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214)
미로의 정확한 구조는 의뢰자인 나조차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쪽 분야 전문가가 아닌지라 여기저기 외주를 맡겼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 덕분일까.
나는 2년 만에 완공된 지하 최심부까지 들어오는 데 무려 열흘이 훌쩍 넘는 시간이 걸렸다.
“…….”
이쯤 되면 이런 고민이 안 들 수가 없다.
이거 생각보다 너무 복잡하게 만들었나? 하는 고민.
적이 되는 존재도 없고, 내부를 대충은 짐작하고 있는 내가 보통 사람보다 수십 배 빠른 속도로 질주한 결과가 이 정도라니.
분명 노린 거긴 한데, 이러다 안에서 길 잃고 목숨 잃는 인간들이 너무 많을 거 같아 걱정이다. 나중에 되면 한 달 넘게 안에서 사는 사람들도 나올 테니까.
세이프존 비슷한 거라도 만들어서 중간중간 배치해 두는 게 좋으려나.
나중에 한 번 건의해 봐야겠다. 그렇게 골로 가 버리는 사람이 많이 나오면 꿈에서라도 나올 거다.
“그보다…….”
나는 작게 중얼거리며 최심부 미로의 입구를 살폈다.
드나들 수 있는 곳은 총 세 군데. 넓이는 딱 적당하게 다섯 명이 한꺼번에 들어갈 정도다.
근처 벽을 부숴 널찍하게 만들자니 괜한 고생처럼 느껴지고, 그렇다고 그냥 가자니 대규모 전력 운용엔 불편한 애매한 크기. 정확히 주문한 그대로다.
여기 건축 기술도 생각보다 무시할 수준은 아니라는 걸까.
난생 처음 다뤄 보는 재료였을 텐데, 반듯하게 잘도 설치해 놨다. 심지어 그 완공속도만 봐도 온갖 기계들이 즐비한 현대 지구 저리 가라다.
아무리 마법과 드워프족의 힘이라지만, 이쯤 되면 고층 건물 못 만들고 있는 게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다. 지반 잡고 이래저래 쌓으면 63빌딩도 가능할 것 같은데.
하긴, 마탑이 유독 크기는 했지.
어쩌면 못 한다기보다는 안 한다는 느낌인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그래 봤자 감당할 수 있는 인구 부양력이 안 될 테니까.
이런 설정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슬슬 잘 기억이 안 난다. 이 세계 오고 나서 너무 오래 지났나.
잠시 그런 감상에 빠져 있다가 고개를 젓고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다른 잡생각에 잡아먹히기에는 앞으로 이곳에서 벌어질 전투가 너무도 중요하고 또 거대했으니까.
기회는 단 한 번뿐. 그것도 머지않았다.
* * *
그런 식으로 미궁에 들락거린 지 얼마나 지났을까.
이제 최심부까지 도달하는 데 정확히 열흘이면 충분했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보다 내가 더 기간을 단축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정확히는, 그럴 기회가 없었다.
나한텐 그것 말고도 할 일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내가 싸 놓은 똥의 뒤처리 같은 거.
“……저한테 아카데미 졸업생들이랑 대련을 하라고요?”
“그래. 당연히 1대1은 아니고, 다대일 대련이네. 숫자는 자네가 알아서 정하지.”
테이어 테르베로츠의 태연한 대답에, 나는 황당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다대일이라지만, 내가 이 짬밥 먹고 갓난애들이랑 샤바샤바하긴 역시 좀 그렇지 않나. 딱히 얻는 것도 없을 테고.
하지만 나 바쁜 거 뻔히 아는 사람이 의미도 없이 이런 걸 찔러 봤을 리도 없다. 분명 뭔가 이유가 있겠지.
그건 나중에 물어보기로 하고, 일단 제일 궁금한 것부터 질문했다.
“대련이야 그렇다 치고…… 아카데미가 벌써 졸업생을 뽑아낼 정도가 됐어요?”
“원래 예상보다 훨씬 빠르긴 하지. 벌써부터 마력을 다루는 녀석들이 나올 거라곤 상상도 못 했었으니까.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고.”
“그런데요?”
“아무래도 그전부터 남몰래 익혀 둔 기술이 있는 경우가 많았던 모양이야.”
