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213)
그 방법은 나중에 알려 주기로 하고, 일단 타냐와 함께 지상으로 올라왔다. 더 늦었다간 저기서 밤을 꼬박 새워야 할지도 몰랐으니까.
“……진짜로 새벽이네.”
“그럼 내가 거짓말이라도 치는 줄 알았어?”
“그건 아닌데…… 리안, 네가 거짓말은 몰라도 말 돌리는 건 엄청 많이 하잖아.”
“……그런가? 아, 그보다 고맙다. 지하 문 열어 주는 거 도와줘서.”
“거봐. 또 말 돌리고.”
“…….”
이번 건 좀 너무 티나긴 했지?
순간 찔려서 입을 다물자, 타냐가 갑자기 피식 웃었다.
“됐어. 그냥 한 말이니까. 오히려 감사 인사는 내가 해야지.”
“……네가? 왜?”
내가 한 건 굳이 따지자면 타냐를 이용한 것과 별다를 것 없었다. 꼭 필요하고 편할 때만 찾곤 했으니까.
눈치 느린 녀석도 아니니 그 정돈 알아챘을 텐데.
하지만 타냐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듯 크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모르고 있던 황실의 지하에 대해 알려 준 것도 고맙고…… 뭣보다 우리 일족의 염원을 풀어 주려 노력한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 인류의 생존 말이야.”
“…….”
“그러니까 나한테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 표정에 다 티 나니까 괜히 나도 눈치 보게 되잖아.”
“…….”
내려갈 때 그 어색한 침묵이 그냥 내 기분이 상했을까 봐 그랬던 게 아니었나?
분명 예전의 타냐라면 그럴 거라 생각했다. 고백 이후 뭐 하나라도 잘못하면 나한테 미움받을까 전전긍긍하던 애니까.
새삼스런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자, 녀석이 입꼬리를 떨었다. 어색한 게 뭔가 경련이라도 걸린 것 같다.
“……근데 딱히 필요 없을 때라도 가끔 들러 주라. 불편하게 만들진 않을 테니까. 내가 고백을 다시 한 건 아니지 않아……?”
“……미안.”
뭐라 변명의 여지가 없었기에 곧바로 사과하고, 나는 곧장 내 방으로 향했다.
* * *
다음 날 아침. 나는 일어나자마자 사무실로 들어가 밀린 서류들을 죄다 해치워 버렸다.
당연히 힘들었지만, 이걸 그대로 냅두면 다가오게 될 사건이 예상되었기에 해낼 수 있던 일이다.
바로 테이어 테르베로츠의 잔소리 말이다.
하지만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던가.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순간, 사무실 문이 벌컥 하고 열렸다.
“자네 어제 대체 어디 갔던…….”
성난 기색으로 들어오던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방안을 보고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 짧은 찰나 내 책상 위에 있던 서류가 전부 처리 완료 쪽으로 옮겨진 걸 확인한 거다.
그는 미심쩍은 눈으로 다가와 그 산더미를 바라보더니, 중간의 몇 개를 빼서 검토했다.
사람 간의 신뢰가 부서져 버린 모습에 통탄스러울 따름이었지만, 나는 그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괜한 꼬투리라도 잡히면 다음 서류에는 테이어 테르베로츠 선에서 조치 가능한 것까지 포함될 수도 있었으니까.
“……정말 전부 끝냈군. 이렇게 빨리 할 수 있으면서 그동안 왜 그리 미적댔던 건가?”
“…….”
미적댔다기엔 내 손이 너무 빠르지 않았나. 어제까지만 해도 혹시 나한테 신이라도 들린 건가 했었는데. 오늘은 진짜 들린 것 같지만.
아무튼, 이제부터가 중요한 때다.
나는 크게 심호흡하고 서두를 뗐다.
“아무리 중요한 일이었다지만, 제가 너무 여기 문제를 무책임하게 내팽개치고 간 것 같아 힘 좀 썼죠. 다행히 제가 단 하루 만에 끝내고 와서 그런지 쌓인 양도 그리 많지 않았고요.”
말하면서 ‘하루’에 특히 악센트 주는 걸 잊지 않았다. 여태까지 고생한 내가 겨우 그 잠깐 나갔다 온 게 그리 잘못한 일이냐고 무의식에 각인시켜 주기 위해서.
