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204)
나도 모르게 그 이름을 중얼거리려던 그 순간. 옆에서 나보다 먼저 나온 목소리 덕분에 입이 막히고 말았다.
“단테 후작……?”
돌아보니, 벤자민 재상이 한 방 먹은 듯한 얼굴로 단테……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칼페온 후작 자리를 달라고 할 때보다 더 놀란 걸 보면 아마 단테가 나와 동일 인물이란 걸 상당히 확신하고 있던 모양이다.
그보다 하마터면 멍청한 짓거릴 할 뻔했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건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알아내는 건 나중이다. 지금은 협상을 마저 진행해야지.
나는 모든 시선이 그쪽으로 쏠린 틈을 타 다시 표정을 정리했다. 그리고 최대한 태연한 목소리를 가장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이튼에 있으셨던 겁니까? 이렇게 금방 오실 줄은 몰랐는데…….”
“마침 근처에서 수련 중이었다. 그만 귀찮게 하고 용건이나 말해.”
“……그랬습니까?”
어째 나보다 단테 연기를 더 잘하는 거 같은데, 착각인가? 아무리 봐도 진짜 같다.
그런 생각이 든 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다른 사람들도 분분히 일어나 인사를 건넸다.
“그 유명한 단테 후작님을 여기서 뵐 줄은 몰랐군. 반갑소. 칼페온의 7성급 마법사 에코라고 하오.”
“단테다.”
“……듣던 대로 담백한 성격이군. 그보다…….”
에코가 내밀었던 손을 머쓱하게 빼며 말을 이었다.
“바포메트 사건 당시까지만 해도 3급의 경지라 했던 거 같은데, 대체 언제 2급 초입까지 도달한 거요?”
“……2급?”
에코의 발언에 사람들이 기겁해 마력 측정을 시작했다. 모습을 본 것만으로 놀라서 생각도 못 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방 안에 감탄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 정말이야. 정말로 단테 후작이 2급에 올랐어.”
“분명 바포메트로부터 몇 년 지나지도 않았는데 대체 어떻게…… 심지어 토너먼트에 나섰을 때는 겨우 4급 아니었나?”
“그것만이 아니야. 그는 젊은 나이에 4급이어서 유명해진 게 아니라, 4급의 경지로 3급을 이겨서 유명해진 거라고!”
“그렇다는 건…….”
2급에 오른 지금은 대체 어느 정도의 실력이라는 건가. 아마도 그런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들은 차마 그런 말을 입으로 하기 두려웠는지 그저 침만 꿀꺽 삼켰다.
하지만 내가 제일 궁금한 건 저런 이들의 반응이 아니었다.
나는 슬쩍 벤자민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아직 의심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눈치였다.
“그대가 정말 단테 후작이 맞나?”
벤자민의 물음에 단테가 고개를 돌렸다.
“맞다. 너는 누구지?”
“……말투가 심히 건방지군. 분명 단테는 아이언과 달리 상대의 신분이나 나이 정도는 가려서 예의를 갖출 수 있다 들었는데.”
그 말대로였다. 아무리 차가운 도시 남자 컨셉이라 해도 동방예의지국 출신으로 차마 노인에게까지 반말할 순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가리지 않고 싸가지 없게 나가는 거였는데. 노인 공경이 아니라 노인 공격이 옳았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정신을 차리고 중간에 끼어들려는데, 의외로 단테가 태연하게 대꾸했다.
“뭘 잘못 알고 있군. 내가 존중하는 건 나이나 신분이 아니라 가지고 있는 실력이다. 너는 기사도 마법사도 아닌 그저 비쩍 마른 늙은이일 뿐인데 내가 어째서 예의를 지켜야 하지? 의미 없이 세월만 보낸 게 그렇게 자랑스럽나?”
“…….”
와, 저게 진짜 싸가지가 없다는 거구나. 그동안 내가 했던 연기는 소꿉장난에 지나지 않았단 건가?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벤자민의 눈에는 점점 의심의 빛이 옅어지고 있었다. 그 아이언의 제자라면 저 정도 인성은 당연하다 여겼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진짜 아이언의 제자는 맞는 거 같군. 나는 벤자민 포드. 아르곤의 재상일세. 혹시 기사나 마법사의 힘 말고는 능력으로 인정해 주지 않나?”
“벤자민 포드……. 일반인의 몸으로 2인자 자리에 오른 철혈의 인간이라지?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반말에서 이어지는 존댓말이 전혀 어색함 없이 자연스럽다. 가까이서 보다 보니 저도 모르게 감탄만 나온다.
