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203)
순간, 방 안에 침묵이 맴돌았다. 주로 어이없음을 표현하는 거였지만, 한 명은 달랐다.
벤자민 포드.
아르곤에서 왕족 이상의 직위를 가진 그만이 내 발언의 의미를 깨닫고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
그때, 나를 미친놈 보듯 하고 있던 에코가 입을 열었다.
“미친놈인가?”
“말투는 좀 조심해 주시죠. 아무리 그래도 제가 여기 주인인데.”
“말이 되는 소릴 해야 말이지. 칼페온에 후작 직위라도 맡겨 놨나? 무슨 후작 직위를 보따리 내놓으라는 마냥…….”
아무래도 내 생각 이상으로 기분이 상한 상태였나 보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내가 왜 이런 말을 꺼냈는지 알 수 있을 텐데.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능청 떨었다.
“그냥 달라는 말은 아닙니다. 만 골드 드리죠.”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 귀족 작위를 돈으로 거래해? 그것도 후작 직위를 겨우 만 골드에?”
에코가 찡그린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할 얘기는 없는 것 같군. 레이튼 방비를 더 착실히 준비해 두는 게 좋을 거다. 말했듯, 다음에 오는 건 사자가 아니라 군대가 될 테니까.”
“화낼 만큼 냈으면 그만 흥분하고 앉아서 생각부터 해 보시죠. 제가 왜 이런 제안을 했는지.”
“뭐?”
“그냥 그쪽 열 받으라고 한 말은 아니라는 소립니다.”
“…….”
에코는 나를 뚫어져라 내려다보더니, 이내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내 표정을 보고서야 그냥 허투루 하는 말이 아니란 걸 이제야 깨달았나 보다.
하기야, 본인이 당했다고 생각해 눈에 뵈는 게 없었던 것뿐이지 원래 멍청한 녀석은 아니다. 잠깐만 차분히 생각해 보면 숨겨진 의미를 눈치챌 터.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설마…… 아르곤을 배신하려고……?”
그건 아닌데. 애초에 팀 먹은 적도 없으니까.
하지만 칼페온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하다. 재상이 온 순간부터 내가 사실상 아르곤의 수하라고 확신했을 테니.
이런 상황에서 칼페온의 후작 직위를 요구하는 건, 내가 아르곤을 배신하고 그쪽에도 기회를 주겠다는 모습으로 보일 거다.
최악의 가정을 목전에 두고 있던 그들로서는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겠지. 아르곤의 속내를 역이용한 셈이다.
“그렇군! 그랬어! 이제야 이해가 가! 내 사과하지, 멍청하게 본질을 읽지 못하고 행패만 부리고 있었어.”
에코가 다시 정중하게 돌아온 말투로 나를 보며 사과했다.
본질은 아직도 못 읽고 있는 거 같은데…….
아무튼, 그렇게 착각해 주면 나야 좋다. 의도했던 결과기도 하고. 나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별말씀을. 이제라도 눈치채셨으니 다행입니다.”
“겔리안 연합과 아르곤…… 큭. 아르곤 측에도 사과드리겠습니다. 잠시 못 볼 꼴을 보였군요.”
“…….”
벤자민이 차갑게 굳은 얼굴로 웃는 에코와 나를 노려봤다. 아까와는 서로 분위기가 딴판이다.
나는 밝은 표정의 에코를 향해 물었다.
“그럼 저는 칼페온 후작 직위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물론. 여태까지 전례가 없던 일이긴 하나…… 뭐 전례야 깨라고 있는 법 아니겠나. 하하하.”
“역시 화끈하시군요. 합리적이고 지적인 칼페온의 마법사답습니다.”
어째 사람 캐릭터가 완전히 뒤바뀌어 버린 거 같은데.
뭐, 나도 찌푸린 사람 상대하는 것보단 밝은 쪽이 더 낫다.
조마조마한 얼굴로 지켜보던 직원에게 만 골드를 가져다 달라 말하려는데, 아까부터 싸늘하게 굳어 있던 벤자민이 불쑥 입을 열었다.
“자네는 칼페온 후작의 직위를 받을 수 없네.”
그 말에 에코가 피식거리면서 끼어들었다.
