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220)
그 말에 대답한 건 우리 쪽이 아닌, 녀석의 왼편에 서 있던 여자였다.
“그런 거야 아무래도 좋잖아요. 얼른 해치우기나 하죠. 위에서 이런 차원에 500년이나 끌었다고 욕을 얼마나 했는지…….”
“그래도 신기하긴 하잖아. 싸워서 이기는 거야 어떻게 했다 쳐도, 시체까지 감쪽같이 없애기엔 시간이 부족했을 테니까. 게다가 그때 그 괴물 같던 인간 하나밖에 없던 차원이라기엔 수준이 많이 높아진 것 같은데?”
남자가 어깨를 으쓱이며 답하자, 이번엔 그의 오른편에 있던 녀석이 앞으로 나섰다. 남잔지 여잔지 모를 중성적인 외모였다.
“그래 봤자 하등행성. 선봉장께서 굳이 대화를 나누고 싶다 하시면 말리진 않겠지만, 너무 질질 끌 시 추후 질책을 듣게 될 겁니다.”
“잠깐 대화만 하는 건데?”
“그 잠깐 이전에 500년의 시간이 있었다는 걸 잊지 마시길.”
“아, 알겠어. 알겠어. 하여간 잔소리만 엄청나게 한다니까.”
남자는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젓더니, 우리를 바라봤다.
“여긴 전부 진지 빠는 녀석들밖에 없어서 별로 얘기도 못 하겠다. 해서 미안한데…….”
나는 순간 멈칫했다.
설마 이 전개는…….
“일단 입 열 수 있는 놈 하나만 빼고 다 죽어 주라.”
“다들 피해요! 당장!”
녀석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외쳐봤지만, 내 말에 반응한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또다시 아까와 같은 사지 찢기는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지고, 열댓 명에 가까운 마법사와 사제들이 순식간에 쓰러졌다.
“크아아악!”
“어, 어째서 자동요격마법이……!”
바닥을 기며 경악하는 사제와 마법사들.
다행히 죽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 보였지만, 저대로 내버려 두면 죽은 것과 별다를 것도 없다. 빠르게 치료하지 않으면 전부 혈액 부족이나 쇼크로 죽을 테니까.
문제는 저 새끼들이 그럴 틈을 줄 리가 없다는 것. 게다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너 뭐야? 아까도 그렇고, 내 공격이 뭔지 알고 있어?”
바로 아까 그 남자 녀석이 나를 흥미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거다.
젠장. 사내새끼 관심은 사양인데.
아무튼, 나는 녀석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선봉장 오스카. 그리고 그 두 따까리들.
저쪽 세계의 지배계급에 해당하는 녀석들로, 아직 원리가 잘 알려지지 않은 차원 에너지를 사용하는 게 특징이다.
분명 원래 스토리에선 막간에 능그적 나오는 녀석들인데…… 왜 벌써 등장한 거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진 확실했다.
자칫하다간 여기서 다 조질 수도 있다는 거.
“리카르도 단장님.”
“……뭐지?”
“죄송하지만 저 양옆의 둘을 맡아 주실 수 있겠습니까? 가운데 남자는 제가 맡죠.”
리카르도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만큼이나 사태를 심각하게 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경지에 오른 뒤로 처음 겪어 보는 사태일 테니 어찌 보면 그러는 것도 당연한가.
어쨌든 그에게 이상한 느낌이 들면 당장 몸을 피하라고 조언하는데, 갑자기 오스카가 배를 부여잡고 웃었다.
“이봐, 지금 저 얘기 들었어? 저 자식이 날 상대한다네? 혹시 저기 굴러다니는 떨거지들을 믿는 건가?”
“뭐 착각하는 모양인데, 너랑 붙을 건 나 혼자다. 저기 사람들은 아무 연관 없어.”
내가 중간에 끼어들어 답하자, 녀석이 뚝 하고 웃음을 멈췄다.
“아, 그러시구나. 네가 나를 혼자 상대하시겠다?”
오스카는 어깨를 으쓱이며 피식거리더니 손가락으로 근처 부상자들을 가리켰다.
“내가 네 속셈 모를 줄 알고? 나랑 싸우는 동안 저 녀석들을 치료할 시간을 벌려는 거겠지. 그런데 가능하겠어? 10초 만에 누워 버리면 그냥 시체 하나 더 늘리는 꼴밖에 안 될 텐데.”
거 새끼가 말은 더럽게 많네.
