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209)
솔직히 나는 좀 억울했다. 루카르드 귀에 속삭인 건 ‘멍멍’이지 ‘개새끼’가 아니었으니까. 아무리 깨우려 한다 쳐도 손님으로 와서 욕까지나 했겠는가.
얘는 진짜 개에 무슨 트라우마라도 있나?
하지만 그런 태평한 생각을 하고 있기에는 상황이 좀 급박했다. 녀석이 생성한 건 그냥 무기가 아닌, 극강한 신성력이 포함된 재해에 가까웠다. 신의 심판 비슷한 거라는 소리다.
하나하나가 2급의 경지에 맞먹는 공격.
막고자 하면 못 막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부상 정도는 각오해야 할 거다. 그것도 금방 회복할 수 있기는 한데, 방이 더러워지긴 하겠지. 피가 사방으로 튀어 버릴 테니까.
어차피 벌써 개판 된 마당에 뭐 그리 중요한 일인가 싶기도 하지만, 역시 이왕이면 깔끔하게 끝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치우는 것과 닦는 건 영역이 다르기도 하고.
“후우…….”
나는 앞으로 팔을 뻗고, 손바닥을 살짝 꺾었다. 그리고 아몬의 사도에게서 얻은 ‘붕괴’를 사용했다. 그러자 내 전방의 공간이 구불구불 일그러졌다.
“뭐……?”
뒤에서 곰 신관이 경악성을 토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거기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붕괴를 유지했다. 머지않아 발사된 무기들이 울렁거리는 허공에 부딪혔다.
끼기기긱.
보통의 경우와는 달리, 루카르드의 무기들은 곧장 구부러지지 않았다. 아마 권능이 담긴 공격이어서 그런 듯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것들은 공간을 절반쯤 파고들었을 때부터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한정된 영역에 작용하는 붕괴의 개념에 밀린 거다.
이내 비 내리는 것처럼 우수수 떨어진 무기들의 형태가 점차 희미해져 갔다. 그리고 잠시 후 그것들이 모두 완전히 자취를 감춘 그 순간.
“……이게 대체 뭔 일이래?”
드디어 루카르드가 눈을 떴다.
* * *
“이거 참. 미안, 미안. 오늘 좀 피곤해서 일찍 잠이 들었거든. 원래는 일어나 있을 시간 맞으니 실례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어.”
“그럼 다행이네요.”
“그래서, 재앙을 벤 자가 여기까지 온 이유는 뭐지? 아니 뭐, 한 번쯤 보고 싶다 생각은 했는데 말이야.”
루카르드는 생각보다 쾌활한 성격이었다. 잠결에 하는 짓 보고 되게 음울한 녀석일 줄 알았는데.
나는 대충 치워 둔 바닥에 앉으며 말했다.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부탁? 뭔데? 일단 말해 두지만, 돈은 못 꿔 줘. 우리 신전 별로 돈 없거든.”
그건 건물 외관 본 순간 짐작했다.
“돈이 아니라 사도 능력 때문에 찾아왔어요. 조금 실험해 보고 싶은 게 있는데, 아는 사도가 없어서요.”
“아, 그런 거라면 이해할 만하지.”
루카르드가 피식 웃으면서 건들거리는 자세로 내 쪽을 바라봤다.
“듣자하니 키탄의 사도가 된…… 아니, 사도의 능력만 딸랑 받은 게 최근이라지? 그동안 키탄은 사도가 한 명도 없었으니 뭐 남겨진 팁 같은 것도 없었을 테고.”
“말씀대로요. 조건이나 발동 방식 같은 게 조금 헷갈리더라고요.”
“으음…… 아까 얼핏 보니까 그 일렁거림은 아몬의 사도랑 비슷한 능력인 거 같긴 하던데……. 그쪽이랑은 내가 친분이 없어서 뭐라 조언하기가 좀 그렇네.”
“아, 그건 아몬의 사도 능력 맞아요. 제가 그 녀석 해치우고 얻은 거거든요.”
내가 태연히 말하자, 루카르드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뭘 잘못 들었나? 사도 능력이란 게 뭐 해치웠다고 얻을 수 있고 그런 건 아니었던 거 같은데.”
“키탄의 권능이 그거인 거 같더라고요. 다른 사도의 능력을 얻는 거.”
“…….”
한참을 침묵하던 루카르드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랄 마! 그건 사기잖아!”
“왜 대뜸 욕을 하고 그러세요.”
