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202)
칼페온에서 온 사자들을 맞이하고 하루쯤 지났을까. 출근한 사무실 앞에 웬 편지 하나가 놓여 있었다.
“……뭐지?”
짐작 가는 게 없었다. 상회 보안이 그렇게까지 삼엄한 건 아니지만, 일반인이 장난으로 들락날락 거릴 만한 수준도 절대 아닌데…….
뭐, 읽어 보면 알겠지. 대수롭지 않게 편지를 펼쳤다.
[안녕하십니까, 성자님. 요즘 날씨가 좋습니다. 매우 잘된 일이지요. 하지만 저는 알고 있습니다. 만약 성자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이런 환경에서도 레이튼엔 쓰레기같이 죽어 나갔을 사람들이 넘쳐났을 거란…….]
“……잡설이 왜 이리 길어?”
나는 한숨을 내쉬며 사무실 내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쓸데없는 내용은 모두 건너뛰고 중간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다.
[……해서, 레이튼의 선량한 시민인 저는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 일은 무조건 성자님께 알려야만 한다고! 후에 알아보니 간악무도하게도 저를 찾아와 성자님의 악소문을 의뢰한 자는 칼페온의 사자 일행 중 하나더군요. 부디 이 정보가 성자님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았길 바라며, 부디 앞으로도 무사태평…….]
부디는 대체 왜 두 번이나 적어 둔 거야?
황당해하면서 편지를 접었다. 그 뒤로는 또 별 내용 없는 장황한 안부 묻기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보다……. 역시 칼페온도 급하긴 급한 모양이지? 아직 아르곤에서 사자로 파견된 게 누군지도 모를 텐데 일부터 저지르려는 거 보면. 최소한 그쪽 입장 확실히 밝혀지기 전까진 얌전히 있을 줄 알았는데.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테이어 테르베로츠를 사무실로 불렀다. 이런 쪽은 역시 그가 나보다 나을 거 같아서다.
곧이어 직원이 테이어 테르베로츠와 함께 도착하고. 나는 곧바로 받았던 편지를 건넸다. 다짜고짜 내밀어진 편지를 읽던 그가 황당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자네는 대체 언제 조직 안에 첩자들까지 껴 놨나? 나도 시도는 해 봤지만, 그 1기사단을 상대로 도망친 녀석들이라 그런지 번번이 실패했는데…….”
“첩자 같은 건 껴 둔 적 없어요. 개인적으로 그런 사람 키운 적도 없고.”
“……그럼 이걸 그쪽에서 자진해 보낸 거라고? 뒷골목 범죄 조직이?”
테이어 테르베로츠의 얼굴이 아까보다 더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나도 어이없긴 하다.
“그보다 칼페온 쪽에 이 문제를 어떻게 항의해야 할지부터 한번 따져 보죠.”
“항의는 무슨. 명백한 증거도 없으니 발뺌이나 할 걸세. 사실 외부에 사자로 온 자가 뒷골목 조직이랑 일을 꾸미려 했다는 게 너무 황당해서 사람들이 잘 믿지도 않을 테고. ……아 자네가 얘기하면 믿으려나?”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피식 웃으면서 편지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아무튼, 직접 따지고 들면 어느 정도 압박은 줄 수 있겠지만, 득보다 실이 더 클 거야. 어차피 본인들 의도를 들킨 거 그냥 대놓고 반목하자 나올 수도 있지.”
“그럼 역시 그냥 지나가듯 살짝 경고만 해 주는 편이 더 낫겠네요. 크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니까. 애초에 더 할 수 있는 일도 없을 테고.”
나는 편지를 회수해 품속에 넣으며 물었다.
“어쨌든 이제 아르곤만 남았네요. 혹시 아르곤에서 오는 사자가 누구인지는 알아내셨어요?”
“아니. 그게 참 이상한 일이지.”
“이상하다니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심각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보통 왕실에서 행동하는 일의 대부분은 극비이고, 기밀이야. 하지만 나는 솔직히 마음만 먹으면 그중 9할 이상은 알아낼 자신이 있네.”