더 길게 끌다간 죽을 사람이 나올 판이라, 나는 그냥 말없이 가운데 손가락을 올려 응답해 줬다.
이게 통할지 안 통할지는 나조차 확신이 없었지만, 저쪽 세계에서도 통용되는 욕인 듯 오스카가 순간 표정을 굳혔다.
“……뭐 좋아. 알면서도 넘어가 주는 일이란 것도 있으니까. 그럼―.”
오스카가 갑자기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어디 10초는 버티는지 한번 확인해 볼까?”
그러더니 들었던 팔을 휙, 내려찍는다.
누가 봐도 위에서 아래를 공격하는 듯한 모션.
하지만 저건 페이크로, 진짜 공격은 그 어느 방향도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내가 있는 이 ‘위치’ 자체를 공격하는 거라 봐야겠지.
나는 곧장 앞쪽으로 몸을 튕겼다. 그러자 뒤쪽으로 뭔가 섬뜩한 느낌이 스치고 지나갔다.
누가 보면 나 혼자 쇼라도 하고 있는 줄 알았을 것이다. 원래 있던 자리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자리를 벗어나는 것이 조금 늦었는지, 내 뒤꿈치에서는 이미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칼에 베인 듯한 날카로운 상처.
이번 공격은 검을 이용한 거였나?
내심 분석하고 있는데, 순간 목덜미에 우수수 소름이 끼쳤다.
“역시 내 능력이 뭔지 알고 있었잖아.”
재빨리 흑철검을 뒤쪽으로 후려쳤다.
하지만 그 공격은 그저 빈 허공을 통과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분명 방금까지 내 뒤에 있었을 녀석은 태평한 표정으로 원래 자리 있던 자리에 서 있었다.
“이상하네. 이쪽 세계에 비슷한 능력이 있다는 얘기는 못 들어 봤는데……. 야, 너 혹시 ‘예언가’냐?”
나는 녀석의 말을 무시하고 권능을 발동했다.
발동한 능력은 ‘붕괴’.
곧이어 오스카가 있던 공간이 일그러져 녀석 채로 집어삼켜 버렸다.
보통의 경우라면 저기서 살아 나올 방법은 없겠지만, 난 이미 알고 있다. 이런 걸로는 저 녀석을 죽일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목소리가 들렸다.
“……아, 그래 조금 비스무리해 보이는 기술이 있기는 했구나?”
원래 있던 장소 근처에서 등장한 녀석은, 피식 비웃음을 터뜨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영 비생산적으로 보이긴 하지만…… 뭐 쓸 만은 해 보이네. 인정할게. 그런데 설마 그거 생각하고 나한테 덤빈 건 아니지? 혹시 그런 거라면 생각 고쳐먹는 게 좋을걸.”
또다시 느껴지는 섬뜩한 느낌. 나는 바로 옆으로 몸을 피했다.
“내 능력은 그런 조잡한 것과는 차원이 다르니까.”
쿠웅!
오스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엄청난 폭발이 나의 몸을 감쌌다.
* * *
나도 모르게 쿨럭, 하고 기침이 나왔다.
젠장 맞을 새끼. 써도 좀 얌전한 걸로 쓰면 어디 덧나나?
속으로 불평해 봤지만, 눈앞은 여전히 연기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래선 녀석에게도 안 손해일 텐데?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연기가 순식간에 걷혔다. 그 즉시 보이는 게 저 녀석 면상인 건 기분이 별로였지만.
“이야, 방어력도 꽤 되잖아? 그거 나름 신경 써서 공격한 건데.”
말은 태평히 하지만, 시선에는 아까보다 명백한 경계심이 깃들어 있다.
나는 오스카의 말을 무시한 채 주변을 확인했다.
생각보다 깔끔한 게, 아마 폭발의 반경을 나한테만 향하도록 압축한 듯했다.
분명 게임에서도 나왔던 기술인데……. 그때 카일이 맞고서 중상을 입었었지 아마?
그에 반해 지금 나에게는 타격이 있었나 싶은 정도의 생채기밖에 없다. 그마저도 빠르게 회복하는 중이고.
내가 진짜 좀 강해지긴 강해졌구나. 거의 끝판 보스급인 녀석의 공격을 맞고도 이 정도에 그치다니.
감회는 나중에 즐기기로 하고, 오스카에 대해 알고 있는 걸 속으로 진단해 봤다.
일단 녀석의 능력은 굳이 따지자면 초능력에 가깝다. 물론 이론 말고 결과론적으로 봤을 때 얘기기는 하지만.
