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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코드가 보여-222화 (222/225)

너의 코드가 보여 (222)

지금까지와 본대의 차이점은 출현 간격이 짧다는 것만이 아니었다.

가장 주축이 되는 부대인 만큼 당연히 그 규모가 어마어마했는데, 그 덕분인지 전과는 출현 방식에 조금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느릿느릿하네…….”

아리나가 턱을 괸 채 중얼거린 말처럼, 본대는 생각보다 상당히 느긋한 면이 있었다.

일단 행군하는 줄이 끊이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졌는데, 체력을 아끼기 위해서인지 다들 걸음 속도가 느린 편이었다.

전쟁 나온 군인보단 출근하는 직장인 같다고 해야 하나.

하긴, 아마 대부분이 억지로 끌려 나온 노예들일 테니 별로 틀린 말은 아니겠지.

아니면 정찰대와 달리 괴상하게 생긴 괴물보다 지성체 비중이 높아서 그렇게 느끼는 걸 수도 있고.

아무튼, 우리도 목숨 걸고 싸우는 일인 만큼 저들의 사정을 봐줄 여유는 없었다.

만약 패배하면 저들의 현재 모습은 우리의 미래 모습이 될 테니까.

나는 정비하던 장비를 거두고 입을 열었다.

“슬슬 준비하죠. 아까 출발했던 애들은 거의 다 온 거 같은데.”

내 말에 리카르도가 질린 듯이 중얼거렸다.

“……저들이 여기 올 때까지 거의 10시간은 넘게 걸린 거 같은데, 아직도 뒤에서 보충이 끊이질 않는군.”

“뭐, 정찰대 봤을 때부터 예상했던 일이잖아요.”

“그렇긴 하네만, 저 정도일 줄은 몰랐다는 거지. 게다가…….”

이어질 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설마 제국 1기사 단장 경력에 지성체가 있어 죽이기 껄끄럽다는 말은 아닐 테고. 그냥 저들 사이에 기사급이나 마법사가 있다는 걸 주의하는 거겠지 뭐.

그래도 상대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을 거다.

똑똑하다는 것은 장점이 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단점이 될 때도 많으니까.

그 점을 설명해 주려는데, 갑자기 누군가 큰 소리로 외쳤다.

“적들이 도착했다! 모두 기상!”

그 말에 곧바로 교대로 수면을 취하고 있던 사람들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속 이어지는 전투 탓에 얼굴에는 피곤이 가득하지만, 눈초리 자체는 맑고 또렷하다.

실력은 제쳐 두더라도 저것이 저들과 우리의 가장 큰 차이일 거다.

모두 자진해서 이 전쟁에 지원했다는 거.

나는 대견한 눈으로 그들을 한 번 훑어본 뒤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의욕 없지만 그래도 상관없을 만큼 강력한 군대가 우리를 향해 진격해 오고 있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문득 어쩌면 저 군세의 파도가 내가 이 세계에서 보는 마지막 풍경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여기서 죽으면 다음으로 보는 광경은 뭐가 될까?

키탄의 말대로 지구로 돌아가게 될까, 아니면 그냥 아무것도 없이 뇌가 정지하고 말까.

“…….”

답은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진 확실했다.

바로 죽든 살든 이번이 아마 마지막 싸움일 될 거라는 것.

나는 바닥에 침을 한 번 탁 뱉고, 검을 든 채 적들이 빠져나오는 입구로 달려들었다.

마치 거대한 자연재해에 맞서는 부나방이라도 된 것처럼 말이다.

* * *

“쉐미뤠크, 돈 마르 파!”

대체 뭐라는 거야 시X.

나는 알지 못할 소리를 지껄이는 엘프 기사의 목을 단칼에 베어 버리며 속으로 생각했다.

방금 죽인 녀석이 몇 번째였더라?

아마 4자리 숫자는 안 될 거 같고, 3자리가 넘은 지는 한참 지난 거 같다.

지성체를 죽인다는 죄책감은 카운트가 두 자릿수를 벗어나기 시작했을 때 이미 사라진 뒤다.

아니, 정확히는 다른 생각이 들 여유도 없었다는 게 맞겠지.