저런 식으로 위기를 벗어나다니……. 진짜 그전에 내가 해 왔던 건 뭐지? 정말로 연기가 아니라 소꿉장난이었나?
설마 나 혼자 멋있다 생각하고 주변에선 쌩쇼한다 비웃고 있던 건 아니겠지.
“…….”
문득 쥐구멍이라도 파고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일단 앞으로 웬만한 일이 있지 않고서야 단테로 변장하진 말자. 그리고 비슷한 성격 캐릭터로도.
“……확실히 아이언 그자보다는 상식이 박혀 있군. 빈센트 경이 왜 그리 칭찬했는지 이해도 가.”
“과찬이십니다.”
“허나, 이상한 점은 하나 더 있네.”
“그게 무엇입니까?”
단테의 물음에 벤자민이 시선을 다시금 내게 돌렸다.
“여긴 소리도 차단되어 있고, 자네가 뭔가 하는 기색도 보지 못했는데, 그에게 소식은 대체 언제, 어떻게 보낸 거지?”
“…….”
나도 몰랐다. 보낸 적 없었으니까. 그런 와중에 보내는 방법 같은 걸 알 리가 없다. ‘단테’ 역시 이 질문에는 딱히 방법이 없는지 따분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결국 내가 뭐라도 꾸며 내야 한단 건데…….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자주 쓰던 변명거리를 꺼냈다.
“동방의 기술입니다.”
“……동방?”
“예. 저희 상회 주력 중 하나가 동방의 물건을 제작해 파는 거라는 건 아시는지요?”
벤자민이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 당연히 알고 있네. 그보다 자네, 지금 설마…….”
“네. 동방의 신비입니다.”
끼어들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 단호히 말했다.
“저희도 기밀로 취급하는 상품이라 자세히 말씀드릴 수 없는 점은 양해 부탁드립니다. 다만, 후작님을 호출한 건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았습니다. 사실 상대의 위치나 메시지 같은 건 보낼 수 없는지라 저도 오실 거란 확신은 없던 상태였죠.”
그러니까 왜 진작 안 부르고 뺐냐는 불만은 꺼내지도 말란 소리다.
벤자민도 그를 파고들 생각이었는지 내가 먼저 선수 치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미지에 가까운 동방을 꺼내 온 만큼 기술에 대해서 시비를 걸기도 힘들 거다. 마법이었으면 분명 몇 성급짜리니 작동 방식은 어쩌니 이래저래 따져 왔겠지.
역시 써먹기 좋다니까. 동방 방패.
흐뭇하게 웃고 있는데, 에코가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그보다 모두들 인사가 끝났으면 슬슬 본제로 돌아오지요. 이러다 해부터 지겠습니다.”
“본제?”
단테의 물음에 에코가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메시지는 보낼 수 없다고 했지. 단테 후작은 상황을 자세히 모를 수도 있겠군. 혹시 설명이 필요한가?”
“아니. 뭔지는 모르겠지만, 됐다.”
단테는 고개를 저어 부정을 표하더니,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내 전권은 모두 저자에게 맡겼으니, 어떤 결정이든 그의 의견을 내 의견이라고 보면 될 거다.”
* * *
벤자민의 표정은 끝까지 굳은 채였지만, 그도 별 방법은 없었다.
하나 있던 명분까지 사라졌는데 계속해서 독립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의 원래 목적과는 반대로 레이튼이 칼페온의 손아귀에 들어갈 수도 있었으니까.
미운 이웃 주느니 모르는 남 준다는 거다.
차라리 아르곤의 산하에 놓겠다는 티를 내지 않았으면 방법이 남았을 수도 있었겠다. 그냥 다 같이 레이튼을 인정하지 않으면 됐을 테니. 오히려 아르곤의 책략 덕분에 독립이 쉬워진 셈이다.
결과적으론 아르곤 레그나르트 6세에게 감사해야겠는걸.
세 왕국 만장일치로 체결된 조약서를 보며 실실 웃고 있자, 누군가 옆구리를 콕 찔렀다.
“아야.”
“도시 먹어서 그렇게 좋냐?”
“그냥 독립한 거지 아직 제가 주인 된 거는 아니에요. 이제 주민 투표로 지도자 될 사람 뽑아야 하니까.”
“네가 주인 된다는 소리네. 며칠 돌아다니다 보니 여기 사람들 너를 무슨 신처럼 알던데?”
카시아가 피식거리면서 다시 한 번 옆구리를 찔렀다.
“혹시 뭐 공평하게 해 보겠다고 몇 사람 더 일부러 후보로 내보낸다든가 하지는 마라. 보니까 투표 시작도 전에 감히 성자님과 경쟁하려 하냐며 테러라도 당하겠더라.”
