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의 코드가 보여-205화 (205/225)

너의 코드가 보여 (205)

“설명을 듣고 싶은 건 나야. 진짜로.”

‘단테’가 주위를 둘러보며 투구를 벗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모습이 원래대로 돌아온다. 검은 머리에 세상만사 귀찮은 듯 축 늘어진 인상. 동방에서 온 미르였다.

그는 거하게 한숨을 내쉬더니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계약할 때 전투 상황 같은 건 생각해 봤어도 이런 건 염두에 두지도 않았단 말이야. 연기라니, 진심이야?”

불평 늘어놓는 것 치곤 지나치게 잘하던데. 오히려 나보다 더 단테 같았다. 원래 심드렁한 성격이 비슷해서 그런가.

그보다…… 중요한 건 따로 있었지.

나는 미르가 벗은 투구를 바라보았다. 역시 타른헬름이었다. 내가 스바한테 맡겨 놨던 거.

품에서 슬쩍 스바를 꺼내 크기를 키웠다.

“그 투구, 혹시 얘가 준 거예요?”

바라보며 묻자, 미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방 안에 있는데 갑자기 와서 뭐라 뭐라 하는데, 그거 듣고 있느니 그냥 시키는 대로 하는 게 낫겠더라고.”

“…….”

굉장히 미르다운 직감이고, 판단이다. 의욕이야 어쨌든, 실제로 도움을 받은 게 맞기도 하고. 나는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 도와줘서 고마워요. 진짜 덕분에 살았어요.”

뭔가 더 불평하려 했는지 입술을 움찔거리던 미르가 다시 한 번 떨떠름히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 인사는 나보다 걔한테 해. 어차피 나는 계약서에 묶인 입장인 데다, 그동안 딱히 하는 일도 없이 월급만 받기도 했으니까.”

“말 안 해 줘도 나중에 따로 할 거였어요. 그리고 월급 받는 것도 미안해할 필요 없고요. 어차피 나중에 충분히 부려 먹을 테니까.”

“정도껏만 해 주라. 아직 서방 쪽 시차 적응 안 돼서 피곤해.”

온 지 벌써 몇 년이 지났는데 웬 시차 적응?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았지만, 이내 그가 2급까지 올랐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아마 밤낮없이 수련에 열중했다는 뜻이겠지.

어쩌면 겉으론 아닌 척해도 나의 존재가 꽤 자극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본 게임에서의 미르라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어쨌든 다시 한 번 고맙다 인사를 하니 미르가 손사래를 치며 사라졌다. 표정을 보니 귀찮음보다는 무안함 때문인 거 같았다.

의외로 순진한 구석도 있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이번 사건의 진짜 주모자를 바라봤다.

“고맙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제 목적은 마스터를 돕는 것이니까요.

“명령하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나가는 건 설계되어 있지 않았잖아. 그러니까 고마워할 이유는 충분하지.”

피식 웃으면서 소파에 몸을 기댔다.

“그보다 대체 언제 나갔던 거야? 분명 내 품속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벤자민 재상이 마스터와 단테가 함께 있는 자리에서 만나겠다고 한 순간이었습니다.

거의 바로라는 소리다. 나는 조금 놀라서 되물었다.

“판단이 그렇게 빨리 됐단 말이야?”

―마스터가 느렸던 겁니다. 만약 제가 같은 상황이었다면 곧바로 테이어 테르베로츠 님에게 눈짓해서 단테가 호출한 척 밖으로 나갔을 겁니다.

“…….”

듣고 보니 일리 있는 소리였다. 급한 일이라고 하면 벤자민이 붙잡을 틈도 없었을 테니까. 의심이야 끝까지 했겠지만, 미르 정도의 연기였으면 어찌어찌 넘길 수도 있었겠지.

“그래. 너 잘났다. 그런데 나가긴 대체 어떻게 나간 거야? 모습이야 사이즈를 줄여서 안 보였다 쳐도, 분명 주위를 에코의 결계 마법이 둘러치고 있었는데.”

그것도 분명 안에서 나가는 소리나 존재를 막고 감지하는 형식이었다.

작정하고 외부 경계보다 내부 보안에 더 신경을 쓴 기술인만큼 웬만한 기술로는 뚫을 수 없었을 거라는 소리다.

스바가 본디 자발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이 꽤 되기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7성급 마법사가 눈치도 못 채고 당할 정도로 신통방통하지는 않았을 텐데?

