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216)
정확히 2분 47초. 내가 5급 기사 200을 쓰러뜨리는 데 걸린 시간이다.
“컥, 커어억…….”
“시, 신관. 신관 좀 불러 줘…….”
“…….”
시간 단축해 보겠다고 좀 과하게 손을 쓴 것도 같긴 하지만 뭐……. 250대 1이었는데 불평할 사람은 없겠지.
나는 미리 준비해 둔 신관을 올려 보내라고 말한 뒤 무대 위를 내려갔다.
박수 같은 건 없었다. 전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으로 조용히 바라볼 뿐.
괜히 그들이 정신 차려서 귀찮아지기 전에 재빨리 대기실로 들어갔더니, 안에 사람이 하나 있었다.
최근 제일 자주 보는 테이어 테르베로츠였는데, 의도든 아니든 항상 꾸미고 있던 여유로운 미소가 어디론가 완전히 사라져 있다.
일단 내 전투력에 놀라서 그런 건 아닌 것 같고…….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아무튼, 뭔가 생각을 정리하는 듯 입을 꾹 다물고 있기에 하려던 걸 마저 했다. 결투 중 피가 튈까 걸쳤던 겉옷을 갈아입고, 흑철검 한 번 점검하고.
그때쯤 되자 겨우 정신을 차린 그가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결투는 잘 봤네. 워낙 자신 있어 보여 이길 거라곤 생각했지만, 상상 이상이더군.”
“겉치레는 됐어요. 그보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런지부터 먼저 말씀해 보시죠. 급한 용건 같은데.”
내 말에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입가엔 평소의 미소가 돌아왔지만, 눈만은 여전히 굳은 채다.
“그냥 겉치레는 아닐세. 실제로 놀라기도 했고, 이걸 뭐라 말해야 할지 고민할 시간도 좀 필요했으니까. 아무튼, 급한 용건은 맞으니 바로 얘기하겠네.”
그렇게 입을 뗀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서 있을 힘도 잃은 것처럼 대기실 의자에 앉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폭탄선언을 했다.
“아무래도 자네가 말한 그 ‘문’이 열린 것 같네.”
* * *
솔직히 테이어 테르베로츠의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아니, 놀라긴 했는데 ‘그럴 수가!’ 보다는 올 게 왔다는 느낌이랄까.
이미 대륙은 ‘벨리아 대륙 전기’ 2부를 넘긴 시점이다. 이계의 존재를 막는다는 게 컨셉이었던 이상 언제 터져도 이상할 것 없었단 거지.
아무튼 ‘문’은 곧바로 열리는 게 아니다. 아직 시간 여유가 조금 있을 터.
나는 사람들에게 결투 뒤처리를 맡기고 곧장 마탑으로 향했다. 그리고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녹화한 지하의 영상을 담아 수정구로 세 왕국에 전송했다.
‘문’에서 해괴하게 생긴 괴물들이 팔을 뻗고 있는 내용이었는데, 병신이 아니면 매우 심각한 상황이란 건 누구나 알 수 있을 거다.
뭐, 그걸 받아들이고 지원을 보내느냐 마느냐는 세 왕국 선택의 문제겠지만.
“…….”
젠장, 수정구가 단방향 통신이라는 게 이렇게까지 아쉬울 줄이야.
서로 툭 까놓고 얘기할 수 있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불가능한 건 어쩔 수 없다. 꼬우면 핸드폰이라도 개발해 놨어야지.
나는 안 되는 일엔 깔끔히 미련을 버리고 다시 상회 회의실로 향했다.
먼저 온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미리 명령해 뒀는지 내부는 먼지 하나 없이 깔끔했다.
그 짧은 새 이걸 어떻게 다 치웠나 하고 있는데, 그뿐만이 아니었다. 갑자기 철컥, 하고 문이 열리더니 사람들이 우수수 들어왔다.
1기사단장 리카르도, 상회 상업 부분을 맡고 있는 영감님 그리고 7성급 마법사인 마탑주. 마지막으로 한동안 못 봤던 성녀 아리나까지.
사실상 레이튼 올스타 모임이다.
저 사람들을 내가 잠시 마탑 들렀다 온 사이 호출했다는 건 절대 말이 안 되고, 설마 ‘문’의 소식을 듣자마자 움직였다는 건가?
