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212)
“이곳이…….”
방금 전 있던 어색한 침묵은 순식간에 잊은 기색으로 타냐가 열심히 주위를 둘러봤다.
하지만 사실 그럴 필요는 없었다.
지하의 최심부는 입구 쪽과 같이 넓은 공간에 큰 석문과 계단이 덜렁 있을 뿐이었으니까.
물론 그 위치는 정반대였지만. 굳이 따지자면 출구 같다고 해야 하나.
“구경 다 했으면 저기 앞까지 한번 가 볼래? 여기 와 놓고 그냥 가긴 좀 억울하잖아?”
“아, 응.”
타냐가 불만 없이 내 뒤를 졸졸 쫓아왔다.
사실 ‘졸졸’이란 표현은 좀 뭣하긴 하다.
나는 인간을 초월한 속도로 달렸고, 녀석도 부적술을 이용해 그런 나를 따라잡았으니까.
“…….”
아무리 설렁설렁 뛰고 있다지만, 보조 기술에 가까운 부적술로 이 정도나 할 줄이야.
솔직히 조금 놀랐다.
재능 덕도 있겠다만, 얘도 노력 엄청 하긴 했나 보구나 하고.
재차 감탄하며 오랜만의 속도감을 즐기고 있자니, 어느새 문 앞까지 도달했다.
“헉…… 허억…… 대체…… 왜…… 이렇게…….”
“머냐고?”
헐떡거리는 타냐를 북돋아주며 묻자, 녀석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여기 지하가 위에 있는 황궁보다 크거든. 아래로 내려갈수록 더 넓어지니, 아마 최심부인 여기는 레이튼의 몇 배는 될 거야.”
“……대체, 어떻게…….”
“좀 쉬었다 말해라. 쉬었다.”
본인도 그게 더 낫다 여겼는지, 제자리에 앉아서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능력이야 발전시켰다 쳐도 체력까진 어쩔 수 없는 거다.
오히려 저 정도면 수년 전이랑 비교도 안 될 만큼 좋아진 거지 뭐.
그렇게 십 분 정도 지났을까.
겨우 진정한 타냐가 자리에서 일어나 물었다.
“아무리 지하를 뚫는 마법이 존재한다지만, 이런 규모는 들어 본 적도 없어. 대체 누가 이런 걸 만들었다는 거야?”
“누구긴 누구겠어. 잘나신 네 선조님이지.”
이 대륙에서 대충 믿기 힘든 일은 해방 왕 이름 붙이면 검증이 끝난다. 잘난 척이 심해서 그렇지, 실제로도 대단한 놈이긴 했으니까.
“……그럼 이유는? 어차피 봉인시켜 둔 거라면 굳이 이런 장소까지 만들어 둘 필요는 없잖아. 그냥 공간 낭비일 뿐인데.”
“당연히 계획이 있기는 했지. 그것도 아주 장대한 계획이.”
나는 ‘문’ 옆의 벽을 손으로 쓸어 보았다.
“아까 마석이 전부 어디 있냐고 물었지?”
“응. 그랬지.”
“대부분은 여기 이 벽 안에 있어.”
“……벽 안에?”
타냐가 잘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 수밖에 없을 거다. 마석은 그 이름 그대로 돌 모양의 푸른색 결정이니까.
반면 이 벽은 그저 칙칙한 흙일뿐이다. 어떻게 정리했는지 자갈 하나 없이 매끈한 흙벽.
“……리안, 네가 뭐 착각하는 거 같은데, 마석은 설령 벽 안에 있더라도 겉에 붙어 있는 발광물질 때문에 그 빛이 밖으로 흘러나와. 혹시 한 5미터 넘게 깊이 파고들었으면 모를까. 하지만 그래선 창고란 게 의미가 없잖아?”
생각해 보니 그렇긴 하다. 원할 때 필요한 물건을 꺼내 쓸 수 없으면 창고란 이름이 무색해지니까.
이건 내가 실수했네. 더 나은 명칭이 있었을 텐데. 나는 재빨리 정정했다.
“확실히. 여긴 마석 창고라기보다는 저장소라는 이름이 더 어울리겠다. 딱히 원하는 대로 꺼내 쓸려고 만든 곳은 아니니까.”
“그럼 마석을 진짜 안 깊숙이 박아 뒀다는 거야?”
“아니. 그렇진 않아. 마석을 박아 둔 게 아니라, 녹여 둔 거거든.”
“……마석을 녹여?”
타냐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수백 년 동안 모은 마석을 벽 안에 녹여 두는 것. 그게 바로 지금까지 제국이 해 왔던 일이야.”
