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의 코드가 보여-211화 (211/225)

너의 코드가 보여 (211)

돌아온 레이튼엔 활기가 가득했다. 심지어 구걸과 잡일을 맡고 있던 아이들이 등교를 위해 지나다니는 통에 얼핏 정신없어 보이기까지 했다.

저 사람들이 모두 제 몫을 하기까지 얼마나 걸리려나.

나는 그 시간을 속으로 계산해 보면서 이제는 시청이 된 황궁의 담을 넘어갔다. 그러자 그 즉시 안을 경계하고 있던 1기사단 몇몇이 검을 들고 달려 나왔다.

“누구…… 리안 님이셨습니까?”

내가 쓰고 있던 타른헬름을 벗자, 그들이 김샌 얼굴로 검을 수납했다.

“대체 어디 가셨던 겁니까?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리안 님을 대체 얼마나 찾았는지 아십니까?”

“서류 때문에?”

“달리 또 뭐 있겠습니까.”

그렇겠지.

나도 모르게 한숨부터 나왔다. 나는 이 세계의 행정처리 담당이 되기 위해 태어난 걸까. 내 영혼은 정말 이런 세상이 좋아서 찾아온 건가 하는 의심도 들었다.

하지만 이내 전부 접어 버렸다.

뭐 어쩌겠나. 다 내 업보인 것을. 내 영혼도 설마 내가 찔려 죽는 게 칼이 아니라 종이뭉치가 될 줄은 몰랐겠지.

나는 표정을 원상복귀 시키며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뒤따라오는 1기사단 둘을 향해 말했다.

“테르베로츠 님한테 전해 줘. 잠깐 자리를 비웠던 것은 개인적인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서였고, 아직 공적인 용건이 하나 더 남아 있다고.”

“공적인 용건이요?”

왼쪽에 있던 기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어왔다. 아마 ‘네 방에 쌓인 서류가 공적인 용건이 아니면 뭐냐’는 의문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세상에 공적인 일은 보통 두 가지로 나뉘지. 혹시 뭔지 알고 있어?”

“하나는 알 것 같습니다. 밀린 서류를 처리하는 거지요.”

“잘 알고 있네. 그럼 다른 하나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기사가 머리를 긁적이며 나를 바라봤다. 나는 그걸 보면서 재차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바로 서류가 생길 일을 만드는 것이지.”

이건 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세상일을 아우르는 이치 같은 것이었지.

* * *

나를 호위해 주던 기사들과 헤어지고 도착한 곳은 타냐의 방이었다. 공식적으로는 내 지인의 직위로 자리 잡고 있었는데, 덕분에 얘는 지 고향 집에 왔는데도 손님방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생각보다 불만은 없는 것 같아 다행이었지만, 역시 좁디좁은 내부를 보니 뭔가 안쓰럽기는 하다.

옛날에는 원래 있던 그 귀족 저택까지 무슨 개집처럼 보던 애니까.

“……왜 갑자기 들이닥쳐서는 내 방만 훑어보는 건데?”

문틈 사이로 얼굴을 빼꼼 내밀고 있던 타냐가 슬쩍 몸을 뺐다. 이제 복도와 녀석의 방이 맞붙은 공간은 밀리미터 단위로 계산해야 할 정도가 되었다.

“나 별로 예전처럼 어지럽히고 살지는 않아.”

“근데 왜 가려?”

“……깨끗한지 안 깨끗한지와는 별개의 문제야.”

그런 건가?

솔직히 잘 이해는 안 됐다. 사실 나는 방 문고리가 고장 난 채로 10년 넘게 방치한 과거가 있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생각해 보니 굳이 이해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그냥 존중으로 충분하겠지. 별로 지금 중요한 것도 아니었고.

“방에 들어가는 게 내키지 않으면, 잠깐 나와 줄 수 있어? 어차피 부탁할 것도 있어서 어디 좀 같이 가야 할 거 같은데.”

“……같이? 어디?”

다행히 이번 건 별문제 될 게 없었는지 타냐가 재빨리 밖으로 나왔다.

“혹시 황궁 구경 좀 시켜 달란 거면 나도 잘 몰라. 워낙 어릴 때이기도 했고, 지금은 사실상 거의 갈아엎듯 공사한 거라 구조가 워낙 바뀌기도 해서…….”

“그래도 지하 공간은 건들지 않았잖아.”

