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의 코드가 보여-223화 (223/225)

너의 코드가 보여 (223)

“프라에 구콰타! 푸 타카!”

“크아아악!”

내가 온갖 쌩쇼를 하며 난리칠 때는 주춤거리기만 하던 적들이 아이언이 벌인 짓을 보자 곧장 쏜살같이 도망가기 시작했다.

안심되면서도 조금은 자존심 상하는 광경이었지만, 이내 순순히 수긍했다. 나도 몸 상태 정상이었으면 저 정돈 가능했을 테니까. 아니, 진짜로.

게다가 쟤들이 가면서 남기고 간 말도 나름의 위안을 줬다. 구콰타. 몇 알아듣지 못하는 저쪽 세계 말이었는데, 분명 욕을 뜻하는 단어였다.

아까 추측했던 상상과 합치면 대충 괴물 새끼란 말이겠지.

설령 극찬에 가까운 얘기일지라도 별로 듣고 싶은 소리는 아니었다.

아무튼, 그렇게 속으로 궁시렁거리고 있자 아이언이 퉁명스런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진짜 그냥 가란 뜻인가 보네. 쟤네 곧 다시 돌아올 텐데, 나 없이 막을 자신 있나 봐?”

얘는 무슨 초딩도 아니고, 이 상황에 저런 말을 진심으로 하는 건가?

기가 차서 한 귀로 흘리려는데, 순간 아이언이 진짜로 발걸음을 돌렸다. 시위가 아닌 듯 다리에는 마력까지 담고 있다.

망할 자식.

나는 당황해서 재빨리 그를 붙잡았다.

“그럴 리가요 스승님. 제자 어찌 스승님의 도움도 없이 대업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너무 과장된 말투는 또 별론데.”

“이왕 온 거 그냥 도움 좀 주시죠? 어차피 돌아가 봐야 할 일도 없으시면서.”

“그렇다고 너무 건방진 태도도 별로야.”

“…….”

좀 정도껏 해라 새끼야.

내 시선에서 그런 감정을 읽어 냈는지, 아이언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래도 일단 넘어가 주지. 딱히 스승 대접할 필요 없다고 한 건 나이기도 하니까. 그보다…….”

말꼬리를 늘린 그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다 피식 웃었다.

“너 실력 많이 늘었다? 위에 있는 놈들한테 능력 쪼가리 받은 건 별로 마음에 안 들지만, 그거 때문에 본신 단련을 게을리한 건 아닌 거 같으니 굳이 문제 삼진 않겠어.”

위에 있는 놈들한테 받은 능력. 아마 키탄의 권능을 얘기하는 걸 거다.

이상한 일이었다.

지금은 물론 후반 시점에서도 아이언에겐 상대의 사도 유무를 알 수 있는 능력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어떻게 안 거예요? 소문이랑은 동떨어진 곳에서 살고 계신 걸로 아는데.”

“아, 얼마 전에 하던 수련에 조금 성과가 있었거든.”

내 질문에, 아이언은 정말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했다.

“……거기서 경지가 더 늘었다고요? 대체 어떻게요?”

“전에 너 가르쳐 줄 때 있잖아. 그…… 뭐지?”

“무영검이요?”

“아, 그래. 그거.”

아이언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솔직히 네가 그거 익힐 확률을 꽤 낮게 보고 있었는데, 얼마 되지도 않아 얼추 따라 하는 거 보니 오랜만에 좀 자극이 되더라고. 그래서 한동안 빡세게 수련을 했지.”

“…….”

그런 이유로 그사이에 경지를 넘는 게 가능한 일인가 싶다. 그렇다고 말하는 당사자가 아이언이니 안 믿을 수도 없고.

게다가 저 얘기대로라면 나한테 무영검을 가르쳐 주다 갑자기 훌쩍 떠나 버린 것도 이해가 간다. 딱히 납득은 안 가지만.

아무튼, 오랜만에 나온 희소식이다.

안 그래도 괴물 같던 인간이 더 괴랄해져서 나타났다는 거니까.

나는 아이언에게 입구 하나를 통째로 맡겨 버린 뒤 다른 사람들과 같이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그사이, 반가운 얼굴들도 속속들이 도착했다.

“계약하고 처음 맡는 일이 세상 구하기라니. 이건 너무 과중 업무 같은데…….”

“사형은 양심이 있으면 그동안 받아먹은 월급 생각 좀 해 봐요.”

동방 출신의 미르와 서율에서부터.

“리안 형, 앞으로 몇 명이나 남은 거예요?”

