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206)
내가 다시 고개를 든 순간,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훨씬 커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 하나하나와 시선 맞추듯 사방을 슥 둘러봤다. 그리고 조금 조용해졌을 때 쯤 재차 말을 이었다.
“제 얘기가 이상하게 들릴 거란 것, 잘 압니다. 세 왕국의 정식 허가도 받아 놓고 갑자기 이런 식으로 위화감을 조성하는 게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여러분. 전쟁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웅성거림이 완전히 멈췄다.
“이 전쟁은 같은 동족들과 피를 흘리며 싸우는 것도, 이제 저희 세계에 당당히 자리 잡은 이종족들과 벌이는 것도 아닙니다. 하물며 피할 수 있는 것조차 아니죠. 대륙의 존망이 걸린 일이기 때문입니다.”
순간 맨 앞쪽에 있던 타냐의 얼굴이 한눈에 들어왔다. 여기서 진상을 아는 유일한 인물인 만큼, 내가 무슨 말을 할지 눈치챘는지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다.
나는 녀석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천천히 입술을 뗐다.
“저희는 다시 한 번 돌아올 이계의 존재들과 싸울 것을 대비해야 합니다.”
“500년 전 해방 왕께서 무찌른 놈들이 다시 되돌아온다는 말씀입니까?”
군중 속에 있던 남성 한 명이 크게 소리쳤다. 사실 내가 미리 심어 둔 바람잡이로, 다행히 그의 목소리가 일반인 수준을 훨씬 뛰어넘었다는 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렇습니다. 해방 왕께선 믿을 수 없게 놀라운 업적을 이루셨지만, 결국 그들을 쫓아내는 데 그쳤을 뿐 격퇴를 한 것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그들이 정말 다시 되돌아온다는 보장도 없지 않습니까!”
공포에 휩싸여 있던 사람들이 고개 끄덕여 동조했다. 믿고 싶지 않은 것이 당연하겠지.
“지금 제가 서 있는 장소가 원래 어디였는지 모두 아실 겁니다.”
“황궁 아닙니까?”
“맞습니다. 이계의 존재들을 쫓아낸 해방 왕께서 건국하신, 바로 제국의 황궁입니다.”
나는 양팔을 벌리고 강조하며 외쳤다.
“얼마 전 저는 그 황궁을 허무는 과정에서 황실 대대로 내려오던 고서 하나를 발견했죠. 그 안의 내용은 충격적이게도, 500년 전 그 존재들을 쫓아내고 막을 수 있는 건 기간의 제한이 있는 임시 조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아까처럼 웅성거리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크게 충격 먹은 얼굴로 입을 다물고 앞만 바라봤다. 그러다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싶었을 때쯤 바람잡이가 다시 외쳤다.
“그 기간이 대체 얼마나 되는 겁니까! 설마 내일 당장은 아니겠죠?”
“그렇진 않습니다. 정확한 기간이 얼마나 되는지는 서술되어 있지 않았지만, 아직은 준비할 시간이 남아 있다 적혀 있기도 했으니까요.”
그게 무슨 준비인지는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어차피 내가 막으려 하는 거기도 하고, 이미 공포는 충분하게 준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동시에 저희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닙니다. 해서, 저는 무턱대고 여러분에게 평화와 번영을 약속드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 저희가 뭘 어째야 한다는 겁니까?!”
한 남자가 처절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번에는 바람잡이가 아니었다.
“저희는 마력을 다룰 수도, 주문을 외울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수백 수천이 모여도 겨우 기사 한 명에게 쓸려나가는 게 일이란 말입니다!”
“맞아! 맞아! 이런 건 당연히 기사나 마법사한테 맡겨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항상 뻐기고 다니는 이유가 대체 뭔데! 이럴 때 앞장서서 싸우라고 있는 거잖아!”
나는 조용히 그들의 말을 듣고 있었다.
의외로 나를 향한 비난 같은 건 들리지 않았다. 보통 이런 것은 말하는 사람에게 화살이 돌아감에도 말이다. 이 정도면 반응은 나쁘지 않은 편이다. 그러니 이젠 희망을 줄 차례다.