저건 허언이 아니다. 실제로 그는 나에 대한 정보를 거의 혼자 자력으로 알아내기도 했으니까. 거기에는 심지어 세 왕국에서도 파악하지 못한 것도 있을 거다.
“……확실히 이상하긴 하네요. 사자에 대한 정보가 기밀이긴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그들이 가지고 올 내용일 텐데. 정도 이상으로 사자의 정체를 감추고 있다는 거죠?”
“그렇지.”
“흠…….”
나는 잠깐 눈을 감고 고민에 빠졌다.
아르곤 입장에서 저렇게까지 과민 반응한다는 건 확실히 뭔가 있기는 있다는 거다.
그런데 그게 뭔지에 대해선 확실하게 감이 안 온다.
뭘까. 대체 뭐길래 노블레스의 정보망까지 피할 만큼 꼭꼭 숨기는 거지? 설마 자국 땅 보호해야 하는 1급 기사들을 보내지도 않았을 테고…….
그때, 머릿속으로 한 인물이 퍼뜩 떠올랐다.
설마설마 싶긴 하지만, 설마…….
“……혹시 저희 예상보다 훨씬 높은 사람이 오는 거라면요?”
불쑥 묻자,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공작보다 위라면…… 아르곤 4검을 말하는 건가? 그들이라면 영토를 벗어날 수 없을 거야. 항상 외부의 침입에 대비해야 하니까.”
“공작보다 위면서 외부의 침입에 대비할 필요 없는 사람이 하나 더 있잖아요.”
“설마…… 아르곤의 재상을 말하는 건가?”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던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이내 싱겁게 웃었다.
“걱정이 과하군. 아무리 높은 사람을 보낸다 해도 재상씩이나 보내겠나? 다른 왕국 사신단에 포함돼도 과하다고 평가될 인사인데.”
나도 괜한 걱정이다 싶긴 하다. 그런데 언제는 내 생각대로 쉽게 풀린 적이 있던가.
“일단 염두에 넣어 놓기는 하죠. 아르곤 사자 대표가 재상일지도 모른다고. 저도 아니었으면 좋겠지만…….”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창밖을 바라봤다.
“혹시 그게 맞다면 레이튼의 독립 자체가 물 건너갈 수도 있으니까요.”
* * *
“…….”
그로부터 삼일 뒤. 나는 살면서 가장 암울한 사자대면에 돌입했다. 압박감만 따지면 몇 년 전 타냐, 아리나와 식사했던 때 이상이다.
“……아무리 반쯤 예상하고 있던 사실이라곤 하나, 이건 너무 노골적으로 나오시는 거 아닙니까?”
칼페온 사자 대표, 에코가 맞은편을 쏘아보면서 짓씹듯이 말했다.
“벤자민 재상님, 당신께서 있어야 할 곳은 여기가 아니라 아르곤 왕궁 중심부일 텐데요.”
“있어야 할 곳이 뭐 그리 중요하겠나. 내가 있으면 그곳이 아르곤 왕궁 중심부나 다름없는 것을.”
백발의 노인, 벤자민 포드가 기다란 수염을 쓸어내리며 허허롭게 웃었다.
“게다가 뭘 예상했다는 건지 나는 전혀 예상가는 바가 없네. 그게 뭔지 지성의 마법사인 자네가 친절히 설명해 주지 않겠나?”
“……발뺌은 그만하시고 발언 수정부터 해 주시지요. 여기는 레이튼의 독립에 대해 토의하기 위해 모인 자리이고, 아무리 재상께서 있다 해도 이곳이 아르곤의 중심부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런, 그건 내가 사과를 하지. 나이를 먹으면 종종 이놈의 입이 멋대로 움직여서 말이야. 나도 아주 골치라네.”
넉살 떠는 소리에 에코가 말없이 상대를 노려봤다. 하지만 벤자민 포드는 7성급 마법사의 시선이 무섭지도 않은지 계속해서 허허로운 웃음만 지어냈다.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신경전이 불편했던 건 나만이 아니었나 보다. 카시아가 슬쩍 붙어 귓가에 속삭였다.
“이야, 너 생각보다 대단한 애였구나? 에코야 그렇다 치고, 저기 벤자민 영감은 나도 예전에 멀찍이서 한 번 본 게 전부인 거물인데 널 보러 친히 행사까지 한 거잖아.”