조금 놀랐다. 솔직히 그동안 이계 침공에 대해 별로 묻지 않기에 내심 헛소리 취급하는 줄 알았는데.
아무튼, 난 곧바로 의자로 향하던 엉덩이를 떼고 그들을 하나하나 맞이했다. 그 정도 대접은 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리고 처음 보는 사이끼리 소개까지 대충 끝나자 내 곁에 서 있던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천천히 입을 뗐다.
“오늘 여러분들을 모은 이유는 오는 길에 대충 들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혹시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면 녹화한 영상을 틀겠습니다만…….”
그 말에 회의실 내부 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급하게 전달받았을 내용이야 결국 뻔하니 당연한 일이다.
테이어 테르베로츠는 이를 예상한 듯 담담히 준비해 둔 수정구를 재생시켰다.
내용은 내가 세 왕국에 보낸 것과 똑같았다. 벨리아 대륙의 몬스터들과는 차원이 다른 상판의 괴물들이 손을 뻗고 있는 영상.
그를 끝까지 집중해서 본 마탑주가 끌끌 혀를 차며 말했다.
“허, 세상에 저런 저주받은 모습의 창조물들이 있을 줄이야. 수년 전 그가 얘기할 땐 솔직히 좀 반신반의했는데…….”
“이계에서 온 거니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 세상에 있던 건 아니지.”
“아무튼, 이제 우리 세상에 오긴 한다는 거 아니오? 그럼 별다를 것도 없지.”
영상은 그들에게도 나름 충격이었나 보다. 그걸 다 보고도 저런 소리나 하고 있는 거 보면.
손바닥을 두어 번 쳐 주위를 환기시켰다.
“저게 어느 세계의 창조물인지에 대한 논쟁은 나중에 하고, 지금은 일단 다른 것부터 논의하죠. 마탑에서는 몇 명의 마법사를 지원해 줄 수 있습니까?”
“대책은 필요 없는 건가?”
“이미 짜 둔 후입니다.”
“……나는 들은 적 없는데 말이지.”
그야 말해 준 적 없으니까.
마탑 총 대표쯤 되면 모를까 일개 도시 마탑주에게 알릴 만한 사항은 아니었다.
내가 묻는 것도 일단 그에게 하고 있기는 하지만, 위쪽에 물어보라는 말을 돌려 말하는 거에 불과했고.
그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헤르멘 대표님께 여쭤보고 말해 주겠네.”
“감사합니다.”
나는 마탑주의 대답을 듣자마자 고개를 돌렸다.
영감님은 애초에 내 소속이니 물을 것도 없고, 리카르도는 이미 한 번 함께하겠다는 약속을 받은 상태고. 남은 건 키탄의 신전 쪽인데…….
“…….”
정작 그 당사자인 아리나는 말없이 뭔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성녀님?”
“네? 아, 네. 리안 님.”
“신전에서 신관이나 성기사의 지원은 가능하겠습니까?”
내 물음에 아리나가 골치 아픈 듯이 한숨을 푹 쉬었다.
“그게 문젠데요……. 일단 키탄의 신전에서는 신관 천, 성기사 오백 정도 지원 가능해요. 미리 합의가 된 사항이기도 하고요.”
“다른 신전에서는요?”
“……일단 제가 신전들 대표로 나와 있긴 한데, 그쪽은 합의된 내용이 없어서요.”
입장 상 다른 신전에 대고 이래라저래라 할 순 없다는 소리다.
별로 놀랄 것도 없다.
세 왕국보다 더 통합 안 되는 그들이 갑자기 손잡고 쎄쎄쎄 했을 린 없으니까.
사실 아리나가 대표로 나온 것도 키탄의 신전이 제일 크기 때문이 아니라 레이튼에 중요직이라 할 만한 건 녀석밖에 없어서다.
“1년 전쯤 왕국들이 이계 침략을 공언하고 교단에 협조를 구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일단 흑기사단주로 되어 있는 리카르도가 묻자, 아리나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맞아요. 그때 대부분 신전들 역시 대륙을 지키는 일이라면 조건 없이 돕겠다 선언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뭐가 문제인 겁니까?”
“명령권이요.”
