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210)
“허……진짜였잖아. 다른 사도의 능력을 얻을 수 있다는 게.”
멍하니 허공의 흑철검을 바라보고 있는데, 루카르드가 감탄을 흘리며 가까이 다가왔다.
“아무리 그 키탄의 사도 능력이래도 말이 되나 싶긴 한데…… 이걸 직접 눈으로 보고 있으니 뭐라 부정을 할 수도 없고……거참.”
그가 쯧쯧 혀를 차더니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보다, 설마 원래 얻었던 아몬의 사도 능력까지 계속해서 쓸 수 있는 건 아니지? 진짜 그것까지 가능하면 데피티 신한테 가서 좀 따지려고 그러는데. 왜 내 능력은 이거 하나밖에 안 되냐고.”
“……진짜로 그러려는 건 아니죠?”
“당연히 아니지. 만나고 싶어도 만날 방법이 없잖아. 교황 할배가 들어주지도 않을 테니까.”
만날 수 있었다면 따졌을 거란 얘기로 들린다. 이 사람도 아리나랑 비슷한 과였나?
어쨌든,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붕괴’를 아직도 사용할 수 있는지는 나도 궁금했기 때문이다. 이어서 손바닥을 꺾고, 손가락을 돌리자.
붕괴는 발동되지 않고 그저 잠잠했다.
반쯤 예상하고 있던 일이긴 하지만, 이거 좀 시원섭섭한데…….
그때, 옆에 있던 루카르드가 피식 웃었다.
“아, 다행이다. 하마터면 개종할 뻔했네.”
“……거 당사자 앞에 두고 너무 좋아하시는 거 아니에요?”
“그래도 그렇잖아. 다른 사도 능력을 똑같이 사용할 수 있는데, 몇 개씩 써먹을 수 있으면 그건 너무 사기 아니겠어?”
“뭐, 그것도 그렇긴 한데…….”
나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입맛을 다시며 ‘창조’를 취소했다. 유지하는 데 빠져나가는 기운이 상상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루카르드는 점점 희미해져 가는 흑철검을 보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너무 실망하지는 마라. 지금처럼 원하는 사도의 능력을 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근데 저건 뭐냐?”
루카르드가 말을 하다말고 황당한 얼굴로 내 손바닥이 향하고 있던 장소를 가리켰다.
왜 저러는 거지?
순간 장난치려고 저러나 생각도 했지만, 그렇다기엔 표정이 너무 진지했다.
나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그에게 향해 있던 시선을 다시 뒤로 돌렸다. 그리고 곧바로 특이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붕괴’를 사용했을 때만 나오는, 공간의 울렁거림 말이다.
* * *
몇 번 이어진 시도 끝에 능력 발동 조건을 대충 알아낼 수 있었다. ‘창조’를 사용하고 있을 때는 ‘붕괴’를 쓸 수 없다든가, 둘을 사용할 수 있는 횟수가 겹쳐서 판정된다든가.
아, 창조는 붕괴보다 위급의 판정인지 1회가 붕괴의 2회와 같게 취급된다는 것도 알아냈다. 예를 들면 하루 10번 쓸 수 있는 붕괴가 3번의 창조를 사용한 날은 4번밖에 더 사용할 수 없는 식으로 말이다.
나는 만족스레 고개를 들고, 손바닥을 원래대로 되돌렸다.
아몬과 데피티의 능력 둘 다 같이 써 보려다 몇 번씩이나 이상한 포즈를 하게 되었지만, 후회는 없다. 그만큼 알아낸 것이 많았으니까.
하지만 그런 나와는 분위기가 완전히 딴판인 인간…… 아니, 수인이 하나 있었다. 바로 졸린 기색까지 다 던져 버린 얼굴로 끝까지 옆에서 나 하는 꼴을 지켜보던 루카르드다.
그는 피곤과는 다른 의미로 퀭한 눈을 하곤 나를 보고 음침하게 중얼거렸다.
“이건 사기야…….”
“어우, 씨. 깜짝이야.”
솔직히 중간부턴 반쯤 잊어먹고 있었기 때문에 진심으로 놀라고 말았다. 워낙 굳어 있어서 사도를 본뜬 동상 같은 건가 했지.
“아직도 안 돌아가고 있었어요? 벌써 해 뜨려고 그러는데?”
