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208)
“……수인족 사도라면…… 데피티님의 종, 루카르드를 말하는 건가?”
계속해서 호의적이던 호족의 눈에 순간 경계심이 가득 찼다. 그는 한동안 나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침착하게 물었다.
“아무나 만날 수 있는 분은 아니지만, 그대에겐 자격이 있긴 하지. 허나 그분과 사적으로 만날 만한 일이 뭐가 있지? 재앙을 벤 자에게 종교가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 없는데.”
“말씀드렸다시피 사적인 일인지라 얘기하긴 좀 그렇군요.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해를 끼치는 일은 절…… 아마 없을 겁니다.”
말하던 중 단어를 바꾸자 호족이 어이없다는 눈으로 잠시 나를 응시했다. 하지만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내 한숨을 내쉬며 싱겁게 비켜섰다.
“그래. 종교쟁이만 아니면 됐지. 미안하군. 가끔 인간들 중에 데피티 님은 인정 못 하겠다며 와서 난동 피우는 작자들이 있어서 말이오.”
“역시 이해합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애초부터 이런 상황은 진작 예상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저 정도면 양호한 편이지. 게임에서는 인간의 몸으로 녀석을 만나러 왔다 밝히는 순간 바로 경비와 전투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으니까. 아까 그 하이에나도 이런 마음가짐으로 온 게 아니라면 진작 베었을 거다.
어쨌든, 성격 좋은 호족에게 신전의 위치를 듣고 곧장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간의 것과는 상당히 양식 차이가 있는 건물을 발견했다. 커다란 움집 같다고 할까. 안으로 들어서자, 곰의 귀를 단 신관 한 명이 다가와 인상을 썼다.
“꺼져라, 인간. 우리는 너를 환영하지 않아.”
그런 것치고는 대단한 환영 인사 같은데. 이런 응대는 처음 받아 봐서 궁금증 때문이라도 한 번 더 와 보겠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 정중하게 말했다.
“종교 문제로 온 거 아닙니다. 믿는 신도 없고요.”
“……믿는 신이 없어? 그게 가능한 얘긴가?”
“좀 특이하기는 하죠. 아무튼, 시비 걸자고 찾아온 건 아니란 소립니다.”
곰 신관은 의심스런 눈으로 나를 노려보더니 대뜸 팔짱을 꼈다. 저 덩치에 저 말투로 저러니 신관이 아니라 그냥 깡패 같다.
“믿기는 힘들지만, 만약 정말 시비 걸기 위해 찾아온 게 아니라면 일단 사과하지. 하지만 그럼 대체 우리 신전에는 무슨 목적으로 온 거지? 설마 입교하려는 건 아닐 테고.”
“사도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가능할까요?”
“될 것 같나?”
그렇게 말할 거라 생각했다. 나는 곰 신관에게 바로 부족장의 증표를 내밀었다. 그는 그걸 보고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재앙을 벤 자였나? 설마 이런 데서 만나게 될 줄은…….”
“알고 계셨습니까?”
“……보통 사람들에게도 그렇겠지만, 우리 신관들한테는 특히나 더 유명한 이름이니까. 신을 직접 대면하고 사도 직위 없이 사도의 힘을 받은 자로 말이야.”
물은 건 그쪽이 아니라 내가 부족장 직위를 받은 걸 알고 있었냐는 뜻이었는데……. 뭐, 어느 쪽이든 뜻만 통하면 됐나.
슬쩍 증표를 집어넣으며 다시 한 번 만남을 요청하려는데, 곰 신관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굳이 또 말할 것 없네. 바로 안내해 줄 테니까.”
“……그래도 되는 겁니까?”
갑자기 너무 달라진 태도에 놀라서 묻자, 그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루카르드 사도님께서도 그대를 많이 궁금해했거든. 언젠가 한 번 기회가 되면 만나 보고 싶다 버릇처럼 얘기하곤 했지.”
곰 신관은 그렇게 말하더니 내가 입을 열 틈도 주지 않고 바로 몸을 돌려 버렸다.
“그럼 따라오게. 조금 더 늦으면 시간에 못 맞출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예.”
대체 무슨 시간을 못 맞춘다는 거지?
나는 속으로 그런 의문을 품으면서도 순순히 곰 신관을 따라갔다. 만나 보면 알 수 있겠거니 해서다.