그도 그럴 게, 상대는 5급 이상의 기사 전력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적이 시퍼런 오러 머금고 달려드는데 동정심이 들 틈이 대체 어디 있겠나? 욕이나 안 나오면 다행이지.

“커헉!”

“후우…….”

아직 대륙에서도 만나 보지 못한 드워프의 수급을 취하며 짧게 호흡을 정돈했다.

미로의 입구에서는 계속해서 적들의 증원이 더해지고 있는 중이었다.

그에 반해 우리 쪽은 이미 지치다 못해 정신을 잃고 쓰러진 사람까지 있는 상황.

몇몇은 동료들이 간신히 회수해 지켜 내는 데 성공했지만, 또 몇몇은 그대로 수십 개의 칼에 꽂혀 목숨을 달리했다.

“…….”

나는 잠시 침묵하고 장내를 살폈다.

사실 처음 계획했던 건 이런 게 아니었다.

대충 만 명 가까이 죽으면 사기가 떨어진 저들이 알아서 물러날 줄 알았지. 지성이란 당사자에게 버티지 못할 공포심을 주기도 하니까.

심지어 난 애초부터 사기가 낮았던 적들이니 예상보다 쉽게 풀릴 수도 있겠단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적들은 전혀 그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예상외로 용맹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냥 내 경험 부족으로 인한 계산 착오 때문이었지.

문제는 바로 미로 때문에 적들의 시야 확보가 안 됐단 것과, 시체가 마석이 되어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는 점이었다.

시야 확보가 안 되니 앞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중인지 알 수가 없고, 시체가 쌓이질 않으니 몇 명이 죽어 나갔는지조차 눈치챌 수가 없다.

그런 이유들로 인해 저들은 겁먹지 않고 기계처럼 꾸역꾸역 앞으로 진격하고 있는 것이었다.

“……젠장.”

적들의 사기를 이용해서 전투를 유리하게 끌고 가겠단 생각까지 해 놓고 이런 꼴이라니.

순간 내가 너무 바보 같아서 무심코 한숨이 나왔다.

물론, 사실 미리 알았다고 해도 딱히 방법은 없었다. 미로를 만들어 적들의 진격을 늦추는 건 선택이 아니라 필수 사항이었으니까. 안 그랬으면 이렇게 후회할 틈도 없이 나는 이미 둥그런 마석이 되고 말았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뭔가 대책을 짜는 시늉이라도 할 수는 있었을 것이다.

확성기 마법을 준비해 앞쪽의 비명이 온 지하에 퍼지게 한다든가, 이쪽의 전력을 일부러 노출시켜 두려움에 빠지게 한다든가.

어느 쪽이든 치명적인 효과까지는 몰라도 유효한 심적 타격 정도는 먹일 수 있지 않았겠나.

뭐, 이제 와서는 전부 그른 얘기였지만.

마법사들을 보니 확성기 마법을 시전할 기력도 없어 보이고, 전력을 노출 시키자니 사실상 병자들뿐이다.

당장 써먹을 수 있는 방법은 아니란 거지.

“…….”

결국, 남은 수단은 하나뿐이다.

압도적인 힘으로 전선에 있는 적들이 두려워 도망치게 하는 것.

그리고 지금 이게 가능한 것은 나밖에 없었다. 리카르도는 아까 두 떨거지를 상대하며 기운을 많이 낭비한 상태였으니까.

나는 잠시 뒤로 물러나 실현 가능성을 한 번 점쳐 봤다.

솔직히 성공 확률 자체는 그리 낮지 않았다. 10프로 정도 될까?

하루가 지나며 사용할 수 있는 권능의 횟수도 초기화됐고, 기운도 마석 덕분에 비교적 온전히 보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러고 나면 내게 남는 것이 없다는 거지.

내가 아무리 무리를 해도 해치울 수 있는 건 많아 봐야 현재 전장의 절반 정도. 그 뒤로는 그냥 녹아웃이다.

만약 저들이 겁먹지 않고 진격한다면 그대로 끝이 날 수도 있다는 소리.

목숨을 건 도박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지만…… 뭐, 그전엔 안 그랬나. 처음부터 반쯤 내놓고 온 목숨인데.

나는 더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창조’의 권능을 발동했다.

“줘 프라에 수콰!”

“브라임 프라에!”