“……이제 슬슬 돌아가야지. 나는 지금부터가 잠들 시간이니까. 그보다.”
루카르드가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하늘을 향해 혀를 찼다.
“똑같은 5대 신이면서 대체 왜 데피티님의 권능은 하나뿐인 거야? 인공 제작이라 그런가. 이거 항의해도 되는 부분이지?”
“글쎄요…….”
내가 볼 때 항의는 본인이 받아야 할 거 같은데.
아무리 데피티가 억지로 신앙을 끌어모아 만들어진 신이라지만, 본인의 사도에게 저런 말을 듣고 기분이 좋을 것 같지는 않았다. 세상에서 제일 나쁜 게 팩트 폭행이라는 말도 있고.
하지만 루카르드는 그런 점에 대해선 전혀 개의치 않는지 대수롭지 않게 옷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러워서 사표 쓰든가 해야지. 근데 사도는 그만두겠단 말을 누구한테 해야 하냐?”
“그걸 저한테 물어보셔도…….”
“하기야, 내가 사도 후배한테 이런 걸 물어서 뭐 하냐. ……아니, 잠깐. 생각해 보니 애초에 너 사도도 아니잖아. 권능만 받아 처먹었으니까. 이거 갑자기 또 억울하네.”
“…….”
“미안하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미안한 표정 꾸며 내진 마라. 그냥 귀찮아서 대충 장단 맞춰 주고 있는 거 뻔히 보이니까.”
그 말에 나는 곧바로 표정을 되돌리고 어깨를 으쓱였다.
“뭐 어쩌겠어요? 세상이 원래 불공평한 것을. 루카르드 님은 저를 질투하지만, 반대로 루카르드 님을 질투한 사람도 많을 거 아니에요. 결국 정도의 차이죠. 하늘 위의 하늘이라고 해야 하나. 적어도 루카르드 님은 그런 부분에서 억울해할 처지가 못 될 걸요.”
“……너 되게 재수 없는 부분도 있구나.”
“대충 장단 맞춰주지 말라고 한 것도 역시 루카르드 님이잖아요.”
창조해 냈던 흑철검 십여 개를 회수하며 말했다.
이제 횟수 제한은 있어도 한 번에 생성할 수 있는 개수는 내가 넣는 기운에 따라 다르단 것도 알았다.
“그보다 전 이만 가 보려고 하는데, 혹시 뭐 주실 만한 팁 같은 건 없어요? 만든 걸 유지하는 기운을 아낄 수 있는 방법이라든가.”
“이게 뻔뻔하게 내 권능 훔쳐 놓고 골수까지 빼먹으려 드네. 그런 건 없어 이놈아. 착실하게 수련해라.”
“분명 대충 써먹을 수 있는 꼼수라도 있을 거 같은데…….”
의심스레 쳐다보며 말끝을 흐리자, 루카르드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진짜 알려 줄 만한 거 없어. 만약 있대도 알려 주고 싶지 않고. 이미 야수의 심장 하나로 퉁 치기엔 내가 손해를 너무 많이 봤잖아.”
“거 째째하기는.”
나는 비교를 위해 꺼내 뒀던 흑철검을 수납하면서 걸음을 돌렸다.
“그럼 전 진짜 가 볼게요. 도움 주셔서 감사하고, 만수무강하세요.”
“오냐.”
“그런데 진짜 알려 줄 만한 거 없어요?”
나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묻자, 루카르드의 이마에 커다랗게 주름이 떠올랐다. 그는 순간 고개를 숙이더니, 곧바로 주위에 수십 개의 무기들을 생성해 냈다.
오히려 아까 전 진심으로 붙을 때보다 위력이 더 강해 보이는 건 착각일까?
나는 거기서 뭐라 더 덧붙이지 않고 재빨리 밖으로 빠져나갔다. 자칫하면 진짜로 저걸 쏘아 보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 *
“진짜 더 가르쳐 줄 만한 게 없으셨던 겁니까?”
“너까지 왜 이러냐 진짜.”
어느새 다가온 곰 신관의 질문에 루카르드가 진저리치며 만들어 낸 무기들을 회수했다. 그가 되돌아온 신성력의 양을 가늠해 보는데, 곰 신관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예전부터 사도님께서 권능에 능숙해지겠다며 몇 년간 수련해 온 걸 아니까 하는 말입니다. 설마 아무런 성과도 없는데 그러지는 않았을 거 아닙니까?”