“아.”
대충 짐작이 간다.
제국의 귀족들과 후손들은 말끔히 처리됐지만, 그 기술들까지 전소돼 버린 건 아니다.
실제로 지금 아카데미에서 배우는 교재 대부분이 라이언 가문 비밀 창고에서 나온 거기도 하고.
운이 좋아 그런 걸 얻은 평민들이나, 뒤쪽에서 몰래 거래해 자식에게 넘긴 거부들도 있었을 거란 소리다.
아마 이번에 5급 기사, 4성급 마법사에 오른 자들은 대부분 그런 쪽이겠지.
원래라면 엄두도 못 냈을 비법을 얻고, 그 덕분에 아카데미까지 초고속으로 졸업한 사람. 그런 인간 군상들 평균적인 성향이야 상상하기 그리 어렵지도 않다.
“혹시 제가 그 사람들 콧대라도 좀 꺾어 두길 바라는 거예요?”
“자네와의 대화는 항상 구질구질 설명할 필요가 없어 좋군. 그 말대로네.”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만족스런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재능도 있고, 의욕도 있는 건 좋아. 하지만 그게 정도를 지나치고 있다는 게 문제지.”
“정확히 어느 정도로요?”
“본인들을 무슨 귀족처럼 여기기 시작했네.”
귀족이라.
듣자마자 한숨부터 나왔다.
여기 레이튼은 왜 노블레스부터 시작해서 허파에 헛바람 들어간 놈들만 나오는 건지.
거기 수장이었던 사람 앞이니 입으로 꺼내진 않겠다만.
“숫자는 얼마나 되는데요?”
“기사가 이백에 마법사가 쉰 정도일세.”
많기도 해라.
“그래서, 대련을 받아들여 볼 텐가? 사실 교관을 맡고 있던 1기사단원들이 해도 되는 일이긴 하네.”
“하지만 단원들이 나섰다간 이도저도 아니게 될 수도 있다는 거죠?”
어디까지나 그들은 신분을 숨기고, 실력을 제한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상태로 애매하게 박살 내 봤자 놈들 콧대만 더 올라간다는 거지.
“그렇네.”
“그럼 뭐 어쩔 수 없네요.”
“대련을 해 주겠다는 뜻인가?”
“네. 다만, 바쁘니까 인원수는 압축 좀 시키죠.”
“어느 정도로?”
“5급 기사 이백에 4성급 마법사가 오십이라 했죠?”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를 보며 어깨를 으쓱이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 사람들 전원이요. 빨리 끝내고 밀린 서류나 좀 마무리하죠.”
* * *
보통 윗급의 기사가 아랫 등급 기사 열을 상대할 수 있다고들 한다.
결국 실전인 탓에 정확히 나오는 수치는 아니지만, 대개의 경우엔 저 말이 맞곤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또 3급 기사가 5급 기사 백을 상대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높게 쳐 줘야 마흔 정도 감당 가능할까?
만약 합격술을 배운 녀석들이라면 서른으로도 가능할지 모른다.
전투는 어디까지나 곱셈과도, 덧셈 뺄셈과도 궤를 달리했으니까.
그리고 리안과의 대련이 잡힌 졸업생들은 그런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성자님이래도 이건 무리지. 5급 이백에 4성급 마법사 쉰? 이게 말이 되나?”
“그러니까. 그 나이에 벌써 2급에 달할 정도로 재능충이라는 소문이 있긴 한데, 만약 그게 사실이라 쳐도 이번 결투는 좀 과했어.”
기사와 마법사. 평상시엔 서로 경쟁심을 불태우던 둘이 태평한 얼굴로 아카데미 강당에 앉아 잡담을 나눴다. 주제는 당연히 이번 대련에 관한 것이었다. 최근 아카데미에서 가장 핫한 화제였으니까.
“대체 성자님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결투를 진행시킨 거지? 혹시 그동안 너무 승승장구해서 한 번쯤 넘어져 보고 싶기라도 했던 건가?”
“지금 상태로는 그게 가장 가능성 높은 추론이긴 하지.”
항상 무식하다며 꼽 주기만 하던 마법사가 순순히 수긍하자, 기사가 자신감을 얻고 말을 이었다.