“아니, 우리가 준다는데 왜 아르곤에서 참견입니까? 재상님, 때로는 패배를 인정해야 할 때도 있는 법입니다.”
“그는 아르곤 후작인 단테의 대리인이야.”
싱글벙글하던 에코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래서 뭐가 문제라는 겁니까? 대리인이라고는 하나, 당사자는 아니니 다른 왕국의 귀족이 된다 해도 아무 상관없을 텐데요?”
“그렇긴 하지. 하지만 대리인이란 위치도 만만한 것은 아니야. 단테 후작을 대신해 대표하는 자리이기도 하니까. 그런데 그런 자가 칼페온의 후작?”
벤자민이 코웃음을 흘렸다.
“모든 대륙인들이 욕하고 비웃을 걸세. 단테 후작은 줏대 없고 여기저기 발 걸치는 박쥐 같은 인간이라고 말이야. 이거, 단테 후작에게 허락은 받은 건가? 그가 제정신이라면 이런 문제를 허락했을 리 없어.”
일단 나는 제정신이다.
“예. 당연히 후작님께 허가받은 사안입니다. 저에겐 저의 인생이 있으니 마음대로 하라고 하시더군요.”
“믿을 수 없네. 대리인이 아니라, 본인에게 직접 들어야겠어.”
“……설마 단테 후작 본인 말씀이십니까?”
“물론.”
벤자민이 나를 차갑게 응시했다. 그리고 이견은 받지 않겠다는 듯 단호하게 덧붙였다.
“자네가 같이 있는 자리에서 함께 말이지.”
“…….”
나는 잠시 아무 말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솔직히 조금 당황스러웠다. 상대가 이렇게까지 강경하게 나올 줄은 몰랐으니까. 거기다 붙은 조건도 상당히 이상하다.
왜 굳이 내가 단테와 한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거지? 본인만 만나면 확인하는 건 문제가 없으니 그럴 이유가 없을 텐데?
그때,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스쳤다.
혹시…… 나를 단테라 의심하고 있는 건가?
어디까지나 추측이긴 하지만, 충분히 가능성은 있는 일이다. 애초에 ‘타른헬름’ 자체도 아르곤에서 보상으로 받은 거였으니까.
서로 나이도 비슷하고, 실력도 비슷한데, 전권대리에 스바까지 맡길 정도로 친분도 있다. 사실 모습을 바꿔 주는 유물의 존재만 알면 한 번쯤 의심할 수 있는 일이다.
젠장, 이런 상황도 염두에 뒀어야 하는데. 내가 너무 안일했나? 겨우 대책 하나 짜 놓고 헤벌쭉하고 있었으니…….
상대는 NPC 같은 게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이란 걸 감안했어야 했다. 그것도 정치판에서 수십 년 묵은 노괴물이란 걸 말이다.
“…….”
일단 침착하자.
벤자민의 얼굴에 점점 확신이 올라오고, 에코의 표정에는 의아함이 차오르고 있다. 둘 다 내 오랜 침묵을 제 식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대책은 나중에 짜더라도 지금은 입을 열어야 한다. 더 길어졌다간 변명도 불가할 테니.
나는 살짝 심호흡하고 담담히 말했다.
“단테 후작님께서는 바깥 활동에 나올 여력이 없으십니다. 수련을 위해서 폐관을 하고 계시거든요.”
“하지만 대리인이라면 연락 수단 하나 정돈 가지고 있을 것 아닌가. 그렇게 연락하고, 그 하늘을 나는 유물로 모두 같이 동행해 가지. 내 그 정도 수고는 감수하겠네.”
“그렇게까지 할 필요 뭐 있겠습니까? 제가 단테 후작께 전권을 부여받았다는 건 다들 아실 텐데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칼페온과 연합이 동의하든 말든, 아르곤은 레이튼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을 걸세. 난 꼭 본인 입으로 허가했다는 말을 들어야만 하겠어.”
“…….”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이건 그냥 명분 없이 거절하는 것과는 다르다. 재상의 제안은 얼핏 강짜처럼 보일지 몰라도, 충분히 합리적인 의견이었으니까.