“물론, 저는 기사와 마법사들을 활용할 것입니다. 그들은 대륙의 존속을 걸고 앞장서 싸울 의무가 있으니까요. 허나, 그걸로는 부족합니다. 저는 여러분의 힘도 필요합니다. 여러분도 분명한 이 세계의 일원이니까요.”
“대체 저희가 어떻게…….”
“물론, 지금 상태로 도움이 되란 말은 아닙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힘을 드리지요.”
한 박자 쉬고 말을 이었다.
“저는 귀족의 전유물이었던 검과 마법을 여러분 모두에게 풀 생각입니다.”
나의 말이 끝난 순간, 사람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반신반의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리베라에게 부탁해 그들 중 적당한 의문을 품은 목소리가 널리 퍼지도록 도왔다.
“검과 마법을……?”
“설마 마력 심법까지 얘기하시는 건가?”
“그런 걸 우리가 대체 어떻게 배워? 분명 못해도 수백 골드씩은 할 텐…… 헙!”
말을 이어 가던 사람들이 본인 목소리가 퍼지고 있다는 걸 인식했는지 입을 다물었다.
상관없다. 어차피 해야 할 말은 전부 따 놓았으니.
역시나 사람들이 가장 걱정하는 건 돈이었다. 용병들이 익히는 최하급 마력 심법만 해도 수백 골드는 했으니까. 덕분에 내가 귀족들이 익히던 고급 기술을 푼다고 해도 아무 소용없다 느끼는 거겠지.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확실하게 말했다.
“여러분은 돈을 낼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푸는 검술과 마법 그리고 심법은 전부 저희 상회의 소유로, 누구나 익힐 수 있도록 충분한 양을 작성해 모두에게 배포할 것입니다.”
“서, 성자님께서…….”
사람들이 감격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나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그뿐만 아니라 저는 18세 이하의 시민이라면 누구나 다닐 수 있는 아카데미도 건립할 예정입니다. 이 역시 모두 무료로, 교육비는 전액 저희 상회에서 부담하겠습니다.”
“와아아!”
“진정으로 우릴 생각해 주는 건 역시 성자님뿐이다!”
“저, 정말 평민들도 아카데미에 갈 수가 있는 거야?”
귀족만을 위한 아카데미가 이미 존재하는 만큼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사실 그 정도로 화려하고 고급스럽게 할 생각은 없지만…… 굳이 지금 나서서 초칠 필요는 없겠지. 저 사람들 기준에서는 그것만으로 충분히 대단해 보일 테니까.
그래도 역시 달아오른 분위기를 잠깐 식힐 필요는 있어 보인다.
분명 더 중요한 건 그 전의 이계 침략 부분인데, 잊은 건지 잊고 싶은 건지 어느새 저들이 그 얘기는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저러다간 나중에 본인의 실패 원인을 나에게 돌릴 수도 있다.
돈 풀고 욕먹는 호구 짓은 할 수 없지.
나는 양팔을 난간 위에 두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여러분. 제가 이렇게 간절히 나오는 것은, 역시 앞서 말한 이계의 존재들 탓입니다.”
순간 다시 환호성이 뚝 그쳤다.
“저는 모두에게 기회를 줄 수는 있지만, 성공을 담보하지는 못합니다. 앞으로의 모든 것은 여러분이 하는 것에 달렸다는 소리지요. 그러니…….”
나는 다시 한 번 그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부디 부탁드리겠습니다. 모두 다 같이 평화를 위해 이제 곧 다가올 전쟁을 준비해 주십시오. 본인들이 대륙의 주인이라는 자각을 가지고 말입니다.”
* * *
“꽤 괜찮은 연설이더군.”
집무실에서 내려오니 리카르도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나를 보며 피식 웃음 지었다.
“거짓말이 좀 많았다는 것만 빼면 말이야.”
“그리 많지는 않았을 텐데요.”
“글쎄. 내 기준에선 충분히 많아 보이던데.”
리카르도가 팔짱을 풀며 내게 다가왔다.
“황실에서 그런 걸 숨기고 있었다는 건 몰랐지만…… 황녀님께 확인해 보니 아무래도 사실이긴 한 것 같더군. 하지만 그에 대해 적은 고서 같은 건 없다고 하셨어. 전부 황족의 입으로만 전해져 내려온 얘기라고 덧붙이셨지.”