“그치? 이것 말곤 답이 없다니까.”
“아무튼, 한 가진 확실해. 그 인간 이번에 한 번 제대로 물 좀 먹겠단 거지.”
그 인간이란 단어에 기사의 몸이 흠칫했다. 여태까지 종종 그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긴 했지만, 저렇게 노골적으로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야, 너 예전부터 생각했는데, 혹시 성자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라도 있냐?”
“억하심정은 무슨. 그런 거 없어.”
“그런 거 없다는 놈이 말투는 왜 그 지랄이야?”
기사가 흥분해 외치자, 마법사가 살짝 당황해서 어깨를 으쓱였다.
“겨우 이 정도 가지고 뭐? 내가 신성불가침이라도 건드렸냐? 이건 무슨 신관의 도시도 아니고 뭔 말을 못 하게 해.”
“너 이주민 출신이라 잘 모르나 본데, 여기서 성자님은 신성불가침 맞아. 나한테도 마찬가지고. 그러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분한테까지 거드름 피우진 말자. 애초에 그분 돈 아니면 입학도 못 했을 거잖아.”
기사의 목소리가 끝으로 갈수록 조금씩 높아졌다. 자연히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모였는데, 그중엔 호의적인 시선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마법사가 한발 물러섰다.
“그래. 알겠다, 알겠어. 그분은 안 건들게. 이제 됐냐?”
“그보다 왜 그분한테 억하심정 가졌는지나 한번 말해 봐. 내 상식으론 도저히 이해가 안 가서 그러니까.”
“그냥 마법학부보다 기사학부에 훨씬 지원 잘해 주는 거 같아서 그랬어. 그쪽 교관들은 하나 같이 사실 정체를 숨긴 2급 아니냔 소리 나올 정도로 뛰어난데, 우리 학부는 그 정돈 아니잖아.”
“……정말 그게 이유라고?”
기사는 마법사의 말이 쉬이 믿기지 않았다.
기사학부 교관들이 뛰어나다는 건 인정하지만, 마법학부 교사들도 실력이 딸리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귀족 아카데미 교사들보다 평균 실력이 뛰어나다는 말도 있었다.
그런데 그걸 제 돈 한 푼 안 내고 다니는 새끼가 욕하다니. 인간이라면 그래선 안 됐다.
“아, 진짜 미안하다니까. 내가 뭐 욕한 것도 아니고 그 인간이라고 한마디 했다고 사람을 잡아먹으려 드네. 너희 그거 병이야 진짜.”
“병이든 뭐든 나중에 꼭 사과드려라. 진짜 사람이 양심이 있지…….”
“근데 대체 누구한테 사과하면 되는 거냐? 내가 그분을 직접 뵐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야 당연히 하늘에 대고지. 성자님은 하늘이 내려 주신 분이니까.”
“…….”
진짜 사이비 같다니까.
마법사는 아직까지 저런 분위기가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았으나, 그만 말을 줄였다. 그와 비슷한 인간이 지천에 깔려 있던 탓이다.
“그보다 넌 그래서 어쩔 건데? 그 성자님 그렇게 좋아하는 거 보면 일부러 져 주기라도 할 거냐?”
“아니. 절대 그럴 수는 없지. 그건 성자님한테도 실례가 되는 행동이라고.”
“그런가?”
기사의 말에 마법사가 떨떠름하게 말꼬리를 늘렸다.
그가 봐 온 대로라면 성자는 오히려 그와 정반대였으니까. 대강대강 져 준다고 하면 귀찮았는데 차라리 잘됐다고 좋아할 타입이라 해야 하나.
물론, 그런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이미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호되게 당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대신 속으로만 조용히 생각했다.
저 녀석이 저런 생각으로 대련에 임한다면 무식함이 스테레오 타입인 기사들도 전부 비슷하겠다고.
수백 명이 모두 대강대강해도 모자랄 판에 진심으로 나선다면 그 결과야 뻔했다.
‘한 3분이나 버티면 대단한 거지.’
마법사는 그런 결과를 도출하면서, 기사의 성자님 찬양에 성심성의껏 호응해 줬다. 아까 전에 따라붙은 시선들이 아직 채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