공격 방식은 염력으로 만들어 낸 물리력을 순간이동 시켜 상대 위치에 즉발시키는 것. 그리고 방어 방식은 순간이동으로 피하는 거다. 거기다 초감각 특성까지 달고 있어서 기습도 소용이 없다.
사실 상대가 얼마나 강하든 저 녀석을 붙잡거나 이기는 건 불가능하다는 소리다. 뭐든지 뚫는 창과 뭐든지 막는 방패의 합체 형태 같은 녀석이니까.
적들도 그걸 아니까 저런 또라이 녀석한테 선봉장 자리까지 맡긴 걸 테고.
그래도 굳이 따지자면 약점 아닌 약점이 있긴 한데…… 바로 오감을 마비시키는 거다.
능력을 사용하는 것도 결국 감각에 의존하는 거니, 시각 청각 등 전부가 마비되면 무능력자랑 다를 거 없다는 거지.
물론 이게 약점 아닌 약점인 이유는 간단하다.
어차피 공격이 안 닿는데 감각을 어떻게 마비시키겠나? 이론에 불과한 탁상공론이라는 소리다.
게임에서도 처리 방법은 수천 번의 시도 끝에 독살하는 게 다였다. 그동안 죽은 사람들이 수만 단위인 건 말할 것도 없고.
하지만.
“…….”
지금의 나라면 방법이 있었다. 녀석의 감각을 마비시킬 방법이.
그때, 오스카가 갑자기 나를 보며 비죽대기 시작했다.
“뭐, 일단 진짜로 10초는 넘게 버텼네. 칭찬해 줄게. 어차피 뒤질 놈들 되살려 놓느라 고생했어.”
“…….”
이번엔 뭐라 대꾸할까 하다가, 이상한 점을 하나 눈치챘다. 녀석은 내가 아니라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그곳으로 고개를 돌리고, 피식 웃었다. 거기에는 리카르도가 두 명을 상대로 우위를 점하는 중이었다.
그 둘은 별다른 능력 없이 단순히 강한 것이 전부였기 때문에, 이 대륙 최강자 반열인 리카르도에 비하긴 좀 부족했다.
“슬슬 쫄리나 보지?”
“……확실히 대단하긴 하네 저 늙은이. 만약 500년 전에 있었으면 많이 귀찮을 뻔했어.”
“지금은 아니라는 소리처럼 들리네.”
“그야 내가 여기 왔으니까.”
오스카는 다시 나를 바라보더니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저 늙은이가 얼마나 강하든 나는 못 이겨. 검이 행성을 반으로 갈라 버릴 정도가 아닌 이상에야.”
“자신감이 좀 과한 거 같은데.”
“사실인 걸 뭐. 아, 혹시 투항할 생각이면 받아 줄 수 있어. 여기도 알려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능력 있는 사람 상대로는 꽤나 너그럽거든.”
나는 잠시 고민하는 척을 했다.
“그건 좀 구미가 당기는데……. 혹시 투항하면 나도 그쪽 군부에 들어가는 건가?”
“오, 좀 흥미가 생겼나 봐? 아무래도 그렇게 되겠지. 가진 능력이 전투 쪽이니까.”
“그럼 직위는? 당연히 네 위겠지?”
“뭐? 하하하!”
오스카가 폭소를 터뜨리더니, 눈가에 맺힌 눈물을 감췄다.
“왜 그렇게 생각한 거야? 내 밑인 게 당연하잖아.”
“그야 늑대가 개 밑에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래서, 내가 개고 네가 늑대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스카는 기도 안 찬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조금 나대게 놔뒀다고 정신을 못 차리는 모양이네. 투항한다는 것도 거짓말인 거 같고.”
“그걸 이제 알았냐?”
내가 이죽거리자 녀석의 미간이 움찔거렸다. 농락당했다 생각한 거겠지.
그는 잠깐 고민하는 듯하더니, 더 이상 상대하기 싫다는 듯 말없이 손을 휘저었다. 아마 또다시 공격을 하려 한 걸 거다. 하지만.
“……어?”
오스카는 뭔가 이상하다는 듯 손을 몇 번 더 휘저었다. 그러고도 이상한 느낌이 사라지지 않았는지 괴상한 얼굴을 했다.
그럴 수밖에.
지금 녀석에게는 ‘촉각’이 사라진 상태일 테니까.
나는 녀석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대상의 촉각을 일정 시간 봉인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총 2,000포인트가 소모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감각을 없앨 수 있다는 건, 분명 녀석의 세상에서도 몰랐을 거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