“…….”
“뭐, 그것까진 그런가 보다 하겠네. 출처야 어찌 됐든 그 이계의 침공 자체는 사실이긴 하니까. 하지만 그 내용에서도 잘못된 게 있는 것 같던데.”
나는 한숨을 내쉬며 벽에 등을 기댔다.
“준비 부분을 말씀하시는 거겠죠.”
“그래.”
리카르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황녀님의 말씀대로라면 그 준비는 다가올 전쟁을 준비하라는 말이 아니었어. 오히려 어차피 안 될 것이 뻔하니 죽음이나 받아들이자는 자포자기에 가까웠지. 그래서 황실에서도 굳이 대륙에 밝히지 않은 거고. 무려 그 해방 왕께서 직접 내린 지시라 하더군.”
“그분은 인간을 사랑하면서도 인간을 믿지 못하셨으니까요. 본인도 없이 다가올 진격을 후손들이 막을 수 없을 거라 여기신 겁니다.”
“자네는 다르게 생각하나? 그 해방 왕께서 틀리셨을 거라고?”
해방 왕의 잔재가 크긴 큰가 보다. 지금 대륙에서 가장 강한 이 중 하나인 리카르도도 그 망령에 사로잡혀 있는 거 보면.
“네. 저는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솔직하게 밝힌 거고요.”
“오만하군. 그리고 무모해.”
리카르도가 고개를 젓더니 조금 거리를 벌렸다.
“설마 사람들에게 마력 심법 좀 풀었다고 전부 해결할 수 있을 거라 믿는 건 아니겠지? 그들 중에도 재능이 있는 자들이 있긴 하겠지만…… 전쟁에 큰 영향을 미칠 순 없을 거야. 지금 레이튼엔 사람도 부족하니까.”
“사람은 다른 왕국에도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마력 심법과 거리가 먼 평민들이죠. 그들의 이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생각입니다. 그러기 위해 정식으로 인정받은 중립도시니까요.”
리카르도가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그래. 사람이야 그렇게 모은다 치지. 하지만 시간은? 황녀님께선 그 이계의 침공까지 그리 머지않았다고 하셨네. 그때까지 그들이 도움이 될 만큼 성장할 수 있다고 보나?”
“재능을 보이는 자들만 입학할 수 있는 고등 교육 시설을 만들 생각입니다. 모두가 전력이 될 만큼 성장할 수는 없겠지만, 수천 명의 5급 기사와 4성급 마법사라면 넘치는 도움이 되겠죠. 일단 마력만 사용할 수 있으면 충분한 힘이 될 테니까요.”
“하지만 그 정도로는…….”
나는 손을 들어 리카르도를 제지하며 말했다.
“무슨 걱정을 하시는지 압니다. 그것까지도 부족하다고 보시는 거겠죠. 겨우 그 정도로 해결될 문제였다면 황실에서도 진작 기술을 풀었을 테니까요. 어쩌면 그냥 제가 사병을 만들기 위해 핑계 대는 거 아닌가 의심하는 중일 수도 있고요. 저희 상회 돈으로 교육받은 학생들은 자연히 저에게 충성할 테니.”
“……잘 아는군.”
“그렇다면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은 한 가지뿐입니다. 저는 이계의 침공에 대해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고, 막으려고 노력해 왔다는 것이죠. 이 교육은 그 방안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만약 실패한다고 쳐도, 혹시 단장님께서는 인류가 아무것도 못 하고 순순히 소멸당하길 바라시는 겁니까?”
“…….”
리카르도가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 저었다.
“그렇진 않네. 할 수 있는 건 전부 해 봐야지. 그래야 저승 가서도 할 말이 있을 테니.”
“그럼 됐네요.”
벽에 붙이고 있던 등을 떼며 그에게 악수를 건넸다.
“저는 단장님께서도 저를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황실이나 타냐와는 무관하게요. 그래 주실 수 있겠습니까?”
“…….”
잠시 머뭇거리던 리카르도가 얼마 지나지 않아 마지못한 듯 내 손을 붙잡았다. 나는 그 손을 위아래로 흔들며 피식 웃었다.
계약의 성립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