* * *
마석의 사용처는 매우 다양하다. 이 세계에서 전기와 같은 거니까. 대충 떠오르는 것만 나열해 봐도 마도구, 마법진 등등 대륙 최중요 물품밖에 없었다.
기술이 발전하지 않은 이곳에서 몇몇 부분만은 현대를 능가하는 생활을 즐길 수 있게 해 주는 원동력이라 해야 하나.
그 중요성은 세 왕국이 그토록 두려워하던 제국에 싸움을 건 것만으로 알 수 있으리라.
하지만 이런 마석에도 한 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는데, 바로 성질이 바뀌면 안에 있는 마나가 사라진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마석을 팔팔 끓는 마그마 속에 넣어 녹여 버리는 것은 가능하다. 허나 그렇게 남은 액체는 그저 아무 능력 없는 뜨거운 쇳물이 될 뿐이다.
덕분에 마석은 항상 그 모습 자체로만 사용되었는데, 수백 년간 이를 다른 형태로 보존하는 기술은 없었다.
그래. 적어도 겉으로는 말이다.
“정확히는 없었다기보다 그냥 숨긴 거였지.”
“……어째서?”
“안 그래도 소비량 많은 연료인데, 그런 기술까지 풀어 버리면 사용량이 극심하게 올랐을 거 아니야. 그럼 제국이 마석을 사 모으는 동안 엄청난 장애가 됐겠지.”
“…….”
타냐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이내 한마디를 꺼내었다.
“하지만, 그런 이유는 뭔데? 분명 마나가 풍부한 곳에서 문의 봉인이 더 오래 지속된다고 듣기는 했지만…… 그런 거면 굳이 마석을 녹여서 벽에 넣는다거나 하는 복잡한 과정은 필요 없잖아. 특히 여긴 마석을 산처럼 쌓아 놔도 될 만큼 공간이 넓으니까.”
타냐의 말에 나도 잠시 동안 입을 다물었다. 생각보다 이해가 빨라서다.
솔직히 처음부터 끝까지 다 설명해 줘야 할 거라 여겼는데…… 내가 얘를 너무 무시했나? 하긴 원래도 응용력이 좀 뒤떨어지는 거지 머리가 나쁜 건 아니었으니까.
“이유는 간단해. 혹시 여기 들어오고 나서 특이점 못 느꼈어?”
답하기 전에 슬쩍 묻자, 타냐가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봤다. 그리곤 뭐라 입을 열려고 하더니, 뭔가 생각난 듯 두 눈을 감았다.
그렇게 30초쯤 지났을까. 녀석이 놀란 얼굴로 일어나서 손을 들었다.
“이곳의 마나가…….”
“지상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풍부하지.”
나는 피식 웃으며 공기를 잡듯 손을 휘저었다.
“보통 고체 상태인 마석은 마나가 흘러나오는 양이 한정되어 있어. 만약 네 말대로 여길 그냥 마석으로 채웠으면 지금 이 농도의 절반도 못 채웠을걸.”
“그럼 봉인 효율 때문에 이랬다는 거야? 마나가 풍부할수록 문의 개방도 늦어지니까?”
그것도 그건데, 더 중요한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나는 아까 손으로 쓸었던 벽을 가리키며 타냐를 바라봤다.
“저거 한 번 만져 볼래?”
“어? 어…….”
“어때? 단단하지?”
“그야 뭐……벽이니까.”
대체 뭘 말하려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이다. 나는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말을 이었다.
“그럼 이제 거기 네가 가진 공격 기술 중 가장 강한 걸 한번 발사해 볼래?”
내 말에 타냐가 기겁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러다 여기 무너지면 어떻게 하려고?”
“그럴 일 없으니까 한번 해 봐.”
타냐는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더니 에라 모르겠다는 식으로 부적을 꺼냈다. 그리곤 그걸 벽에다 턱, 붙이고는 저 멀리 떨어졌다.
“……뭐 해?”
“너도 빨리 와. 자칫하면 다친단 말이야.”
……별로 그렇게 걱정할 거 없는데.
나는 그리 생각하면서도 순순히 타냐의 옆까지 다가갔다. 그러자 이제 비교적 안전하다는 판단이 섰는지 타냐가 주술을 발동시켰다.
콰아아앙!
순식간에 타오른 부적이 엄청난 폭발을 일으키며 굉음을 냈다.
확실히 자신할 만한 위력이었지만, 정작 벽은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
타냐는 멍한 얼굴로 그곳까지 걸어갔다.