“말이 되는 소릴 해야 말이지! 아무리 키탄이 원래 이 대륙 주신이래도 정도가 있어야 할 거 아니야!”
“그걸 저한테 얘기해도.”
“……아무튼 나는 못 믿겠어. 직접 확인해 보지 않고서야.”
루카르드가 찌릿, 눈을 빛냈다.
“밖으로 나가자.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대충 뭐 때문에 온 건지는 알겠으니까, 모든 실험에 응해 줄게.”
“저야 그래 주면 감사하죠.”
땡잡았다 생각하며 그의 뒤를 따라갔다.
조금 험악해지는 실험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저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나와 줄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의외로 오늘 하루 만에 능력을 얻는 조건이나 중복 가능 여부 전부를 알아낼 수도 있겠는데.
아무튼,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넓은 공터에 도착했다. 루카르드는 맞은편에 서서 나를 향해 팔짱을 꼈다.
“좋아. 그럼 이제 뭘 해야 하는데? 싸우면 되나?”
“싸움은 이미 해 봤으니 뒤로 좀 넘기죠. 그보다는 온건한 쪽부터 실험해 보고 싶은데.”
“뭐든 내키는 대로 해 봐. 난 여기 가만히 있을 테니까.”
나는 감사의 의미로 한 번 고개를 숙이고, 이것저것 생각했던 것들을 확인해 보기 시작했다.
가벼운 접촉만으로 능력을 얻을 수 있는가부터, 상대의 피를 봐야 기능하는지 같은 비교적 과격한 실험까지.
루카르드는 본인이 말했던 것처럼 그 하나하나 전부 순순히 응해 줬지만, 아쉽게도 내가 알아낼 수 있던 건 전혀 없었다. 아무 설명 없었던 키탄에 대한 분노는 끓어올랐지만.
어쨌든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즈음. 루카르드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말했다.
“더 없으면 그만 한판 붙고 끝내지? 역시 사도 능력 대다수가 전투 관련된 분야인 만큼, 그쪽이 제일 가능성 있지 않겠어?”
“……그건 그렇긴 하죠.”
조금 침울해져서 답했다. 쉽게 갈 수 있다 생각한 방법은 전부 통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딱히 전투광도 아니다 보니 이왕이면 편하게 가고 싶었는데.
나는 한숨을 쉬며 물었다.
“혹시 좀 쉬엄쉬엄해 줄 생각 있어요?”
“그럴 수야 없지. 조건이 ‘전력을 다한 승리’ 같은 걸지도 모르니까. 만약 그런 거라면 실패했을 때 또 한 번 싸워야 하지 않겠어?”
“제가 지면요?”
“그럼 뭐……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내가 책임져야 할 문제는 아니잖아?”
그렇긴 하다. 나는 재차 한숨을 내쉬며 루카르드에게 달려들었다. 제발 이 방법만큼은 조건을 통과하길 진심으로 바라며.
* * *
“허억…… 헉…….”
연신 심호흡하며 차분히 숨을 골랐다.
젠장, 세긴 진짜 오질라게 세네. 2급 상위권 실력에 실전적인 사도 능력까지 붙으니 무슨 괴물이 따로 없다. 잠꼬대하는 걸 상대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해야 하나.
하마터면 질 뻔했네.
나는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루카르드에게 다가가 손을 뻗었다.
“괜찮으세요?”
“……아니. 뒤질 거 같아. 너 괴물이지 새끼야.”
“왜 또 욕을 하고 그러세요.”
“괴물이 아니고서야 방금 베인 옆구리가 곧바로 재생할 리가 없잖아……! 그건 트롤도 못 하는 거라고!”
루카르드가 바닥에 퉤, 침을 뱉으며 내 손을 잡고 일어났다.
“젠장, 솔직히 말해 봐. 너 사실 인간 아니지.”
“인간은 맞아요. 그냥 어쩌다 몸에 좋은 거 좀 이것저것 먹다 보니 이렇게 된 거뿐이지.”
“거, 보신 거리 좋은 것 좀 있으면 나도 좀 주지…….”
그가 말하는 중간, 품속에 있던 물건 하나를 꺼내 건네 줬다.
“이건 뭐냐?”
“‘야수의 심장’이요. 수인들이 제일 갈망하는 영약이라던데.”
“이, 이게 야수의 심장이라고?”
그 말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왜 그런 이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심장이란 명칭과 달리, 야수의 심장은 그냥 영초의 한 종류일 뿐이었다. 어차피 도와주는 대가로 넘겨주려고 준비해 온 거라 아까울 것도 없었고.