“설마요. 그냥 조금 유명하다뿐이지, 제가 그 정도로 인기가 많지는 않아요. 나올 일은 없겠지만 만약 아리나 성녀가 상대로 나오면 제가 질 수도 있을걸요.”
내 말에 카시아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도 참 특이하다. 어떨 땐 자만인가 싶을 정도로 자신만만히 굴더니, 또 이럴 땐 연기하나 싶을 정도로 본인을 과소평가하니.”
“…….”
“뭐, 좋아. 그보다 우리 계산도 끝내야지?”
“계산이라뇨?”
그런 게 남아 있었나. 적어도 당장 생각나는 건 없는데.
“칼페온이랑 아르곤만 상대해 주고 우린 뭐 병풍처럼 세워 뒀어도 독립에 동의해 줬잖아.”
“아…….”
확실히 회의 내내 소외시켰던 느낌이긴 하다. 본인들이 먼저 한 발 빼겠단 티를 많이 내기는 했지만, 정말로 상대 안 해 주는 건 자존심이 상한단 거겠지.
어쨌든 대놓고 요구하는 것 없이 순순히 동의해 준 건 역시 고마운 일이다. 그것도 그전엔 레이튼도 경쟁자니 뭐니 협박 비스무리한 소리까지 해 놓고 말이다.
굳이 얘기 안 해도 뭐 하나쯤 챙겨 줄 생각이긴 했다.
“겔리안에도 만 골드 드릴게요. 그러면 충분하죠? 칼페온에도 그만큼 주니까.”
“먹고 떨어져라 느낌이긴 하지만…… 뭐, 그 정도면 대충 돌아가서 면은 세울 수 있겠네.”
카시아가 기지개를 켜며 말하더니,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불쑥 물었다.
“근데 칼페온에 주는 만 골드는 후작 직위를 산다는 명목이잖아. 그런데 그걸 우리한텐 그냥 주면 나중에 거기서 시비 걸지 않겠어?”
“겨우 만 골드 가지고 뭘요. 어차피 걔네도 후작 직위 산다는 건 그냥 명목이라는 거 다 알 텐데.”
“그래도 균형은 맞춰야지. 연합에서도 부족장 직위 줄 테니까 너 그거 받아라.”
……뭔가 사탕이라도 주는 것처럼 엄청난 걸 대수롭지 않게 말한 거 같은데.
“갑자기 웬 부족장이요?”
“예전에 연합에도 소수지만 인간들 있다고 했잖아. 근데 걔넨 여기저기 다른 종족에 붙어살아서 부족장이 없거든.”
“아니, 그건 대충 아는데…….”
그 부족장 자리를 왜 날 주냐가 문제지.
카시아는 진짜 별거 아니라는 듯한 태도로 계속해서 말했다.
“걱정 마. 어차피 흩어져서 사는 인간들이라 네가 뭐 따로 책임질 필요도 없고, 그냥 이름뿐인 직위라 보면 돼. 아, 귀족급 취급이긴 하지만 진짜 귀족도 아니니 타국 귀족이어도 아무 상관없기도 하고.”
“그거 카시아가 마음대로 줄 수는 있는 거예요?”
‘겨우 2급 따리 사자가 무슨 권한으로’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와서 황급히 들이켰다.
“당연히 오기 전에 대충 합의 끝낸 얘기지. 만약 레이튼의 독립이 허가된다면 분명 두 국가에서 어떻게든 발을 걸친 상태일 테니 우리도 뭔가 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거든.”
“…….”
설마 거기까지 생각했을 줄은 몰랐다. 세상 관심 없는 척은 다 해 놓고.
속으로 황당해하는데, 카시아가 피식거리면서 또다시 옆구리를 찔렀다.
“아르곤 후작의 대리이자 칼페온의 명실상부한 후작이며 동시에 겔리안 연합의 부족장이 된 기분은 어때?”
“……썩 좋지는 않네요.”
카시아가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세상살이가 원래 다 그런 법이지. 네가 선택한 길이니까 악으로 깡으로 버텨라. 그럼 난 못난 동생 좀 보러 가야 해서 이만.”
그러더니 정말 망설임 없이 밖으로 빠져나간다. 워낙 일이 순식간에 치고 들어왔다 나가서 그런지 폭풍이라도 휘몰아친 기분이다.
원래 저런 성격이긴 했지.
어쨌든 이제 회의장에 남은 건 나와 다른 한 명 뿐이다.
나는 문 쪽으로 향해 있던 시선을 그에게 돌리며 차분히 입을 열었다.
“이제 아무도 없으니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 좀 해 주실래요, 단테 경?”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