당연히 알 거라고 생각해서 대수롭지 않게 말했는데, 타냐는 잠시 멈칫하다 의미심장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지하 공간? 그게 어디를 말하는 거야?”

“어…….”

나는 잠시 당황해서 말끝을 흐렸다.

설마 얘, 모르고 있었던 건가?

하긴, 그럴 수도 있겠다. 황실에 전해져 내려오는 비밀이라고는 해도 얘가 쫓겨나갈 땐 8살밖에 안 됐었으니까. 감춰져 있던 사실들을 전부 익히기엔 많이 부족한 나이다.

그보다 이러면 조금 곤란해지는데…….

지금까지 내가 아는 티를 낸 것들이야 그렇다 쳐도, 황족인 본인조차 모르던 걸 내가 혼자 알고 있다는 건 확실히 이상하지 않나.

원래 내가 아는 사실을 다른 사람도 안다는 걸 받아들이는 건 쉬워도, 나만 알아야 하는 사실을 다른 사람만 안다는 걸 받아들이긴 어려운 법이다. 경계도가 다르단 거다 경계도가.

설마 이제 와서 나를 뭐 의심하고 그럴 것 같진 않은데, 확실히 조심성이 좀 부족했다.

말하기 전에 먼저 생각했어야 하는 사안인데.

“그…… 얼마 전 발견한 황궁 고서에서 나온 얘긴데…….”

“아빠가 그런 거 없댔는데.”

그랬지. 얘가 누구인지를 잠시 망각했다. 심지어 얼마 전 1기사 단장이 얘기한 건데도.

뭐라고 해야 하나 잠시 망설이고 있자, 타냐가 갑자기 한숨을 쉬면서 손을 내저었다.

“됐어. 어디서 얻은 정보인지 궁금하기는 해도, 네가 거짓말하는 건 별로 듣고 싶지 않으니까.”

“……미안.”

“그래도 때가 되면 확실히 설명해 줄 거지?”

다짐을 받는다기보단 본인이 그리 믿기 위해 중얼거리는 것에 가까운 투다. 나는 조금 고민하다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렇게까지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그럼 됐어.”

타냐가 옆으로 고개를 돌리며 작게 말을 이었다.

“그 지하 공간인지 뭔지 하는 곳이나 안내해 봐. 어차피 황족의 핏줄이 있어야만 열린다든가 하는 식이라 나한테 왔을 거 아니야.”

“…….”

정답이었다. 저렇게 말하니 내가 뭐 이용해 먹기라도 하는 느낌이라서 썩 개의치는 않았지만.

……아니, 실제로 별다를 것도 없나.

쟤가 나한테 호감을 갖고 있다는 것도 알고, 그로 인해 내심 내 부탁을 거절하지 못할 거라 생각한 것도 사실이니까.

나도 모르게 입가에 쓴웃음이 지어진 것을 느끼며 발걸음을 옮겼다. 설령 지금 와 죄책감이 느껴진다고 해도, 내 감정 하나로 계획을 망가뜨리기엔 이미 너무 멀리 왔기 때문이다.

* * *

제국의 황궁에는 마땅히 지하라고 할 만한 공간이 극히 드물었다. 창고나 기록원이 몇 군데 존재하긴 했는데, 건물 규모에 비하면 코딱지만 한 크기였던 탓이다.

이건 사실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다.

높은 건축물을 지을 기술이 없는 이곳에선 지하를 넓게 짓는 것이 유행 아닌 유행 중 하나였으니까. 재산 좀 있다 하는 귀족들은 와인 저장고니 쓸 일도 없는 지하 감옥이니 설계부터 하는 게 보통이었단 소리다.

한데 돈이 없는 것도 아닐 황실에서 이용하는 곳이 지상 부분뿐이라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지만, 이상한 일인 것은 분명하지 않나. 덕분에 ‘숨겨진 황궁의 지하’에 대한 소문은 제국 전성기 시절 끊임없이 돌던 미스터리 중 하나였다. 물론 황실은 헛소문일 뿐이라며 단번에 일축했지만.

“그런데 설마 진짜로 존재했을 줄이야…….”

황궁 구석의 비밀 장치를 누르고 들어온 거대한 비밀 공간. 그 안에 있던 거대한 석문 앞에 선 타냐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황실의 일원이었던 저 녀석도 저러는 걸 보면 미스터리 중 몇 개나 사실일지 나도 좀 헷갈린다.