순간, 이계에서 온 적들이 하늘로 떠오른 흑철검을 보며 뭐라고 크게 외쳤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겉으로 드러난 표정만으로 안에 담긴 감정만은 추론이 가능했다.

경악. 그리고 두려움.

“크아악!”

나는 허공에 만들어 낸 흑철검들을 이용해 수십 명을 휩쓸면서 앞으로 발을 박찼다. 그리고 기운을 전혀 아끼지 않은 채, 검에다 모조리 쏟아부었다.

“프, 프라에!”

“프라에 수콰! 끄아아악!”

이제 프라에가 무슨 뜻인지 대충 짐작이 간다. 아마 괴물이라든가 악마라든가 하는 뜻이겠지.

만약 내가 상대였다면 그런 말을 내뱉고 있었을 테니 말이다.

스와악!

내가 아끼지 않고 밀어 넣은 검기는, 순식간에 앞에 있던 적들을 반쪽이로 만들어 버렸다.

대충 한 번 칼질에 백여 명.

사실 같은 혼원력으로 아끼며 썼으면 그 두 배는 처리할 만한 양이었지만. 그만큼 시선을 끄는 효과는 확실했다.

찰나에 전장의 분위기를 이쪽으로 모을 수 있었으니까.

“고분 프라에! 고분 프라에!”

“타카! 푸 타카!”

솔직히 방금 전까진 왜 쟤들은 통역 마법도 안 써 주나 답답했는데, 지금 와선 오히려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아무리 적이라도 나를 저주하고 두려워하는 말을 듣다 보면 그것도 나름 정신적 스트레스가 되었을 테니까.

“…….”

아무튼, 그렇게 기계처럼 썰어 가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슬슬 내 기운이 동나 가는 게 뼛속 깊이 느껴졌다. 허세를 부리려고 해도 그럴 힘조차 나지 않았던 것이다.

저 젠장할 새끼들. 대체 왜 아직도 후퇴하지 않는 거지? 내가 이렇게까지 나왔는데도 저쪽의 지휘관들이 더 무섭단 건가?

……어쨌든 이제 더 남은 방법이 없었다.

나는 마지막 발악으로 검을 땅에 꽃은 채 굳건한 척 섰고, 그게 통했는지 적들은 잠시 앞으로 진격하지 않고 주춤주춤 물러섰다.

그래도 내 수가 완전히 틀려먹진 않았단 거겠지. 결국 결과를 바꾸지는 못한 것 같지만. 이렇게 잠시 있으면 놈들도 내가 지쳤다는 걸 금방 눈치채고 달려들 테니까.

나는 피식 웃으며 두 눈을 꼭 감았다.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게 최소한 지구의 내 방이기를 소원하면서.

하지만.

“……?”

한참이 지나도록 나를 노려 오는 공격은 없었다. 마치 전쟁이 순식간에 끝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뭐지? 죽일 거면 이미 날 백 번도 넘게 도륙 냈을 시간일 텐데. 혹시 나는 진작 죽고 사후 세계에 와 있는 건가?

나름 신빙성 있어 보였다.

이 모든 것이 끝난 듯한 고요함은 내가 상상하던 죽음 뒤의 장면과 상당히 연관성이 있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한 나는 잠시 눈을 뜰까 말까 고민했다.

아무것도 없는 무의 세계에서 영원히 살아가는 게 사후 세계라면 솔직히 버틸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면한다고 피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내가 받아들이든 말든 처하는 현실은 다르지 않을 테니.

결국, 천천히 눈을 뜨고.

나는 보고야 말았다.

남아 있던 적들이 모조리 쓸려 나가 있는 광경을.

“…….”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순간 상황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에 이런 풍경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이 대체…….

“아.”

한 명이 있었다. 인간이란 말보다 괴물이란 수식어가 더 어울리는 녀석이.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이름을 조용히 중얼거리고 말았다.

“아이언…….”

“네가 지금 스승님 이름을 반말로 지껄인 거냐?”

익숙한 얼굴의 남자 하나가, 피식 웃으면서 내 앞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제자가 도와 달라기에 잠깐 와 봤건만, 영 되먹지 못한 놈이었네. 어때, 나 그냥 돌아갈까?”

혼자서 왕국의 불만을 잠재울 수 있는 최강 전력의 등장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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