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217)
나중이야 어쨌든, 그것도 당장의 문제를 해결하고 나서야 생각할 일이다. 괜히 이렇게 폼 잡아 놓고 깔끔히 멸망했다 하면 진짜 우습지도 않으니까.
그렇게 추후 논의를 시작하려는데, 노크와 함께 남자 하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지하 연락을 담당하고 있는 직원이었다. 그는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말없이 보고서 한 장을 놓고 황급히 사라졌다.
바쁘긴 엄청나게 바쁜 모양이지. 평소엔 꼬박꼬박 존대하던 양반이었는데.
나는 별로 개의치 않고 곧바로 그걸 펼쳐 살폈다. 그리고 잠시 후,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궁금증을 참지 못한 듯 말을 걸어왔다.
“뭔가 변동사항이라도 있나?”
“네. ‘문’에 적용하려고 마탑에 의뢰해 준비해 뒀던 결계가 어느 정도 효과를 보고 있다네요. 완전히 열리기까지 시간을 좀 번 것 같아요.”
내 말에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화색을 띠었다.
“그거 간만에 희소식이군. 그래서 얼마나 억제할 수 있는 건가?”
“열흘이요.”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수십만 골드가 들어간 일인데, 겨우 열 밤 밖에 못 벌었다는 거니까.
하지만 어떤 사건이든 초반 대응이 가장 중요한 법. 이 열흘이라는 시간이 황금과도 같다는 건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거다.
테이어 테르베로츠도 그를 생각했는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괜찮군. 적어도 도시의 전력을 끌어모으기엔 충분하겠어.”
“네. 그리고 혹시 이번에 저랑 대련했던 아카데미 졸업생들 말인데요.”
“그들이라면 걱정 말게. 이미 치료도 끝났으니 바로 전장에 투입할 수 있을 거야.”
그거 물어보려 한 게 아닌데.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그게 아니라, 그들은 이번 출정 대상에서 빼자는 얘길 하려던 참이었어요.”
“……5급 기사 수백과 4성급 마법사를 전력 외로 치자고?”
“네.”
내가 태연히 답하자,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네. 어쩌다 그들을 순식간에 이겼다고 무시하는 모양인데, 사실 그 정도면 충분히 훌륭한 전력이야. 게다가 만약 세 왕국의 지원이 도달한다 치면 그 문제로 분명 항의가 들어올 걸세. 도와주러 왔는데 정작 본인들이 발을 뺀다고 하면서.”
구구절절 옳은 소리였다. 내가 그들을 무시한다는 것만 빼면.
사실 오히려 나는 그들을 높게 치고 있는 편이었다. 아무리 아카데미 입학 전부터 조금씩 익히고 있었다지만, 수년 내에 경지에 도달했다는 건 그만큼 재능이 있다는 소리니까.
2급, 3급. 심지어 1급에 오를지도 모르는 인재를 이렇게 소모하긴 아깝다는 판단.
문제는 테이어 테르베로츠의 말대로 세 왕국의 항의인데…… 이 부분은 미리 대비해 둔 게 있었다.
“지원을 부를 거예요. 그것도 세 왕국에서 그 문제로 절대 뭐라 항의하지 못할 만큼 강력한 지원을요.”
“그 정도라면 정말 세 왕국에 버금갈 정도로 강한 전력이어야 할 텐데, 세 왕국 말고 그런 집단이 대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집단이 아니에요. 개인이지.”
“……개인?”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그렇게 말하며 황당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봤지만,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이고 한마디를 더했다.
“네. 제가 부를 지원은 딱 한 명뿐이거든요.”
* * *
열흘이라는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가용할 수 있는 전력을 모으고, 그들을 이끌어 지하 최심부로 향하고.
그렇게 최후결전지에 집결한 전력이 1기사단 전원과 레이튼 마탑의 마법사. 그리고 몇몇 신전의 신관들이다.
수는 적지만, 하나같이 일당 천 정도는 가뿐히 가능한 정예들.
전쟁에는 좀 부족할지 몰라도, 버티기에는 최적화된 구성이다.
어쨌든 마침 결계가 거의 밀렸다는 보고도 들어왔으니 이제 각 입구에 배치만 하면 되는데…….
“…….”
어쩐 일인지 다들 똘망똘망한 눈으로 나만 바라보고 있다.
