드를 변경할 수 있는 수치에 도달해 있었다.
[PT-Fix-N] -〉 [PT-Fix-Y]
[코드 변경에 15,000 포인트가 소모됩니다]
[변경하시겠습니까?]
망설일 틈은 없었다.
나는 곧바로 메시지에 수긍했고,
[15,000포인트가 소모되었습니다.]
[PT-Fix-Y]
[변경이 완료되었습니다.]
이내, 이 게임의 최대 골칫거리를 해결하는 데 성공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