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207)
아카데미를 짓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냥 원래 있던 귀족 아카데미를 개조만 하면 됐기 때문이다. 황성을 다듬어 시장 건물을 만든 것과 비슷했다.
학생들을 가르칠 교수진을 구하는 것도 그닥 어렵지 않았다. 마법 쪽은 마탑에 기부금을 넣어 초청하는 것으로 해결했고, 검술 쪽은 놀고 있는 1기사단원들을 이용한 덕이다.
왕족에게나 붙을 초특급 인사들이었다.
하지만 의외로 진짜 문제가 된 건 그런 것들이 아니라 학생들의 수였다. 예상보다 들어오고자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올해 입학으로 신청한 숫자만 3만 5천 명. 대체 레이튼에 이 많은 아이들이 어디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일이나 한다고 안 올 것을 대비해 의무교육까지 생각했던 나로선 좋으면서도 당혹스런 일이었다. 사람들이 상상 이상으로 기사와 마법사에 대한 열망이 컸구나도 느꼈고.
아무튼, 준비해 둔 시설과 교수진으론 턱도 없었기에 재빨리 수선에 들어갔다.
시설을 따닥따닥 붙이고, 흑기사단은 아예 해체해서 전부 교사로 임명하고. 거기다 건물도 이리저리 분산하다 보니 어찌어찌 전부 수용은 가능한 수준이 됐다.
뭐, 사실 이건 닭장인가 싶은 정도긴 했지만……대부분은 만족했다. 이게 어디냐 감지덕지했다는 소리다.
어쨌든 이건 일시적인 현상으로, 몇 년쯤 지나면 자연히 나아질 일이었다. 매년마다 혹독한 시험으로 퇴학과 진급을 결정지을 예정이었으니까.
어차피 나도 자선사업 하려고 하는 짓은 아니다 보니 이거면 충분할 거다.
“후우…….”
마지막 아카데미 설립을 인정한다는 서류에 사인을 하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푹신한 게 피로가 전부 풀리는 기분이다.
수십 개 가까이 되는 입학식 하나하나에 전부 참석해서 그런가. 몸이 열 개라도 못 버틸 지경이다. 심지어 ‘초인’인데도 말이다.
그렇지만 무려 처음으로 개최하는 입학식을 빼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학생들이 누구 덕에 교육받고 있는지는 알려 줘야 하니까. 다시 말하지만, 그냥 자선사업이 아닌 것이다.
“그래도 차기 인재풀은 얼추 해결했고…….”
다시 자세를 바로 한 뒤 다음 서류로 넘겼다. 그리고 내용을 보자마자 곧장 한숨부터 나왔다.
이번 말썽거리는 역시나 세 왕국이었다.
중립도시 인정해 주자마자 거짓말로 사조직 키우냐며 경고해 왔는데, 진짜라고 하니 그에 대한 증거를 요구해 왔다.
일단 알겠다고는 해 놨지만, 그딴 건 없다는 게 문제다.
황실에서도 지들끼리 입으로만 전달했을 정도로 기밀을 지켜 왔던 일인데 증거랄 게 대체 어디 있겠는가.
굳이 따지자면 온 대륙에서 수입해 온 마석으로 결계를 지연시키고 있었다는 사실이 있긴 한데…… 이걸론 절대 납득하지 않을 거다.
그들이 제국을 치며 가장 강조했던 명분이 마석을 독점한다는 거였는데, 이걸 인정하면 그들은 그저 멸망을 앞당긴 병신 머저리가 되어 버리는 것이니까.
자칫하면 비난의 화살이 본인들에게 돌아갈 수도 있는 만큼 만약 사실이라는 걸 알아도 절대 시인하려 들지 않겠지.
이건 뭐 방법이 없다. 당장은 이걸로 수뇌부를 납득시켜 놓고 발표는 꾸며 내서 하는 수밖에.
제국은 결국 절대악으로 남게 되겠지만, 뭐 어쩌겠나. 실제로 걔네가 지들끼리 꾹꾹 감춰 놔서 일어난 일인 것도 사실인데.
타냐한텐 나중에 따로 사과하자. 진실은 야사처럼 남겨 두면 알아서들 해석하겠지.
어쨌든 그것까지 마치고 나자 드디어 산더미 같던 서류들이 사라졌다. 정확히는 ‘처리 완료’ 쪽으로 옮겨간 거였지만, 더 볼 필요 없다는 점에서 별로 틀린 표현은 아닐 거다.