아무래도 내가 뭐라 연설이라도 한번 할 거라 생각하는 모양인데, 딱히 준비해 둔 게 없다는 것이 문제다.
원래 전쟁 시작 전 그렇게 사기를 복 돋는 것이 중요하긴 한데, 이미 확인했듯이 여기 사람들은 그런 게 필요 없을 정도로 베테랑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들이라고 딱히 별다를 것도 없나 보다. 아니면 그냥 그들로서도 처음 겪어 보는 존재와 붙는다는 사실에 긴장해서일 수도 있고.
아무튼 나는 결국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앞으로 나섰다.
허나 연설을 위해서는 아니다. 여기서 어중간하게 급조한 말을 해 봤자 사기에 악영향만 미칠 확률이 더 크니까.
그러니 보여 줄 수 있는 건 행동뿐.
말없이 검을 뽑자, 사람들의 시선이 내가 아닌 그곳으로 고정됐다. 곧바로 가지고 있는 혼원력을 전부 그 안에 몰아넣었기 때문이다.
아직 2급이지만, 어지간한 1급도 압도할 수 있을 만큼 엄청난 순도와 양의 기운.
적어도 퍼포먼스로는 이만한 게 더 없을 거다.
확실히 아까보다 훨씬 신뢰가 담긴 눈빛들을 읽으며, 나는 낮게 깐 목소리로 원래 하려 했던 명령들을 이었다.
* * *
미로의 입구는 세 개. 자연히 부대도 셋으로 나뉘었다.
그중 가장 큰 격전이 예상되는 가운데엔 집단 내에서도 최고의 실력자들만 모아 놓았는데, 쉬이 흥분하지 않는 그들의 얼굴이 오늘따라 하나같이 상기되어 있었다.
“방금 그 기운 봤나? 그냥 내부에 있는 걸 탐지해 봤을 때도 놀랐는데, 꺼내 보니 그 이상이더군.”
“그러게 말이야. 대체 어떻게 저 나이에 저런 실력을 갖게 된 건지……. 심지어 수련만 한 것도 아니지 않나?”
대화를 나누는 자들은 리안에 대해 잘 아는 인물들이 아니었다. 레이튼에 머물고 있던 극소수의 2급 기사들이었으니까.
사실상 거주라는 형태로 아르곤이 심어둔 감시들이었는데, 일단 현장을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고 나와 있는 상태였다.
“그것도 그렇긴 해. 대륙에 이름난 상회를 일군 데다 우리 재상님 상대로 정치질까지 했었다며? 난 솔직히 저자가 먼 옛날 해방왕의 환생 아닐까 의심 중이네. 그렇지 않고서야 말이 안 돼.”
“해방왕도 저 나이에 저러진 못했을걸. 저렇게 몇 년만 지나도 그분 전성기 실력 금방 따라잡을 거 같은데?”
“음…… 어쩌면 그럴지도.”
진지한 얼굴로 중얼거리던 기사가 갑자기 피식 웃었다.
“그보다 우리가 왜 이런 대화나 나누고 있는지 모르겠군. 어쨌든 우리와 사는 세계가 다르다는 건 변함이 없는데. 혹시 자넨 저 나이에 뭐 했나?”
“가문에서 훈련을 받고 있었지. 나름 3대 만에 태어난 신동이란 소리도 들었는데.”
“등급은? 아니, 그냥 말하지 마라. 어차피 한 4급쯤 됐겠지. 나도 비슷했으니까.”
“…….”
정곡을 찔린 남자가 입을 다물었다.
어디 가서 이런 쪽으로 자존심이 상해 볼 거라곤 상상도 해 본 적 없었다. 항상 재능 넘친다고 추앙받는 쪽이었지, 추앙하는 쪽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그런지 이런 화제가 썩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어차피 상대도 마찬가지.
서로 스치기만 해도 치명타인 상황은 바라지 않았기에, 자연히 화제가 다른 곳으로 넘어갔다.
“어차피 우리와 관계없는 세계야 어쨌든, 이상한 점은 하나 더 있어.”
“저기 저 흑기사단 얘기하는 거지?”
남자의 질문에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기운을 탐지해 보면 분명 2급 상위 이상의 기사들인데, 저 많은 이들이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는 건 너무 말이 안 되잖아?”
“당연히 말이 안 되지. 게다가 저 실력자들을 아카데미 교관으로 처넣는 건 더 말이 안 되고.”