아리나가 다시 한 번 한숨을 폭 쉬더니 그대로 말을 이었다.
“신관의 일은 신관이 제일 잘 아니 신전에서 나온 사람이 명령권을 가져야 한다는 것까진 아무도 이의가 없었어요. 문제는…….”
“그 명령권을 어느 교단에서 갖느냐군요.”
내가 끼어들어 말하자 아리나가 순순히 수긍했다.
“……맞아요.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그 입장은 저희 키탄교에서도 예외는 아니에요.”
“본인들 사람을 남한테 맡기는 게 안심되는 일은 아닐 테니까요.”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당연한 일이다. 원래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니까.
만약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그때 명령권자가 자기네 사람을 보내겠나? 평소 사이 안 좋은 놈이라고 일부러 사지로 몰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그러니 저런 문제를 꺼리는 것 자체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문제로 지원 자체를 안 오는 건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럼 일단 다른 신전들에 제 입장을 전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 정도야 얼마든지요. 뭐라고 전하면 될까요?”
나는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단호하게 말했다.
“혹시 명령권을 이유로 지원을 안 보내거나 소홀히 하는 교단이 있을 경우, 앞으로 그들은 절대 다시 레이튼 땅을 밟을 수 없을 거라고요.”
* * *
“……신전에 그리 엄포를 놓아도 괜찮겠나?”
긴급하게 열렸던 회의가 살짝 껄끄러운 분위기로 끝난 뒤, 그들을 마중하고 돌아온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내게 그렇게 물었다.
나는 그사이 처리하고 있던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뭐 어쩌겠어요. 어차피 그 정도 말로 지원 안 보낼 놈들이었으면 굳이 엄포 놓지 않아도 안 왔을걸요.”
“그 의견 자체는 나도 동의하네. 원래 신전 놈들은 항상 앞에선 빈민을 위한다 지껄이면서 정작 필요할 땐 한 발 빼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전쟁 이후도 봐야 하지 않겠나?”
거기까지 말한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갑자기 안색을 달리했다.
“설마 자네도 옛날 그 해방 왕이 그랬던 것처럼 지레 겁먹고 미리 포기한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만약 그랬다면 굳이 이렇게 고생 안 하고 어디 짱박혀서 숨어 살았겠죠. 솔직히 저 한 몸 정도는 무슨 상황에서도 지킬 자신 있거든요?”
“그럼 대체 뭔가? 레이튼에 신전이 한 절반만 준다고 쳐도 거리에 병자들이 넘칠 거야.”
확실히 그렇긴 할 거다.
치료해 줄 때마다 받아먹는 액수 탓에 돈벌레라는 소리까지 듣는 놈들이지만, 어쨌든 그들 빼면 대안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여기 뭐 항생제가 있나 의사가 있나.
가끔 나와 비슷한 상황에 빠진 사람들이 나오는 소설엔 뚝딱뚝딱 만들어 내곤 하던데, 그게 나는 아니다. 같은 이과 출신이긴 해도 분야가 다르니까. 솔직히 생물이나 화학이랑은 좀 연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방도가 없는 건 아니지.
“남은 신전들이 신관을 원래보다 두 배 이상 충원한다면요?”
내가 묻자,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얼토당토 않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 충원은 어떻게 하라고 할 건가? 최근 레이튼이 급속히 발전한 건 맞지만, 콧대 높은 그들이 그렇게 눈독 들일 정도는 또 아니야. 신관은 굉장히 귀중한 인적자원이니까.”
“그럼 그렇게 눈독 들일 정도로 만들어 주면 되겠죠.”
내 말에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헛웃음을 지었다.
“말이야 쉽지. 그걸 대체 어떻게 하려고 그러나? 갑자기 레이튼에서 황금이 터져 나오는 것도 아닐 텐데.”
“황금은 아니지만, 그보다 더한 게 터져 나올 예정이기는 해서요.”
“……황금보다 더한 거?”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짐작도 안 가는 듯 고개를 갸웃했지만, 나는 피식 웃으며 다시 서류에 집중했다.
원래 이런 건 나중에 알게 되는 편이 더 재밌는 법이니까.
아무튼,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번에 레이튼에 지원을 보내지 않은 신전들은 추후 땅을 치고 후회할 거란 사실 말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