다른 두 국가가 인정하니 마지못해 동의하는 것과는 달리, 앞으로 레이튼의 앞날에 충분히 태클 걸 여지가 있다는 뜻이다.
지원사격을 바라며 에코를 바라보았는데, 그는 내 시선을 외면했다.
무슨 상황인지 확실하게 알지는 못해도 일단 두고 보려는 심산일 것이다.
내가 아르곤과 칼페온 모두에 발 걸치고 독립하는 건 그들로서 최악을 피하는 것밖에 안 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이득. 혹은 최소한 현상 유지 정도는 할 수 있으니까.
……역시 지금이라도 나가서 다른 사람한테 타른헬름을 씌워야 하나?
하지만 그건 재상이 허락하지 않을 거다. 이미 그는 내가 단테와 동일인물이라는 걸 반쯤 확신하고 있는 눈치였으니까.
아마 내가 혼자 남으려 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옆에 붙어 있으려 들겠지. 스바에 타는 데 동행하겠단 것만 봐도 알 만하다.
뭔가 방법이…….
그렇게 고민하던 때였다.
끼이익.
갑자기 바깥에서 문이 열리더니, 남자 하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적당하게 길러진 흑발에 싸늘하고 냉정한 인상의 미남.
……누가 봐도 명백한, 단테의 모습이었다.
순식간에 좌중의 시선을 모조리 끌어모은 그가, 나를 뚫어져라 응시하며 담담히 내뱉었다.
“부르기에 왔다. 대체 뭐 때문에 날 귀찮게 만든 거지?”
* * *
“…….”
나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말문이 막힌 채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이건 내가 짜 둔 대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걸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꾸밀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까지 계속 나와 같이 이 방 안에 있던 건 그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만약 뭔가 몰래 지시하려 했다면 다른 사람들에 의해 먼저 발각되었을 거다.
아니, 그런 건 전부 둘째 치더라도 물리적으로 다른 사람이 단테가 될 방법도 없었다.
타른헬름은 내가 항상 스바에 넣어 놓고 다니는데, 스바는 지금도 내 품 안에 있었다. 사실 누가 몰래 훔쳐 갔었다는 가정도 불가능하다는 소리다.
순간 마법으로 변신한 게 아닌가 싶었지만, 그런 것도 아니다. 모습을 바꾸는 마법에 으레 보이는 마나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어쩌다 그것까지 모두 해결했다 치더라도 이상한 건 또 있었다.
대체 어떻게 지금 이 자리에 단테가 필요하단 걸 안단 말인가?
3왕국의 사자가 전부 모인 시점에서 에코는 바깥으로 소리가 퍼져 나가지 않는 고위급 마법을 썼다.
덕분에 아무리 마력을 끌어올려도 밖에서 안의 대화를 엿들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유물이든 숨겨진 기술이든 뭔가 써먹어서 어찌어찌 도청했다 하더라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나를 도와주기 위해 단테로 변장하고 왔다는 건, 내가 단테라는 걸 모르면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내가 단테라는 걸 아는 인물은 아이언 단 하나뿐이고.
그 녀석이 여기 있었다면 단테로 변장을 하는 게 아니라 본모습으로 와 방 안을 때려 부쉈을 것이다.
이유야 뭐…… 왜 좋은 주먹 놔두고 아가리만 놀리냐 이런 거였겠지.
아무튼, 저게 아이언일 확률도 제로라는 얘기다.
그럼 저건 도대체 누구고, 왜 날 도우려는 거지? 아니, 그보다…… 날 도우려는 건 확실한 건가?
정체를 모르는 이상 아무것도 확신할 수는 없었다. 딱 완벽한 타이밍에 와 놓고 ‘사실 이놈은 내 대리인 같은 게 아니다.’ 할 수도 있는 법이니까.
……역시 일단 상대가 누군지부터 확인하는 게 먼저겠지. 마침 내게는 이럴 때 써먹기 완벽한 기술까지 있었다.
나는 당황했던 가슴을 진정시키고, 단테……. 그러니까, 단테로 변장했을 녀석의 코드를 확인해 보았다.
그리고 곧이어 그 머리 위에 뜬 메시지를 본 순간. 다시 굳어 버리고 말았다. 상대가 너무 의외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대체 이 인간이 어째서 여기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