“……역시 제국 1기사단 같지?”
이번엔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밖에 없지. 동대륙에 갔던 1기사단이 합류했다면 리안 상회가 파는 동대륙의 물건들이 바로 설명되니까.”
“……혹시 그들이 순순히 아카데미 교관이 되고, 안에서 꼼짝 않고 숨어 있던 것도 저 리안…… 아니, 성자의 명령일까?”
화제를 돌리고자 시작한 얘긴데, 결국 또 당사자로 넘어왔다.
남자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처음 그들을 아카데미 교관으로 넣고자 한 게 그쪽인데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지.”
“이걸 왕국에 보고하면 문제가 될 수 있지 않겠나?”
기사가 조심스레 말했다.
그가 검을 막 들기 시작한 어린 시절부터 제국 1기사단은 명성 쟁쟁한 집단이었다.
대륙 최고 무력 단체임은 이미 증명이 끝난 후였고, 논쟁이 일어나는 건 그들만으로 일개 왕국을 끝장낼 수 있냐는 거였다. 겨우 한 집단이 국가 전력에 비견될 만큼 강력했다는 소리다.
1대1 대련이야 어쨌든, 집단 대 집단으로 그들과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그런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는 개의치 않고 담담히 입을 열었다.
“사실 들어오기 전에 내가 이미 보고했네. 방금 막 레이튼의 전력이라는 이들을 만났는데, 아무래도 행방이 묘연했던 1기사단원들인 거 같다고.”
“뭐?! 그래서 뭐라던가?”
“거, 진정 좀 해. 들어오기 직전에 했다니까. 그런데 답을 받을 새가 어디 있었겠어?”
“……그것도 그렇긴 하군.”
기사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 숙이자, 남자가 그대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마 어느 쪽이든 네가 생각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걸? 전쟁 말이야.”
“그걸 어떻게 그리 확신하지?”
그 말에 남자가 반대쪽을 가리켰다.
“저들을 봐, 항상 온몸을 감싸는 흑색 갑옷을 입고 있다고 흑기사란 이름이 붙었는데, 지금은 어때?”
“……평범한 차림이지.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고.”
“그치?”
다시 한 번 어깨를 으쓱인 남자가 그대로 말을 이었다.
“이제 정체를 숨길 필요가 없다는 거야. 그 전에 드러났으면 문제가 됐겠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 지들이 뭐 어쩌겠냐는 거지. 딱히 왕국을 공격한 것도 아닌데.”
“그럼 설마 아카데미 교관이 되라 명령한 것도…….”
“이렇게 될 때까지 시간을 끌 속셈이었던 거야. 교육이 주 목적인지 정체를 숨기는 게 주 목적이었는지는 몰라도.”
남자의 말에 기사가 놀란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분명 성자가 이계의 존재들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아카데미 개시 연설 직전이었으니까.
그 짧은 새에 여기까지 내다봤다는 것이 도무지 믿기 힘들었다.
“……그건 좀 해석이 과장된 거 아닐까? 차라리 미리 미래를 봤다고 하는 편이―.”
“그쪽이 더 마음에 들면 그렇게 믿든가. 어느 쪽이 더 황당한지는 굳이 말 안 해 줘도 알 거라고 믿지만.”
귀찮다는 듯 대꾸하는 남자의 말에 기사가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아직도 성자에 대해 놀랄 것이 남아 있다는 게 신기해 농담 한 번 해 본 건데, 안 받아 주니 서운했던 거다.
“……어쨌든 다행이군. 어쨌든 지금은 적이 아니라 같은 편이니까. 만약 상대로 만났다면 저만큼 무서운 적도 없었을 거야.”
그건 남자 역시 공감하는 바였다.
지금이야 태연히 말하고 있지만,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던 당시에는 그도 놀라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으니까.
지금은 자존심 때문에 겉으로 티 내지 않을 뿐이다.
아무튼, 그가 슬슬 그만 이야길 멈추고 휴식을 취하려던 때였다.
‘……뭐지?’
분명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는데, 순간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마치 마주해선 안 될 것을 마주하기라도 한 것처럼.
다른 이들 역시 모두 같은 느낌을 받은 건지 자리에서 일어나 한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끼아아아아악!
완전히 개방된 문에서 끔찍하게 생긴 괴물들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