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의 코드가 보여-215화 (215/225)

너의 코드가 보여 (215)

루시스 아카데미는 레이튼에서 가장 큰 건물 중 하나다. 원래 있던 귀족 아카데미를 개조한 곳이기 때문이다.

사치 부리는 걸 좋아하는 놈들이 모인 장소인 만큼 쓸데없이 넓고 화려한 공간들이 많았는데, 거기서도 연무장이 제일이었다.

거의 천 명 가까운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크기.

이번 결투 장소로 선택될 수밖에 없는 환경을 갖춘 곳이라 할 수 있었다.

그 안의 좌석 또한 수천 개에 달할 정도였는데, 평소엔 텅 비어 있던 의자가 오늘은 웬일인지 만석이었다.

“이걸 진짜로 하는 건가?”

“뭐, 일을 이렇게 벌여 놓고 설마 그만두기야 하겠나? 하기야 하겠지.”

“음…… 몇 대 몇이랬더라? 300대 1?”

“250대 1일 거야. 그래 봤자 별로 유의미한 차이는 없지만서도.”

시큰둥한 흉터남의 답변에 중년인이 눈을 크게 떴다. 그제야 상대가 전성기에 무려 A등급의 용병이었다는 걸 떠올린 것이다.

“유의미한 차이가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말 그대로지. 250명이든 300명이든 결과가 뭐 달라지겠냐는 거야. 어차피 리안…… 그러니까, 성자님이 이길 건데.”

“뭐? 성자님이?”

중년인이 놀라 물었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성자님의 우승을 예상한 사람은 없었으니까.

혹시 실력자의 눈엔 다른 것이 보이는 건가?

그가 잠시 그런 생각을 했으나, 흉터남이 그를 곧바로 반박했다.

“아, 물론 정상적으로 이길 거란 말은 아니야. 뭔가 꼼수를 부려 뒀겠지. 알고 보니 250명이 번갈아 나오는 태그매치라든가, 아니면 졸업생들이 사용할 수 있는 마력을 제한해 뒀다든가.”

“……성자님이 그런 비겁한 방법을 썼을 리가 있나.”

“나도 그렇게는 생각하는데, 듣자 하니 이 대련은 성자님이 제안했다는 것 같더군. 그런데 본인이 망신당할 일을 본인이 제안했을 리가 있겠어?”

“이길 자신이 있으니 그랬을 수도 있지.”

중년인이 자신 있게 말하자, 용병 출신의 흉터남이 피식 웃었다.

상대가 마력에 대해 문외한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도 대체 성자가 무슨 생각으로 제안한 일인지는 짐작이 가지 않았으나, 한 가지 사실만은 확실하게 알았다.

바로 정상적으로 붙으면 1년 전 2급에 올랐다는 성자의 실력으로도 상대가 안 될 거라는 것.

5급 기사 200에 4성급 마법사 50이면 상대가 1급은 돼야 겨우 상대해 볼 법할 거다.

하지만 그는 그런 기색을 티 내지 않고 말없이 경기장을 바라봤다.

굳이 지금 입 아프게 놀릴 것 없이 잠시 후면 모두가 알게 될 일이었으니까.

이건 결국 레이튼의 성주가 기획한 거대한 연극에 지나지 않음을 말이다.

* * *

모인 사람들의 열기와는 달리 대련 자체는 조금 허술한 감이 있었다. 진행을 맡은 사회자도, 규칙을 설명하는 심판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는 전부 리안이 요구한 결과로, 간소하게 끝내고 싶은 소망이 뭉쳐진 현상이라 할 수 있었다.

그 소망과는 별개로 대련장은 이미 흥분의 도가니였지만, 그 위에 올라와 있는 250명의 졸업생들은 살짝 긴장한 얼굴로 반대쪽 입구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걸 진짜로 한대?”

“뭐? 마법학부 쪽 얘기하는 거야?”

“그래. 걔네들 규칙 같은 거 없는 실전이라는 말만 듣고 성자님 등장하자마자 공격 마법 몰아서 쓸 생각이라며.”

기사학부 학생들이 걱정하는 건 본인들이 나설 기회도 없이 경기가 끝나는 것과 성자님이 너무 허무하게 패배하는 거였다.

일단 나오라니 나오긴 했는데, 그의 은혜로 배워 온 만큼 너무 망신 주는 것도 그리 원하는 결과는 아니었다.