나는 늘어지게 기지개를 하며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곧바로 보이는 중앙광장엔 활기가 가득했다. 이계의 침공 같은 건 잊은 듯한 모습이다.
아마 들었어도 딱히 실감이 안 와서 그런 거겠지. 500년 전 적들의 귀환은 저 멀리 있는데, 먹고 사는 문제는 바로 눈앞에 있으니까.
굳이 구체적인 날짜를 언급하지 않기를 잘했다. 그랬다면 다들 하나같이 ‘우리 언제 뒤지냐?’ 하고 세월만 보내고 있었을 거다.
그보다…… 이제 슬슬 미뤄 뒀던 일들을 해야 할 때가 된 거 같은데. 서류에 치여 정신 뒤편으로 옮겨 놨던 자기 강화라든가.
나는 잠시 멍하니 바깥을 바라보다가 작게 하품하며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일단 가장 빠르게 실행할 수 있는 방법부터 먼저 실험해 볼 생각이었다.
* * *
레이튼과 가장 멀리 떨어진 국가는 바로 겔리안 연합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수도를 기준으로 했을 때 얘기고, 의외로 국경 자체만 보면 상당히 가까이 붙어 있다.
이건 연합의 특수성 때문에 생긴 문제인데, 종족별로 특성이 너무 다르다 보니 한 곳에 모여 살 수 없던 탓이다.
예를 들어 정령은 자연이 풍부한 곳이 살기에 최고의 환경이지만, 뱀파이어들에겐 그것이 지옥과 비슷하지 않나.
아무튼 덕분에 연합의 국경은 은근 띄엄띄엄 떨어진 구간이 상당 부분 발생했는데, 여기 수인들의 도시 ‘다니아’도 그중 하나였다.
다만 다른 곳들과는 아주 큰 차이점이 한 가지 있었는데.
바로 수인들은 환경에 적응을 못 해서가 아니라, 어느 환경이든 적응을 잘해서 따로 나왔다는 점이다. 어쩌다 보니 남는 땅에 본인들이 흔쾌히 들어갔다는 거지.
그런 사정 탓에 대부분의 유저들은 수인들이 호쾌한 성격을 갖고 있다 여기는 경우가 많았는데, 사실 완전히 틀린 소리는 아니다. 실제로 그 주축인 견족이나 호족같은 경우엔 그 말이 통용됐으니까.
문제는 수인은 그들끼리 서로 완전히 종족이 다르다 여길 만큼 차이가 크다는 거다.
강아지는 산책을 좋아하지만, 고양이는 산책을 싫어하지 않나. 요컨대 호쾌랑은 거리가 먼 녀석들도 있다는 소리다.
“그래서, 네가 인간의 부족장이라는 걸 대체 어떻게 믿으라는 소리지?”
“…….”
나는 눈앞에 쫑긋거리는 하이에나 귀를 보며 저걸 그냥 베어 버려야 하나 고민했다. 이 질문을 받은 것이 벌써 스무 번째이기 때문이다.
“……말했을 텐데. 이 증표를 못 알아보겠으면 그냥 위에 가서 상급자를 데려오라고.”
“나도 말했을 거다. 내가 상급자를 데려오기 위해 사라진 사이에 네가 뭔가 저지르면 어떻게 하느냐고.”
“……그럼 옆의 동료에게 맡기면 되잖아. 진짜 제발 부탁이니 그만 좀 들어가게 해 주면 안 되겠냐?”
“또 다시 말하게 하는군. 내 동료가 상급자를 데려오기 위해 사라진 사이 네가 뭔 짓을 저지르면 어떻게 하지?”
“…….”
역시 그냥 베자. 나중에 사과하면 될 거다. ‘아, 미안.’하면 지들이 또 뭐 어쩌겠나? ‘미안하면 다인가?’ 하고 말겠지. 어쩌면 ‘진짜로 네가 벤 것은 맞는가?’ 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과 함께 손이 허리춤까지 닿은 순간이었다. 저 멀리서 교대인 듯한 호족 둘이 가까이 다가왔다.
“우루가! 또 멀쩡한 사람 잡아 두고 시간 끌고 있나?”
“시간을 끌다니. 정당한 경비 업무다.”