“이런 일이 있는데 우리를 빼놓으면 안 되지.”

이제는 어엿한 성인이 된 카일과 청년 티를 벗어 내고 있는 라이놀까지.

전부 내가 나중을 위해 안배해 놨던 인물들이다.

“……여기까진 어떻게 왔어요?”

“어떻게 오긴 뭘 어떻게 와. 사정 아는 애한테 안내해 달라고 해서 왔지.”

어느새 오랜만에 보는 다린도 다가와 있었다. 그 뒤에는 어색한 표정의 혹을 하나 매달고서.

나는 다린의 뒤로 몸을 감추는 타냐를 살짝 노려봐 주며 입을 열었다.

“별로 빼놓으려 마음먹고 그랬던 건 아니에요. 만약 여기 일이 실패했을 시, 아니면 성공해도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을 시 위에서 남아 후일을 도모할 사람들도 필요하다 생각했을 뿐이죠.”

“대륙의 전력 대부분을 여기 집중시켜 놓고 후일을 도모해? 꽤 여유로운가 보네.”

라이놀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그 말과는 반대로 전혀 여유롭지 않았지만, 그보다는 그 앞의 문장에 신경이 쏠렸다.

“대륙 대부분의 전력이요?”

“그래. 우린 세 왕국의 지원이랑 같이 도착한 거거든.”

지원이야 원래도 오겠지 했다. 세 왕국으로서도 이곳에서 저들을 막는 게 최선이라는 걸 충분히 알고 있을 테니까.

문제는 시기와 규모였지.

예상보다 조금 늦게 도착하긴 했는데, 대체 얼마나 끌고 왔기에 저런 말까지 하지?

그런 생각으로 고개를 돌렸던 나는 그만 경악하고 말았다.

“…….”

1급 기사 수준의 아르곤 왕국 4검 중 3명. 마찬가지로 비슷한 경지의 칼페온 8성급 마법사가 2명. 게다가 연합은 얼마 전 만났던 루카르드를 포함해서 각 부족의 최고 전사들을 파견해 왔다.

아무리 이번 일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해도 결정하기 힘든 지원.

내가 생각했던 걸 훨씬 넘은 차원의 파견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혹시 왕국 수장들 머리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예요?”

“그렇지는 않고, 저기 미친개…… 아니, 그러니까 저분이 좀 힘을 쓰셨다나 봐. 대충 시늉만 하는 수준으로 보내면 자기 깽판 감당할 자신도 같이 갖춰야 할 거라 엄포를 놓았다나.”

……아이언이 그런 짓을 저질렀다고?

아까 보였던 유치한 모습을 생각하면 납득하기 어려운 말이다.

나는 멍한 얼굴로 라이놀이 가리키는 나의 스승을 바라봤다. 그는 하품을 하며 입구를 응시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눈빛만은 맹렬히 살아 있었다.

바포메트를 해치울 때도 보이지 않았던 진지한 얼굴.

“사실 조금. 아니, 다들 많이 놀랐던 일이지. 저분은 예전부터 온갖 기행을 벌인다고 악명…… 위명이 높았지만, 적어도 다른 왕국의 내정에 간섭하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최소한의 선은 지킨다고 해야 하나?”

“……그렇게까지 나온 이유는요? 그것도 얘기했어요?”

“글쎄. 그냥 소문일 뿐이긴 하지만…….”

어깨를 으쓱인 라이놀이 피식거리며 말을 이었다.

“아마 이번에 새로 받은 제자를 위해서라는 거 같던데? 세상은 둘째 치고, 그놈한테 도움 좀 줘야겠다고 말이야.”

* * *

잠시 퇴각했었던 적의 전력은 한 시간이 지났을 무렵에나 겨우 다시 진격해 왔다.

듣기로는 우리한테 품은 것만큼이나 뒤쪽에도 공포심을 가진 거 같다 했는데, 이유야 충분히 짐작이 갔다.

아마 본대의 지휘관급 존재들에게 본보기를 당한 것이겠지. 후퇴했던 인원들 전부 다.

수만 명 정도는 우습게 내칠 정도로 놈들은 능력이 부족한 자들은 인격체로 보지도 않았다.

그런 대접이니 연합의 이종족들도 목숨 걸고 이주해 온 거겠지만.

아무튼, 내가 그 장면들을 직접 본 게 아니라 그냥 남에게 전해 들은 이유는 간단했다.

나와 같이 싸우던 인원들은 모두 후방으로 빠져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 자다 깬 게 아니라 죽었다 살아난 듯한 느낌입니다.”