제 손 위에 얹어진 물건을 멍하니 바라보던 루카르드가 시선을 돌려 내게 말했다.
“너…… 생각보다 예의를 아는 녀석이었구나? 아까 되먹지 못한 괴물 새끼라고 했던 건 내가 사과할게.”
“…….”
그렇게까지 말했던가?
아무튼, 나는 잠시 제자리에 서서 상처와 피로를 전부 회복했다.
루카르드는 그런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손에 들린 ‘야수의 심장’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음……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그냥 줄일게. 그보다 어때? 실험은 성공한 거 같아?”
“이제 한번 확인해 봐야죠. 조건이 싸워서 승리한다가 맞는지.”
이것도 아니면 진짜 남는 건 상대를 죽이는 것밖에 없다. 그럼 사실상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극히 제한되겠지.
나는 잠시 심호흡한 뒤 살짝 고개를 숙였다. 루카르드에게 들은 ‘창조’의 발동 조건이다.
그리고…… 그다음은 어떻게 하라고 했더라? 아마 자신한테 가장 친숙한 물건을 하나 떠올리라고 했던 거 같은데.
아무래도 나한테 제일 친숙한 물건을 하나 꼽으라면 역시 컴퓨터다. 직업도 프로그래밍에 관련돼 있었고, 수십 년 가까이 붙어 있던 게 그쪽이기도 하니까. 애초에 ‘벨리아 대륙 전기’를 만든 게 컴퓨터를 통한 거 아니던가.
겨우 최근 몇 년 붙잡고 있던 검 같은 무기랑은 비교 대상 자체가 아니란 거지.
하지만 전기도 없는 이곳에 창조해 봤자 하등 쓸모없는 물건이기도 했다. 어찌어찌 그걸 해결한다 쳐도 제대로 작동될지도 의문이었고. 내가 컴퓨터 내부 부품을 하나하나 다 아는 건 아니었으니까.
결국 나는 나에게 두 번째로 익숙한 물건을 머릿속에 떠올려 냈다.
흑철검.
이야기 속에 나오는 성검이나 마검은커녕 오히려 평범한 쪽에 불과했지만, 그동안 나와 가장 오래 붙어 있던 녀석이다. 바이론의 능력을 흡수하거나 해서 이젠 평범하다는 수식어가 안 어울리는 녀석이기도 하고.
잘 때도 끼고 자던 물건이라 그런지 눈을 감고도 그 생김새가 바로 그려졌다. 루카르드는 이걸 형상화 과정이라 했다. 앞으로 구현화만 남았다.
그게 안 되면 이건 그냥 혼자 한 망상으로 그치고 말 뿐이다.
나는 떠올린 흑철검에 신성력을 부여하는 상상을 했다. 대충 흰빛과 기운이 들어가는 모습을 떠올렸다는 소리다.
내 상상력은 내 생각보다 훨씬 뛰어났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릿속의 흑철검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이젠 이게 현실인지 아닌지도 조금 헷갈린다.
어쨌든, 이걸로 전부 끝난 건 아니다. 아직 ‘꺼내는’ 단계가 남았으니까.
나는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흑철검이 내 머리 옆으로 떠오르는 장면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위치에 머릿속으로만 채워 넣었던 기운과 동일한 양의 혼원력을 내뿜었다. 계속해서 허탕으로 남았던 순서다. 그런데…….
“……후우.”
아마 이번에도 허탕으로 남으려나 보다. 내가 내뿜은 혼원력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가만히 머무르기만 할 뿐, 소모되는 기색이 없었다.
결국 상대를 죽이는 것밖에 정답은 없다는 건가…….
아쉬운 마음에 다시 기운을 회수하려 한 찰나.
“멈추지 마!”
조금 떨어진 데서 루카르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분명 뭔가 형상되려던 분위기였어. 믿기는 힘들지만…….”
그가 조금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아마, 검이었던 것 같아.”
“…….”
그렇단 말이지.
그럼 부족한 건 내 숙련도일 뿐이라는 소리다. 나는 폭풍우 속 등대를 만난 선장의 심정으로 내뿜은 기운을 조절했다. 그리고 슬쩍 눈을 뜬 순간, 나는 내 머리 옆에 떠오른 흑철검을 발견할 수 있었다. 허리춤에 걸린 진짜와는 별개의 ‘진짜’를 말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