“쯧쯧, 그것도 정도껏 해야지. 혹시 얼마나 이러고 계셨소?”
돌아보며 묻기에, 있는 힘껏 인상을 찌푸리고 답했다.
“……2시간이요.”
“저런.”
호족이 다시 한 번 혀를 차더니 툭툭, 하이에나의 어깨를 쳤다.
“여기는 이제부터 내가 맡을 테니 자네는 돌아가서 일 보게.”
“일을 보라니, 지금까지 내가 맡고 있던 건 일이 아니란 말인가?”
“하하하, 이 친구 항상 농담도 참 재밌게 한다니까.”
“…….”
글쎄. 내가 볼 땐 전혀 농담이 아닌 거 같은데.
호랑이한테 눈이 안 좋다는 특성이라도 있던가? 설마 저 진지한 표정을 못 봤단 말이야?
아무튼 호족은 이런 경험이 풍부한지 결국 하이에나를 돌려보내는 데 성공했다.
겉으로 티는 안 냈지만 진심으로 존경스러운 부분이었다. 나라면 그보다 손이 나가는 게 더 먼저였을 테니까.
그는 멀어져 가는 하이에나에게 팔 흔들어 배웅하더니, 다시금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거 미안하게 됐소. 평상시엔 그래도 저 정도는 아닌데, 인간이 이 도시에 오는 경우가 워낙 드물다 보니 저랬나 봐.”
“……경비를 바꾸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무슨 심정인지는 이해하지만, 저래 봬도 장점은 있어. 우루가가 통과시켜 준 인원들 중에는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단 한 번도 없었거든.”
그냥 들여보내 준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건 아니고?
그렇게 따지고 싶었지만, 여기서 말씨름을 하기에는 내 심신이 너무 지쳐버렸다.
나는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며 다시 카시아에게 받은 증표를 꺼냈다.
“여기 내가 겔리안 연합 인간 부족의 부족장이라는 증표입니다. 혹시 못 알아보시겠으면 제발 부탁이니 상급자 좀…….”
“그럴 필요 없소. 바로 알아보겠으니까.”
호족이 건네받은 증표를 신기하단 듯 훑어봤다.
“얼마 전 독립을 인정받았다는 그 레이튼의 시장이신가 보군. 이름이…….”
“리안입니다.”
“아, 그랬지. 미안하오. 우리 수인은 이름보다 호칭으로 칭하는 경우가 많아서 말이야. ‘재앙을 벤 자’라는 건 매우 잘 알고 있소.”
그가 다시 내게 증표를 건네주며 웃었다.
“사실 한 부족의 부족장이면 이보다 훨씬 성대하게 환영해 주는 게 당연한데…… 이해해 주시오. 인간의 부족장이라는 걸 아직 낯설어하는 이들이 많거든.”
“이해합니다.”
나는 찡그렸던 인상을 재빨리 되돌리며 말했다. 여전히 기분이 안 좋긴 했지만, 상대의 태도가 너무 깍듯해서다. 여기서 계속 신경질 내 봤자 트집 잡는 것밖에 더 되겠나.
호족은 그런 나를 보고 웃음 짓더니 호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해 준다니 다행이오. 다만, 이해를 구할 일이 하나 더 있는데 그것까지도 괜찮은지 모르겠군. 이게 결국은 일이라 말이야.”
“일단 말씀해 보시지요.”
“음…… 다니아에 온 목적이 뭐요? 아, 우루가에게 몇 번씩 말했을 거란 건 이미 알고 있지만, 일단 교대를 한 이상 나도 확인을 해야 해서 말이오. 양해 좀 부탁하겠소.”
대체 뭐길래 저렇게 분위기 잡나 했는데, 전혀 문제 될 것 없는 요청이었다.
보통은 교대하며 듣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놈에게 내용을 들었으면 앞으로 한 시간은 더 기다려야 했을 테니 말이다.
“굳이 이해까지 구할 필요도 없는 일입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고 계시니까요. 물론 그게 좀 과하면 문제가 되겠지만…….”
“하하, 그건 내가 다시 한 번 사과하지. 그래서, 지금 한창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분께서 다니아에 온 목적이 뭐요?”
“사실 공적인 일은 아니고, 사적인 일에 가깝습니다.”
“사적인 일?”
호족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저는 여기 다니아에 있는 수인족 사도를 만나기 위해 왔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