내가 한 말은 아니지만, 공감은 갔다.

나도 지금 딱 그런 심정이었으니까.

“나는 사실 아까 진짜 죽은 줄 알았어요.”

“리안 님이 대체 언제……. 아, 그자가 오기 직전에 말씀이십니까?”

“예. 어떻게 버텨서 간신히 서 있긴 했는데, 몸에 감각이 하나도 안 남은 상태였거든요. 이게 영혼이 몸을 빠져나가서 그런 건가 했지.”

내 말에 부단장 클라우스가 큭큭 웃었다.

“어떤 느낌인지 바로 떠오르는군요. 예전 동대륙 건너가던 중간에 저도 딱 비슷한 경험을 했었죠.”

“부단장님도 그때 맥이 탁 풀리셨나요?”

“아뇨. 저는 어차피 이제 듣지도 못하겠다 싶어서 단장님 욕을 크게 외쳤습니다.”

그것 참. 그 뒤로 고생이 많았겠다 싶다. 리카르도 그 양반이 아닌 거 같아도 은근 그런 거 마음에 담아 두는 경향이 있었으니까.

그에 비하면 나는 조용히 입 다물고 있어서 다행이지. 괜히 죽었다 생각하고 헛소리라도 지껄였다면 되돌릴 수 없는 일 아니겠나.

어쨌든 우리는 곧 일어난 다른 사람들과도 한참을 피식거리며 떠들다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기사가 세 왕국과 싸우던 적들이 갑자기 물러났다는 소식을 전해 왔기 때문이다.

“아이언 님께서 또 뭔가 하신 겁니까?”

“아니요. 이번에는 규칙적인 퇴각이었습니다. 지휘부에서 후퇴를 결정하고 물러나는 것 같더군요.”

그 말에 막사 내부로 큼지막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저 경험 많은 베테랑들도 기뻐할 만한 소식이었던 탓이리라.

하지만.

나는 조금 생각이 달랐다.

“그놈들 퇴각 규모는요?”

“예? 아, 몇 명이나 물러났느냐, 이런 말씀입니까?”

내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왕국 출신 기사가 설명을 이어 갔다.

“최전방에서 싸우고 있는 인원을 제외한 전부였습니다. 보통 후퇴 도중 일어나는 피해가 많아 그런 부대를 따로 자원 받아 추출하는 편이긴 한데…… 그들은 그렇지 않은 거 같더군요. 사실상 그냥 버린 겁니다.”

그 뒤로 기사는 비인도주의적이니 쓰레기 같은 놈들이니 한참 동안 성토해댔다.

하지만 사실, 기사의 말과는 정반대였다.

녀석들 답지 않게 인도주의적이었단 거지.

만약 재진격하기 위한 정비라면 놈들은 절대 아무도 후퇴를 시키지 않았을 테니까.

판단을 마친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러자 당황한 얼굴의 왕국 기사가 재빨리 따라붙었다.

“왜 그러십니까? 이제 전투도 끝났고, 아마 한참 동안은 잠잠할 테니 여기서 쉬어도 괜찮다는 상부의 전달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상부에서 뭔가 제대로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네요.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내 말에 기사의 걸음이 잠시 멈칫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 뒤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설마 그새 굴이라도 파서 저희 후방을 친다는 얘기는 아니시겠죠?”

“아무것도 없긴 뭐가 아무것도 없어요. 저기 버젓이 문 열려 있는 거 안 보여요?”

“저들 세계로 돌아가는 문 아닙니까. 저렇게 돌아가 주면 저희야 고마운 일이죠.”

그리고서 다시 되돌아올 수 있다는 게 문제지. 저 ‘문’의 가장 큰 걸림돌은 위치를 마음대로 옮길 수 있다는 거니까.

하지만 지금 내가 따질 만한 화제는 아니었다. 세 왕국에 저 사실을 알리지 않은 건 명백한 내 고의였기 때문이다.

만약 본인들 영토가 그런 식으로 공격당할 수 있다는 얘길 했으면 절대 지원을 보내 주지 않았을 것 아닌가. 그럼 남은 건 멸망밖에 없었겠지.

하여튼, 여기서부터는 생각해 둔 방법이 있었기에 당황할 필요 없었다.

나는 경례하는 기사들을 뒤로하고 곧장 지휘부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는 시선들을 무시하면서, 담담히 준비해 온 용건을 꺼냈다.

“지금 당장 방어를 멈추고 저들을 공격해야 합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