적어도 내가 알고 있던 바로는 그랬다.

뭐, 알아서 얘기해 주겠지.

하지만 그렇게 기다리는데 여태까지 재깍재깍 답하던 스바가 이번에는 어쩐 일인지 한참 동안이나 침묵했다. 녀석은 상당한 시간이 흘러서야 겨우 말을 꺼냈다.

―……스스로를 개조했습니다. 허가 없이 이런 일을 저지른 점, 사죄드립니다.

스바의 대답에 나는 잠시 멍해졌다.

……스스로를 개조? 그게 가능한 거였나? 분명 설정대로라면 불가능했을 텐데?

“그런 쪽으론 제약 걸려 있던 거 아니었어? 예전에 얼핏 얘기해 줬던 것 같은데.”

―……딱히 말씀드린 기억은 없지만, 그렇습니다. 자아를 가진 제가 끝없이 성장하는 걸 막기 위한 제작자님의 안배였죠.

“그건 또 어떻게 뚫은 건데?”

담담하게 묻자, 스바가 조금 놀란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보다는 질책이나 왜 그랬는지를 묻는 것이 먼저 아닙니까? 저는 분명 그럴 거라고…….

“별로 내가 만든 규칙도 아니니 질책할 이유는 없지. 게다가 그걸로 나한테 해를 끼친 것도 아니고 도움을 준 건데.”

나는 어깨를 으쓱이면서 그대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왜 그랬는지야 뭐, 당연히 자아가 있으니 그런 거 아니겠어? 향상성은 생각할 줄 아는 생물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거니까. 그냥 생각 없는 노예처럼 부려먹고 싶었던 거라면 애초에 자아도 주지 말았어야지.”

―…….

“어쨌든 난 별로 화나지 않았으니 그에 대해 딱히 설명할 필요도 없어. 미리 얘기해 주지 않은 건 좀 서운하긴 하지만.”

―……다음부턴 반드시 미리 말씀부터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스바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했다.

―감사합니다. 저를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생각 있는 생물로 봐 주셔서.

“알면 됐고.”

나는 피식 웃으며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래서, 그 제약은 또 언제, 어떻게 뚫은 건데? 이 정도는 물어봐도 되지?”

―물론입니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하자면…… 제가 직접 뚫은 것은 아닙니다.

“직접 뚫은 게 아니라고?”

―네.

고개 끄덕이는 걸 흉내 낸 건지, 스바가 선수 부분을 주억거렸다.

―예전에 갔던 중립도시 뤼비하이켄을 기억하십니까?

“당연하지. 그때에서 얼마나 지났다고.”

―그 당시 리안 님은 임무의 보상으로 키탄이라는 신과 직접 대면하셨지요. 그때 저도 있었습니다.

“……그때 같이 있었다고?”

설마 그냥 같은 방에 있었다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닐 거다.

스바가 다시 한 번 선수 부분을 주억거렸다.

―네. 대면하시는 그 장소 거기에요. 물론 저는 원래 형체랄 만한 게 없기 때문인지 모습이 드러나진 않았습니다만…….

“……그럼 내가 키탄이랑 하는 대화도 다 들었다는 거네?”

―그렇게 됩니다.

“……그랬구나.”

내가 사실 이 세계 사람이 아니라는 걸 제일 먼저 눈치채는 게 얘가 될 줄은 몰랐는데.

생각해 보면 이상하긴 했다.

그 이전까진 분명 그런 걸 대체 어떻게 아냐든가 이것저것 계속 물어 왔는데, 그 이후론 그런 질문들이 갑자기 뚝 끊겼으니까.

그냥 어차피 대답을 못 들을 거란 걸 알고 포기한 줄 알았거늘…… 그 뒤에 이런 사정이 있었을 줄이야.

나와 키탄의 대화를 들었으면 그에 대해 더 이상 궁금할 일이 없긴 했겠지.

그리고 제약을 언제 어떻게 풀었느냐는 물음에 왜 이 얘기가 나오는 건지도 알겠다.

“키탄은 네 존재를 눈치채고 있었나 보지?”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저도 나중에야 알게 된 겁니다만…….

스바가 망설이며 말을 이었다.

―지상으로 돌아오니, 저에게 걸려 있던 제한들이 전부 풀려 있단 걸 느꼈습니다. 분명 그 키탄이라는 신이 한 일일 겁니다.