“뭐 어쩌겠어. 원래 걔네가 좀 이기적이고 사회성 없는 게 사실인데. 게다가…… 사실 전력을 다하라는 성자님 말씀대로라면 쟤네도 제대로 하고 있는 거긴 하잖아?”

“……그렇긴 한데, 역시 저건 너무 오버 아닌가 싶은 거지.”

“우린 어쨌든 우리 역할만 잘하면 되는 거야. 마법사를 지키고, 상대를 붙잡아 두는 거.”

친구가 어깨를 으쓱이며 하는 소리에 남자가 입술을 삐죽였다.

어차피 250명이 다구리치는 승부에 그렇게까지 나올 필요가 있나 싶었던 거다. 상대가 딱히 무슨 원수 같은 것도 아닌데.

하지만 그가 다시 불만을 입에 담으려던 그 순간.

뒤쪽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마력 파동이 느껴졌다.

마법학부 졸업생들이 모두 본인이 펼칠 수 있는 최강의 공격 마법을 준비한 것이다.

꿀꺽.

그는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저를 노리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으면서도 절로 긴장이 됐던 탓이다.

헌데 그런 걸 정면으로 받고 있는 상대는 어떠할까.

궁금해진 남자가 시선을 앞으로 향했다.

단정하게 자른 금발에 간소한 옷차림.

탁월한 외모 덕분에 조금 튀기는 하지만, 누가 말해 주지라도 않으면 레이튼. 아니, 대륙에서 제일 돈이 많은 사람 중 하나라고는 도무지 믿지 못할 차림새였다.

허나 그는 레이튼의 꼭대기에 서 있는 시장의 직위를 가지고 있었고, 표정 또한 그에 걸맞게 여유가 넘쳤다.

마치 본인의 가치는 본인이 직접 증명하겠다 주장이라도 하고 있는 듯한 모습.

여기선 이름보다 성자라는 칭호로 더 많이 불리는 리안의 등장이었다.

‘……나는 저 기운이 느껴지는 것만으로 떨리는데, 저분은 아무렇지도 않나?’

남자가 신기한 감정이 들어 바라보았으나, 상황은 그리 여유를 주지 않았다.

리안이 대련장으로 발을 올려놓자마자 약 백여 개의 공격 마법들이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 뒤꽁무니를 따라 이동하던 그의 시선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미친 새끼들, 이중 영창까지 써?’

아무리 그래도 저건 진짜 정도가 과하지 않은가. 저것도 성자님의 돈으로 열린 아카데미에서 가르쳐 준 건데!

마법학부를 향해 뭐라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그보단 성자님이 먼저였다. 저 정도면 자칫 중상을 입을 수도 있는 수준이었으니까.

같은 생각을 한 건 그뿐만이 아닌지 기사학부의 학생들이 분분히 앞으로 나섰다. 조금이라도 마법을 막아 충격을 분산하기 위함이었다.

다만 그들의 속도는 이미 발사된 마법을 따라갈 바가 못 됐고, 결국 마법은 성자님 곁까지 다가가고 말았다.

“안 돼!”

대련 상대가 경쟁자를 걱정해 준다는 요상한 광경이 연출되었지만, 그를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적어도 기사학부 내에선.

허나 그들의 염려는 결과적으로 쓸모없어진 데가 있었다.

리안에게 닿기 직전까지 갔던 마법은, 전부 원래 없었던 것처럼 곧바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으니까.

‘……지금 대체 무슨?’

남자가 멍한 얼굴로 걸음을 멈춰 섰다. 사태 파악이 안 됐던 것이다.

차라리 검막으로 막든가 어떻게 피해 냈다면 이렇게 놀라진 않았으리라.

헌데 그 많던 공격들이 갑자기 허공에서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말다니. 이건 그가 알고 있는 이치를 벗어났다.

혹시 마법학부 놈들이 뒤늦게 정신 차리고 취소한 건가 싶어 바라보았으나, 그들 역시 상황을 파악 못 한 것처럼 보이는 건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받은 충격은 그들보다 훨씬 심하였는지, 허공에 대고 알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는 녀석들도 있었다.

결국 그는 유일하게 답을 알고 있을 인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성자님이었다.

하지만 그 당사자는 시선의 의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담담한 얼굴로 검을 들어 올릴 뿐이었다.

리안은 멍하니 응시하는 기사학부 학생들을 바라보며 담담히 내뱉었다.