키탄은 내가 미래를 본 게 아니라 겪은 거라고 말했지만, 그게 뭔 차인지 솔직히 지금도 정확하게 이해하기 힘들었으니까. 알고 있는 것과 다를 가능성은 충분히 있지 않나.

“……그래서 내가 이제 뭘 해야 하는데? 혹시 내 피를 떨구거나 그래야 하는 거야?”

“아니, 사실은 네 목숨…….”

분위기도 풀 겸 장난삼아 지껄이려다가, 너무도 진지하게 보는 눈빛에 포기했다.

“그냥 저기 손바닥만 대면 돼. 황실의 핏줄이면 인식하고 바로 열릴 거거든.”

“만약 황실의 핏줄이 아닌 사람이 가져다 대면?”

“콰앙! 날아가는 거지.”

“……이번에는 농담 아니지?”

“응.”

애초에 황실에서 그렇게까지 이곳을 숨긴 이유가 그거다. 자칫하다 뚫려서 안이 전부 파괴될까 해서. 하물며 기회가 두 번 있는 것도 아니니까.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자 타냐가 폭,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가끔 선조님이 이해가 안 갈 때가 있어. 대체 왜 이렇게까지 자비 없는 장치들을 준비해 두신 건지.”

글쎄, 지 잘난 것밖에 모르는 나르시즘 새끼라 그런 게 아니었을까?

그 말이 목구멍까지 튀어나왔지만, 재빨리 주워 담았다. 아무래도 후손 앞에서 할 얘기는 아니란 생각이 들어서다.

아무튼, 타냐는 긴장된 모습을 보이면서도 순순히 석문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머지않아 쿠구궁, 소리를 내며 문이 양옆으로 열렸다.

이펙트 하나 없어 심심해 보이기까지 했지만, 저게 원래 해방 왕 스타일이다. 효율성만 추구하겠단 거지. 인간미는 둘째다.

그래도 안에 펼쳐진 광경만은 볼만했다.

거의 황궁만큼 넓은 공간 중간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만 하나 덜렁 있는데, 이게 휑한 느낌보다는 시원한 느낌이 들었던 거다.

옆에 있던 타냐가 안으로 들어서며 감탄했다.

“진짜로 황궁 밑에 이런 곳이 있었을 줄이야……. 그런데 여긴 뭐 하는 데야?”

당연히 나라면 알고 있을 거라는 듯한 표정이다. 실제로도 그 예상이 맞았기에, 나는 계단 쪽으로 다가가면서 입을 열었다.

“황실의 마석 창고.”

“……마석? 마석을 여기다 모은 거였어?”

“응.”

“하지만 여기 마석이 대체 어디…… 아니, 그보다 나는 황실이 마석을 모으는 이유는 분명 침략을 미루기 위해서라 들었는데 왜 여기에…….”

“그거야 간단한 이유지.”

나는 계단을 내려가며 타냐의 말을 끊었다.

“여기가 바로 네가 말로만 들었을 ‘문’이 있는 장소이기도 하니까.”

“……문?”

타냐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중얼거렸다. 나는 거기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해서 계단을 내려갔다.

중간중간 멈춰 섰다간 목적지에 도착하는 건 한밤중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았으니까.

이내 정신을 차린 타냐가 금세 따라붙었다.

“잠깐만! 나는 분명 ‘문’이 황실 지하에 있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네가 좀 더 자란 다음 알려 줄 생각이었던 거겠지. 아무리 봉인되었다지만, ‘문’이 제국 수도 중심부에 있다는 건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니까.”

“그런 걸 너는 어떻게…….”

무심코 나온 말인지, 타냐가 곧바로 고개 저었다.

“아, 아니. 미안. 나중에 알려 준다 한 거 잊은 건 아닌데…….”

“됐어. 뭐 그리 잘못한 일이라고.”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 별거 아닌 일이었음에도 뭐 큰일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타냐가 계속해서 내 눈치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도 진짜 못 할 짓이군. 뭔가 죄책감을 살짝살짝 건드린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분위기가 어색해진 것은 사실이었기에 더 이어지는 대화는 없었다.

나도 어차피 내려가면 전부 알게 될 일을 먼저 나서 알려 주려 하지도 않았고.

그렇게 어색한 침묵과 함께 수 시간쯤 밑으로 걸어갔을까.

“이제 다 왔어.”

우리는 기어코 황실 지하의 끄트머리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곳이 바로 ‘문’이 봉인된 장소야.”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