“…….”
질문을 들었을 것이 분명함에도, 루카르드는 마치 귀가 막힌 사람처럼 딴청을 피울 뿐이었다.
그를 보던 곰 신관은 의아함을 참을 수 없었다. 그가 아는 루카르드는 결코 질투 같은 걸로 가르침을 아끼는 분이 아니었으니까.
설마 정말로 그 긴 시간을 의미 없이 허비하기만 했다는 말인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그의 시선에 담긴 감정이 점점 안쓰러움으로 변해 가자, 루카르드가 버럭 화를 냈다.
“넌 또 왜 그렇게 꼬나보는데? 너도 이제 내가 우스워? 앙?”
“그럴 리가요. 그냥 쳐다보는 것뿐입니다.”
“그냥 쳐다보기는. 딱 봐도 내가 헛고생했구나 생각하는 게 딱 보이는구만.”
“그렇게 보인다면 어쩔 수 없고요.”
“……왜 내 주위엔 이렇게 재수 없는 놈들밖에 없지?”
한탄하듯 중얼거린 루카르드가 이어서 내뱉듯이 말했다.
“하여튼 나는 의미 없는 헛고생을 한 건 아니었어. 착실하게 사도의 권능을 익혔고, 성과도 얻었지.”
“그럼 대체…….”
“왜 팁 같은 걸 안 알려 줬냐고?”
곰 신관이 고개를 끄덕이자, 루카르드가 피식거리며 물었다.
“네가 올해 나이가 몇이더라?”
“스물여덟입니다.”
“그 얼굴로?”
“…….”
갑자기 카운터 펀치를 맞은 곰 신관의 말문이 막혔다. 그를 보던 루카르드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을 이었다.
“뭐, 겉쪽 나이가 어쨌든 내가 사도 능력 받을 때 너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새끼였다는 건 맞다는 거지?”
“……예. 제가 신전에 들어온 게 8살 때였으니까요.”
‘사도님께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안쪽 나이도 겉쪽 나이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만.’라는 말은 뺐다. 일단 상대는 그의 상관이었으니까.
하지만 불만이 표정으로 티가 났는지, 루카르드는 그를 귀엽다는 듯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그때 들어왔으면 확실히 헷갈릴 수도 있겠네. 내가 몇 년 동안 수련한 게 대체 뭔지.”
“……권능에 익숙해지기 위한 수련 아니었습니까?”
“권능에 익숙해지기 위한 수련은 맞는데,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뭐 꼼수를 배우고 그런 건 아니었어. 그냥 발동하는 방식 자체를 익히는 데 그만큼 오랜 시간이 걸린 거였지. 진짜로 더 알려 줄 만한 게 없었다는 소리야.”
“……발동 자체를 말입니까?”
곰 신관이 의아하게 되물었다.
확실히 어릴 때의 기억이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분명 그 ‘재앙을 벤 자’는 순식간에 검을 창조해 내지 않았던가. 그런 걸 루카르드가 익히기까지 몇 년이나 걸렸다는 건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는 수인족 중에서도 정상급 재능을 지닌 이였으니까.
“설마 그자의 재능이 사도님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소리입니까?”
“아니. 오히려 컨트롤 자체는 내가 더 낫지. 이건 자존심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라 그냥 사실이야.”
“그럼 대체 어째서…….”
“데피티님의 ‘창조’를 사용하기 위해선 신성력을 변환하는 과정이 들어가는데, 이게 정말 무지막지하게 어렵거든. 중간에 손실되는 기운이 엄청나게 많기도 하고.”
곰 신관의 말을 끊은 루카르드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시선은 리안이 떠났던 자리를 응시한 채로.
“그런데 걔는 키탄의 능력을 쓰는 데 신성력을 전혀 사용하지 않더라고. ‘붕괴’든 ‘창조’든 말이야. 그러니까 다른 신의 권능이라도 딱히 익숙해지는 과정이 필요 없는 거지.”
“……설마 신의 권능을 사용하는 데 마력을 썼다는 말씀입니까?”
“글쎄. 마력인지, 아니면 제 혼자 아는 정체 모를 힘인지는 모를 일이지.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해.”
루카르드가 늘어지게 하품하며 몸을 돌렸다.
“쟤가 믿는 신은 자신 하나뿐이라는 거지.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까지 신성력이 전무하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