완전히 쓸모없는 시도는 아니었는지, 테이어 테르베로츠도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뭐, 일만 제대로 해치우면 사실 뭐라 할 말이 없기는 하지. 그래도 다음부터는 얘기 좀 하고 가게. 나는 혹시 자네가 서류에 파묻히다 못해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간 거 아닌가 했어.”
이 아저씨가 웃지 못할 농담을 하네.
게임 제작에 미쳐 살다 게임 속에 들어온 만큼, 들은 순간 소름부터 돋았다. 진짜 그 말처럼 될까 봐.
눈 떠 봤더니 숫자와 데이터로만 이루어진 곳에 갇히는 거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세상에 예전 레이튼보다 더 끔찍한 지옥이 있을 줄이야.
“그보다 갔던 일은 잘 해결됐나?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지간히 중요한 문제였으니 자네가 직접 간 거일 텐데?”
“네. 잘 해결하고 왔습니다. 결과도 좋았고요.”
“그럼 다행이군. 결과만 좋으면 사실 더 볼 것도 없으니까.”
나도 다행이다. 생각보다 기분이 좋아 보여서. 의외로 잘 풀리는 거 아닌가?
나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 이어 말했다.
“그래서, 오늘 서류는 이게 전부인가요?”
“그럴 리가 있나? 아직 수백 장은 더 올라올 걸세. 아카데미부터 예전 대물림의 숲 개간까지 해치워야 할 게 많아.”
“수백 장이면 그리 많은 것은 아니네요.”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자,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황당한 얼굴을 하고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게다가 아카데미 입학도 전부 끝났고, 개간도 사실상 마무리 단계니, 이제 저희가 직접 손대야 할 부분이 확연히 줄어들지 않겠어요?”
“……그건 그렇지만, 나는 왜 자네가 이렇게 뜸을 들일수록 속이 불안해지는지 모르겠군.”
“불안해하진 마시고, 서류 처리할 것만 좀 늘리죠. 일이 너무 없어도 적적하실 텐데.”
“미친 소리를 하는군.”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일고할 가치도 없다는 듯 단칼에 잘라 냈다.
……혹시 노인네 취급하는 게 마음에 안 들었나. 예상보다 너무 단호한데.
“적적하지 않으시면, 앞으로 인생의 활기를 위해서라도…….”
“그런 게 중요한 것이 아니야. 지금 있는 서류만으로도 죽을 거 같으니 하는 말이지. 내가 자네보다 처리하는 서류 양이 두 배는 더 많다는 거 알고 있나?”
알고 있다. 저기 지금 처리 완료에 가 있는 녀석들도 절반 정도는 이미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확인한 후 보낸 것들이니까.
“생각해 보니 이런 상태에서 서류를 더 받으면 결과적으로 적적해지기는 하겠군. 난 이미 골로 가서 저 세상에 한적히 생활할 테니 말이야.”
“…….”
“뭐, 나는 별로 그래도 상관없네만. 정말 그걸 원하나?”
“잠시 진정하고 타협점을 찾아보죠.”
나는 테이어 테르베로츠를 소파에 앉히며 협상에 들어갔다.
“혹시 지금 급여가 마음에 안 드시는 거면―.”
“필요 없네. 어차피 지옥에서 골드 쓴다는 말은 들어 본 적 없거든.”
어째서 지옥이 디폴트 값인 거지.
아까부터 계속 책상 위에 놓여진 과도에 자꾸 시선이 가는 것 같은데, 혹시 달려들려는 건가 조금 걱정된다.
그런다고 내가 다칠 염려는 없겠지만, 그러다 저 노인네가 삐끗하기라도 하면 당분간 내 일이 몇 배는 늘 테니까.
“……그럼 사람들을 더 고용해드리죠. 그것도 교육받은 엘리트들로요. 그래도 안 되겠습니까?”
“지금 당장 일이 몰린다고 무턱대고 직원을 늘리면 나중에 안정화되었을 땐 어쩔 건가? 한 번에 정리라도 하게?”
그럴 일은 없을 거다. 앞으로 벌여야 할 문제들이 아직도 산더미 같으니까.
그런 사정들을 붙여대며 끝까지 설득하자, 결국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손을 들어 기권했다.