“뭐 해? 갑자기 멈춰 서선. 덤비려고 달려든 거 아니었어?”

* * *

계속해서 이어지던 침묵이 얼마나 됐을까.

체면불고하고 내가 가야 하나 하던 그때. 선두에 있던 기사가 입을 열었다.

“……모두 합격술 3형 준비해. 위험도는 최상이다.”

남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멍 때리고 있던 기사들이 순식간에 진형을 짜기 시작했다.

그들 사이에서 내심 리더로 뽑히고 있던 녀석인 모양이다.

그보다 합격술 제 3형이라…….

실력이 제대로 파악 안 되는 근접전 상대로 거는 진형이었지 아마?

나는 피식 웃으며 그들의 준비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 줬다.

원래 변신 중에 치는 게 최근 국룰이긴 한데, 나름 재빨리 상황 파악하고 맞춰서 변형하는 게 기특했으니까.

성장한 제자를 보는 마음이라 해야 하나. 딱히 내가 직접 키운 건 아니지만.

아무튼, 그러고 있자니 어느새 수백 명의 기사가 나를 둘러싸고 있는 형태가 되었다.

사이사이 마법사의 공격이 통과할 수 있도록 공간까지 둔 것이, 제대로 익혔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다행이다. 여태까지 내 돈이 허투루 나간 건 아니라서. 그리고 이 정도 실력이면 확실히 헛바람 들 만도 하겠다.

하지만.

녀석들은 번지수를 잘못 짚었다.

그 마법사들을 위해 비워 둔 공간은 바로 나를 위한 공간이 되기도 했으니까.

“…….”

나는 곧장 고개를 숙이고 머릿속으로 흑철검을 떠올려 냈다. 주변이 내 갑작스런 기행으로 놀라 숙덕거리는 것이 느껴졌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찰나에 가까운 시간이 흐르고.

이제는 완전히 익숙해진 ‘창조’의 권능을 발동시켰다.

순식간에 수십 개의 검들이 주위에 떠오르고, 나는 그걸 바로 기사들 사이의 틈으로 발사시켰다.

“젠장! 막아!”

처음 진형을 짰던 리더가 크게 소리쳤지만, 명령이 조금 늦은 감이 있었다.

마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만든 넓은 틈이 그보다 훨씬 작은 검을 허용하지 않을 리가 없었으니까.

쉬익!

바람을 가르며 날아간 검들이 어느덧 마법사들의 앞에 도달했다. 녀석들 역시 바보는 아닌지라 방어막을 쓰고 항전했으나, 겨우 4성급 능력에 막힐 권능이 아니다.

마치 무협지에 나오는 이기어검처럼 움직이던 검들은 방어막을 부순 순간 칼머리로 마법사들의 뒤통수를 쳐 곧바로 기절시켰다.

그렇게 쉰에 달하는 마법 학부 졸업생들이 전부 쓰러지기까지는 단 1분으로 충분했다.

“…….”

눈 깜짝할 사이 벌어진 사태에 남아 있는 기사들은 아직 정신을 못 차린 모양새였다.

아까 ‘붕괴’로 마법들 막았던 것까지는 어떻게 이해해 보려 했는데, 이것까진 좀 무린가 보지?

그나마 아직 몇몇 녀석들은 입술을 깨물면서도 투지를 불태우고 있기는 한데, 그 숫자가 열이나 될까 말까다.

이래서야 콧대를 조금 눌러 주는 수준이 아니라 그냥 의욕 자체를 꺾어 버리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

지금부터라도 좀 살살해 볼까 잠시 고민했지만, 이미 보인 게 있는데 그러면 너무 눈에 티 날 거다.

결국 그냥 했던 대로 하는 거밖에 답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어차피 살살 하라는 주문은 받지도 않았으니 내가 알 바도 아니고.

그럼…… 이제 대충 2분 정도면 되려나? 마법학부 애들 처리한 시간까지 합치면 3분쯤.

나는 속으로 카운트 세면서 원래 만든 검들을 폐기하고 다시 한 번 곁에 생성해 냈다.

그리고 일단 투지를 불태우고 있는 녀석들을 대상으로 해서 앞으로 달려나갔다.

이제 목표는 생각했던 소요 시간을 얼마나 줄일 수 있느냐는 것.

내가 이기는 건 사실상 시작 전부터 정해진 이야기였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