* * *
“…….”
곰 신관이 시간에 못 맞출지도 모른다 말한 건 상상 이상으로 별게 아니었다.
노크해도 대답이 없어 대뜸 문을 열었더니 스물 남짓 돼 보이는 남자 하나가 쿨쿨 자고 있는 거 아니겠나. 아무래도 낮잠 타임이 따로 있는 모양이었다.
음…… 이런 건 설정에 없었는데. 무턱대고 찾아온 건 나니 불만을 터뜨릴 수도 없고.
그냥 기다리면 되겠거니 맘 편히 생각하고 있는데, 곰 신관의 반응이 조금 극적이었다. 그는 갑자기 크게 한숨을 내쉬더니 곧 이마를 짚으며 내뱉듯이 말했다.
“……한발 늦었군.”
목소리가 마치 세상이라도 잃은 것 같다. 이게 그렇게나 큰일인가?
“조금 있으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한두 시간 정도는 충분히 기다릴 수 있는데요.”
“한두 시간으로 안 끝날 테니 문제지. 낮잠이 아니라, 그냥 잠을 주무시는 거거든. 아마 오늘 밤은 돼야 일어나실 거야.”
……잠? 지금 이 시간에?
확인 차 창문을 보니, 역시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보통은 착실히 하루 일과를 보내고 있을 타이밍이다.
혹시 쟤한테 야행성이라는 설정이라도 있었던가?
나는 쫑긋거리는 루카르드의 귀를 보면서 곰 신관에게 물었다.
“저분은 견족 아니었습니까? 개는 아침에 활동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내 질문에 곰 신관이 황당한 얼굴을 했다.
“루카르드님과 대화할 때는 만약에라도 그런 말은 꺼내지 말게. 저분이 제일 싫어하는 소리니까.”
“견족이 아닌가 보죠?”
“저분은 인랑족일세. 개랑은 관계가 없지.”
인랑족. 늑대라는 소리다. 그럼 개랑은 상당히 관계가 있는 거 아닌가? 대충 4촌쯤 되는 수준으로.
순간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이내 그냥 그런가보다 넘겼다. 인간 입장에선 사소해 보일지 몰라도 제들 딴에는 커다란 차이일 수도 있었으니까. 낮에 잠자고 있는 것도 그렇고.
그보다 이렇게 되면 조금 곤란하다. 안 그래도 바쁜 차에 잠깐 시간 내서 온 건데, 하루를 무의미하게 보낼 수는 없었으니까.
나는 조금 고민하다 물었다.
“멋대로 찾아온 주제에 실례인 거는 알지만, 혹시 잠깐 저분을 깨울 수는 없겠습니까? 제가 내일까진 꼭 레이튼으로 돌아가야 해서요.”
“……사실 깨우는 것 자체는 별로 문제가 안 되네. 그렇게 신경 사나운 분도 아니니 말이야. 개인 사정으로 깨운다 해도 쉽게 이해해 주시겠지.”
저렇게 말한다는 건 결국 다른 문제가 있다는 소리다. 그게 뭔지 물으려 하다가, 순간 수인들에게 많은 특성이 하나 생각났다.
“혹시 잠꼬대가 심하신 겁니까?”
“맞네.”
곰 신관이 머리를 긁적이며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예전에 몇 번 깨우려고 시도해 보았는데, 그때마다 꼭 깨운 사람을 공격해 오셨어. 물론 고의로 그러시는 건 절대 아닌데…….”
“어쨌든 공격한다는 게 문제라는 거군요.”
“그렇지.”
그가 긁적이던 손을 내리고 나를 바라봤다.
“게다가 저분은 사도의 능력은 둘째 치고 봐도 본신의 실력만 거의 1급에 달하지. 적어도 우리 신전 내에선 저분이 깨어날 때까지 버틸 수 있는 자가 없어.”
“음…….”
확실히. 본편 내 등장이 적어서 그렇지, 아마 스펙만 놓고 보면 최상위권에 달하는 강자였을 거다. 아무리 잠결에 하는 공격이라 해도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겠지.
나는 고민하는 척하다 다시 물었다.
“그럼 제가 저분을 한번 깨워 봐도 괜찮겠습니까? 적어도 일어날 때까지는 버틸 자신이 있어서요.”
“그대가?”