“후우…… 그래. 그 정도로 인원을 충당한다면 뭐 어찌어찌 생존할 수는 있겠어. 하지만 하나 물어봐도 괜찮겠나?”
“말씀하시지요.”
“이렇게까지 해 가며 벌이려는 일이 대체 뭔가?”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의문스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수만 명을 무상 교육시키는 아카데미를 지을 때도, 세 왕국을 상대로 독립적인 지위를 인정받겠다고 나설 때도 자네의 이런 모습은 보지 못했어. 대체 얼마나 중요한 문제길래 이렇게 나오는 거냔 말일세.”
테이어 테르베로츠의 질문에 나는 잠시 침묵하다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툭 내뱉듯 말했다.
“미궁을 지을 거예요.”
“……미궁?”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뜬금없는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괴상망측한 표정이 되었다. 난 그를 보면서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륙의 최전선임과 동시에 모든 경제 활동의 중심지가 될 미궁을요.”
* * *
해방 왕과 제국의 원래 계획은 이랬다.
일단 문을 봉인해 두고, 그 근처에 넓은 전장을 만든다. 그리고 풀릴 때쯤 전력을 투입해 입구 막기를 하는 거다. 일명 다구리지.
이 생각 자체는 사실 상당히 효율적인 편이었다. 수성하는 입장에서 이끌어 낼 수 있는 이점을 최대한 극대화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결과적으로 실현되지는 못했는데, 크게 두 가지 문제 때문이다.
첫째는 당연히 문을 고정시킬 방법이 없다는 것.
애초부터 전장의 선택권이 내 쪽에 있지 않은데 어떻게 녀석들이 나올 곳을 예측해서 대기 타고 있겠나?
사실 이 시점에서 이미 끝난 이야기라고 볼 수 있겠으나, 만약 그걸 해결한다 쳐도 여전히 두 번째 문제가 남아 있었다.
바로 이계의 존재들은 이곳에 소환된 직후 30초가량 방어막에 의해 보호받는단 점이다.
그 시간 동안은 거의 무적에 가까운데, 이게 전투 중 얼마나 치명적인지는 지나가던 개도 알겠지.
물론 해방 왕이 이 사실을 몰랐던 건 아니지만…… 어차피 첫 번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아무 의미 없다고 생각해 관심도 두지 않았을 거다.
그렇지만 이젠 대책을 짜야만 한다. 그 첫 번째 문제는 내가 해결 방안을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나는 그 두 번째 문제를 ‘미궁’으로 해결할 생각이었다.
“……중간에 놓이는 벽을 제공해 준 흙으로만 하라는 말씀입니까?”
“네. 미궁이 컨셉이다 보니 절대 부술 수 없을 정도로 튼튼해야 하거든요.”
“보통 흙은 그렇게 강하지가 않습니다만…….”
“그건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특수한 재료로 제작한 최강의 흙이거든요.”
공사 총책임자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그게 무슨 바위 깨는 계란 같은 소리냐.’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빤히 보였지만, 끝내 겉으론 티 내지 않는다. 내 위치 때문인지는 몰라도.
“……뭐, 알겠습니다. 저희야 어차피 계획대로만 하면 되는 거니까요. 하면 다른 지시사항도 있으십니까?”
“공사 인부들은 정해진 구역을 절대 벗어나지 말 것, 설계도는 절대 남들과 공유하지 말 것. 당장 생각나는 건 이 정도네요.”
“음…… 미궁이니만큼 당연히 보안이 중요하겠죠. 그건 이해하겠습니다.”
책임자가 서류에 이것저것 작성하더니, 이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한데 아직 이해가 안 되는 게 하나 있습니다.”
“물어보시죠. 대답할 수 있는 건진 모르겠습니다만.”
“여기 지하 최심부라 되어 있는 곳엔 어째서 출구 쪽 절반만 미로를 만드는 겁니까? 혹시 골인 지점 비슷한 건지…….”
의아한 얼굴로 묻는 질문에 쓰게 웃었다. 이건 대답해 줄 수 있는 질문이 아니었으니까.
말을 돌려 책임자를 밖으로 내보낸 뒤, 나는 책상에 남겨진 설계도를 바라봤다.
거의 일개 왕국을 때려 박은 것처럼 보일 정도로 겹겹이 쌓인 커다란 설계도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