“……어떻게 이런…… 분명 황궁…… 아니, 시청까지 한 번에 날려 버릴 수 있는 부적이었는데…….”
“…….”
비교 대상이 좀 껄끄럽다. 혹시 아닌 척하면서 나한테 원한이라도 있던 건가?
나는 녀석과 살짝 떨어진 곳에 자리 잡으며 말을 이었다.
“이런 경우가 거의 없다 보니 아는 사람도 극소수지만, 흙은 일정 이상의 마나를 함유하면 이렇게 엄청난 강도를 지녀. 만약 부숴서 가지고 싶다면 특수한 과정을 거쳐서 만든 특정 재료를 써야만 하지.”
“그게 뭔데?”
알고는 있지만, 말해 줄 수는 없다. 딱히 믿지 못하는 건 아닌데, 원래 이런 건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유리한 법이니까.
나는 재빨리 말을 돌렸다.
“그보다 중요한 건 이로써 얻는 이득이지. 그게 뭐일 거 같아?”
“……글쎄? 다른 사람이 훔쳐갈 수 없다는 거?”
“정확해. 너 진짜 똑똑하구나.”
괜히 다시 정신 돌릴까 봐 과장되게 칭찬해 줬다. 내가 생각해도 어색해서 뻔히 눈치채지 않을까 했는데, 타냐는 그저 쑥스러워하는 얼굴로 입꼬리를 움찔거릴 뿐이었다.
저러면 조금 미안해지는데.
“아무튼, 그게 바로 마석을 저런 식으로 저장해 둔 두 번째 이유야. 다른 누가 쉽게 훔쳐가지 못하게.”
내 말에 타냐가 번뜩 정신을 차리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대체 뭘 하려고 저러나 하는데, 녀석이 갑자기 기대하는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상해. 이곳의 입구는 이미 황족이 아니면 절대 들어올 수 없을 정도로 보안을 철저히 했잖아. 애초부터 밖에서 오는 침입자가 전무한데, 그런 목적까지 가졌겠어?”
그러더니 나를 올려다본다. 마치 주인 칭찬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거기서 잠시 멈칫했다.
……아니. 이건 좀, 비유가 적절치 못했네. 사람보고 할 생각이 따로 있지. 주인이니 강아지니. 쟤가 왜 저러는지도 충분히 짐작하고 있으면서.
나는 속으로 쓰게 웃으면서 일단 칭찬해 줬다. 그렇다고 저 표정을 무시하는 것도 죄책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맞아. 저건 밖에서 오는 침입자들을 대비한 게 아니야.”
“……그럼?”
“내부에서 나오는 적들을 대비한 거지.”
내 말에 무언가 깨닫는 게 있었는지 타냐가 입을 크게 벌리고 ‘문’을 바라봤다.
“하, 하지만 분명 ‘문’은 언제든지 위치를 변경할 수 있다고…… 그래서 절대 대비를 할 수 없었다고 들었는데…….”
“그게 제일 중요한 점이긴 하지.”
“……설마 선조님께서 ‘문’을 고정할 방법을 개발해 내신 거야?”
타냐의 눈이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사실 그럴 만도 하다. 이계의 침공은 녀석들의 강함도 강함이지만, 예측할 수 없는 소환 위치가 더 큰 문제였으니까. 하지만.
“그걸 개발해 냈다면 해방 왕이 후손을 포기했을 리가 없잖아.”
“……그건 그렇긴 하지.”
다가왔던 희망을 눈앞에서 빼앗긴 얼굴로 타냐가 시무룩하게 고개 숙였다. 그러더니 이번에도 뭔가 생각해 낸 듯 번쩍 머리를 들어 올렸다.
“그래도 여길 만드셨다는 건 그분께서도 문을 고정시킬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하셨다는 거 아니야? 최소한 1프로라도.”
“그보다는 낮게 판단했을걸. 한 0.000001프로 되려나. 그리고…… 결국 성공하지 못하기도 했고.”
“아…….”
타냐가 다시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내가 굳이 덧붙이지 않은 이야기를 짐작한 게 틀림없다. 그게 성공했으면 역시 제국의 황제…… 그러니까 타냐의 아버지도 해방 왕처럼 포기하지 않았을 거란 것 말이다.
“……그럼, 결국 방법이 없는 거네.”
“그렇진 않아.”
나는 녀석의 기분을 조금 풀어 주기 위해 일부러 조금 과장된 기색으로 말했다.
“해방 왕도, 제국도 실패했지만, 적어도 나는 저 문을 고정시킬 수 있는 방법을 하나 알고 있으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