“준다는 보상이 사도 능력 주는 걸로 끝이 아니었나 보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썩 마음에 드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조만간 신전에 들러 헌금 좀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 * *

맹세코 부정 같은 건 없었지만, 새로운 중립도시 레이튼의 수장이 될 사람을 뽑는 선거는 상상 이상으로 간단하게 끝났다.

그도 그럴 게, 후보자로 나선 게 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래서는 카시아가 했던 말에 신빙성이 더해질 수밖에 없다. 일부러 다른 후보 내보내든가 하지 말라고 했던 얘기 말이다.

설마 정말로 누가 나가겠다고 했다가 테러라도 받은 건 아니겠지……?

아닐 거라 생각하면서도 조금 의심이 되었다. 기탁금도 안 받은 선거에 후보자가 나밖에 없었다는 건 역시나 이상한 일이었으니까.

오히려 나는 나오는 사람이 너무 많으면 어쩌나 걱정도 했었는데. 한 스무 명 넘어가면 종이를 대체 어떻게 만들어야 하나 하고.

“…….”

진상이야 어쨌든, 레이튼의 수장이 된 건 나다. 이제 되돌릴 수도 없고, 그럴 의지도 없다. 그냥 선거 비용 아껴서 좋았다고 생각해야지.

나는 멍하니 집무실 소파에 앉아 천장을 바라봤다.

개떡 같은 도시에 떨어졌다 욕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그 개떡 같은 도시의 수장이 될 줄이야.

지구에 있을 땐 생각도 못 했던 일이다.

내가 만들던 게임 속에 떨어지는 상상을 한 번도 안 해 본 건 아니었지만, 그런 경우는 보통 금수저로 시작하는 걸 떠올렸으니까. 아니면 적어도 주인공 옆집에 붙은 소꿉친구라든가 말이다.

계속해서 이어지던 망상이 엔딩 시점에 닿은 순간. 밖에서 와아아, 하는 환호성 소리가 들렸다.

아, 그러고 보니 시장이 된 기념으로 연설을 하기로 했었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밑에 직원이 미리 준비해 둔 연설문을 싹 훑어보았다. 대충 이러이러해서 고맙고, 앞으로 레이튼엔 평화와 번영만이 가득할 거란 내용이었다.

상투적인 말이었지만, 글 솜씨 좋은 자가 썼는지 얼핏 읽었음에도 무슨 소린지 귓가에 톡톡 박히는 느낌이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아니었다.

일단 어떤 식으로 얘기해야 하는지 참고만 하고 종이를 다시 접어 책상 위에 올려놨다. 그리고 그 앞에 서서 잠시 심호흡했다.

이제부터 난 당선된 날 낙선할지도 모르는 정신 나간 발언을 사람들 앞에서 해야 한다.

이건 더 미룰 수도 없는 문제였고, 미뤄서도 안 되는 문제였다. 그나마 바라는 게 있다면 주민들이 이 내용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길 바라는 것뿐.

그들의 협조가 전무하다면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에도 한계가 있을 테니 말이다.

나는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하고, 집무실 발코니 문을 열었다. 원래 황성이 있던 곳이라 그런지 위치가 예술이다. 한눈에 수만 명의 군중이 다 들어온다.

“와아아!”

“성자님! 성자님이 나오셨다!”

“여기 한 번만 봐 주세요!”

곧장 들려오는 환호성에 손을 들어 화답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발코니 맨 앞에 서서 팔을 내리자 말소리가 뚝 하고 끊겼다.

이제 내가 발언하라고 말을 멈춘 거다. 수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이러면 말 꺼내기 더 부담스러워지는데…….

나는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뱉고,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레이튼 시장이 된 리안입니다. 하지만 연설을 시작하기에 앞서 일단 여러분께 사과부터 드려야겠군요.”

마법으로 확성 된 목소리가 광장 구석구석까지 닿았다. 입을 다물고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웅성이기 시작했다. 대뜸 나와서 알 수 없는 소릴 지껄이니 이해가 잘 안 됐나 보다.

그렇지만 정작 내가 하고 싶었던 얘기는 아직 서론도 안 꺼냈다.

나는 그들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이면서 말을 이었다.

“죄송하지만, 저는 결코 여러분께 평화와 번영을 약속드릴 수 없습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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