곰 신관이 팔짱을 끼고 한참 신음을 흘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이 자신 있으면 뭐 괜찮겠지. 내가 들은 재앙을 벤 자에 대한 소문의 겨우 절반만 사실이어도 그 정도는 아무 문제없을 테니 말이야. 하지만 저분을 대체 어떻게 깨울 생각이지? 건드린 순간 기습을 당할 수도 있는데.”
“그거야 방법이 있죠.”
나는 자신 있게 대답한 뒤 루카르드의 옆으로 다가가 귓가에 작게 단어 하나를 속삭거렸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크게 괴성을 질렀다.
“나는 개새끼가 아니야아아아!”
쿠웅!
내가 더 뭐 할 것도 없이 곧바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 * *
곰 신관, 하멜이 빛나는 눈으로 전투를 바라봤다. 루카르드의 외침과 함께 시작된 공격은, 전부 저 리안이라는 인간의 팔에 손쉽게 막히고 말았다.
그 뒤 이어지는 공방을 보고 있던 하멜이 속으로 감탄을 터뜨렸다.
‘재앙을 베었다는 칭호가 허언은 아닌 모양이군. 본 실력만 보면 분명 사도님 위야.’
쉬이 믿기 힘든 일이었다. 루카르드는 외모만 스물 남짓이지, 실제 나이는 쉰을 훨씬 넘긴 상태였으니까. 반면 저 인간은 들은 대로라면 외형과 속이 일치한다지 않았는가.
‘저 나이에 2급 최상위 실력이라니. 장래가 두렵군.’
심지어 정작 본 경지는 3급에 불과하지 않나. 저대로 꾸준히 성장한다면 그 단테라는 인간 빼고는 대적할 자가 아무도 없을 거다.
‘왜 연합엔 저런 인물이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 건지…….’
아쉬움에 한숨을 내뱉어 봤지만, 사실 하멜도 알고 있었다. 그들이 부족한 게 아니라 저 인간 둘이 워낙 규격 외란 것을.
괴물들이랑 비교하며 혀를 차는 게 신관이…… 아니, 어른이 할 짓은 아니지.
그는 그렇게 마음먹으며 쓴웃음 지었다. 아쉬운 건 아쉬운 거고, 이성은 판단을 제대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리안의 공격에 루카르드의 몸이 밀려나자 그의 표정이 일순 바뀌었다. 루카르드에 대한 걱정 탓은 아니었다.
‘생각보다 너무 안 일어나시는데…….’
보통 때라면 일어나고도 남았을 시간이다. 그의 얼굴에 수심이 깊어졌다.
‘……저러다 설마 사도의 능력까지 쓰시는 건 아니겠지?’
수십 년 동안 단 한 번 있던 일이다. 루카르드가 잠꼬대 중에 전력을 다했던 건. 그때 대체 어쩌다 그랬더라……. 곰곰이 생각하던 그의 안색이 순간 굳어졌다.
‘……분명 아버지께 개 같은 놈이란 소리를 들어서 그러지 않았던가?’
아마 맞는 거 같다. 그다음 날 바로 부모도 못 알아보는 새끼라며 호적을 파니 뭐니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었으니까.
‘……아버지한테 개 같은 놈이란 소리를 듣고 그 정도였는데, 모르는 인간한테 개새끼라는 소리를 들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하멜이 오랜만에 상상력을 발휘해 보려 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 결과가 이미 눈앞에서 벌어지려는 중이었으니까.
“나는…….”
조금씩 밀려나고 있던 루카르드가 갑자기 멈춰 서서 고개를 숙였다.
“개새끼가…….”
중얼거림과 동시에 그 주변 허공에서 무수한 숫자의 무기들이 튀어나온다. 만들어진 이종족들의 신, 데피티의 사도로 받은 권능이다. 무생물의 창조.
하멜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본 실력만으로 붙었을 때면 모를까, 사도의 능력까지 쓰면 아무리 상대가 그 ‘재앙을 벤 자’라도 버틸 수 있을 리가 없다.
그가 재빨리 정신을 붙잡고 루카르드를 깨우려 했지만, 조금 늦은 감이 있었다. 이미 그는 그렇게 만들어 낸 수십 개의 신성력 담긴 무기를 앞으로 쏘아 보내고 있었으니까.
루카르드는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기들이 발사된 순간 한 번 더 크게 소리쳤다.
“아니란 말이다아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