이게 무슨 염장 지르는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모르면 그냥 조용히 있어라 얘기하려는데, 돌아보니 카시아의 입가가 씰룩거리고 있었다.
……다 알고 한 말이었구나.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조용히 반격했다.
“그러게요. 워낙 제 분수에 넘치는 사람들이 와서 좀 부담스럽긴 하네요. 친분이라도 있으면 모르겠는데, 하필 또 친분 있는 게 가장 급 떨어지는 사람 하나뿐이니…….”
내 말에 카시아가 발끈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 가장 급 떨어진다는 게 설마 날 말하는 건 아니지?”
“저는 사람이라 했잖아요. 이종족인 카시아는 예외죠.”
“야. 너 모르나 본데, 이종족도 사람에는 포함돼. 인간족이 아닐 뿐이지. 사람의 정의는 생각을 하고 언어를 사용하며, 도구를 만들어 쓰고 사회를 이루어 사는 동물이니…….”
말을 이어 가던 카시아가 흠칫하고 내 얼굴을 바라봤다.
“……너 다 알고 한 얘기구나.”
“깨닫는 게 좀 늦으시네.”
“이…….”
카시아가 소리치기 전에 재빨리 일어섰다.
“말다툼은 거기까지만 하시고, 잠시 제가 발언을 이끌어도 괜찮겠습니까?”
“마음대로 하시게. 우리는 자네의 초대로 온 손님에 불과하니까.”
벤자민 포드가 인자하게 웃으며 답했다. 반면 칼페온 쪽은 모두 있는 대로 인상을 찌푸리면서 말없이 나와 아르곤을 번갈아 노려보기만 했다.
같은 자리에 이렇게나 분위기 다른 집단이 있을 수 있다니.
나는 헛기침 몇 번으로 분위기를 살짝 중화하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단 세 왕국 모두 제 초대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솔직히 제국의 부활을 꿈꾸는 거 아니냐며 사자 대신 군대가 오는 거 아닌가 조금 걱정했었는데, 전부 쓸데없는 고민거리였네요.”
“아직 단언하진 않는 게 좋을 텐데.”
에코가 입꼬리를 늘어뜨리며 끼어들었다.
“이번엔 내가 사자로 왔지만, 그 다음번엔 군대로 되돌아올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
명백한 협박이다. 말투도 적대적으로 바뀌었고. 진심으로 한 소린진 잘 모르겠지만, 그만큼 현재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건 잘 알겠다.
잠시 끊겼던 말을 다시 이어 가려는데, 이번엔 순번 교체하듯이 벤자민 포드가 끼어들었다.
“저자는 황실의 후손도 아니고, 제국 귀족의 출생도 아니네. 그렇다고 군대를 결집한 것도 아니지. 그런데 무슨 명분으로 레이튼에 군대를 끌고 오겠단 건가? 잠시 잊었나 본데, 여기는 우리 셋이 협약한 불가침 영역이야.”
“상대가 먼저 불가침 조약을 깼다면 예외지요. 그 ‘불가침’에 군대가 점령하는 것만 있지는 않을 텐데요? 제국의 부활이 아니더라도, 이곳이 사실상 아르곤의 땅이 된다 생각 들면 저희가 군대를 일으킬 명분은 충분합니다.”
에코의 거친 반박에도 벤자민 포드의 입가에서는 시종일관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럼 다행이군. 레이튼은 아르곤의 지배하에 놓이고자 하는 게 아니라 그저 중립 도시로 인정받길 원하는 것뿐이니까. 만약 일이 성사되어도 칼페온의 군대가 몰려올 걱정은 없겠어.”
“‘사실상’ 아르곤의 땅이 된다 생각 들면이라 말씀드렸을 텐데요. 제가 보기엔 충분히 그런 것처럼 보입니다.”
“그건 자네의 과대망상…….”
“잠시.”
떨떠름한 얼굴로 신경전 사이에 끼어들었다. 금방 끝나겠거니 조금 기다려 보려 했는데, 전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일단 제가 하던 말을 마저 끝내도 되겠습니까? 두 분 다툼은 그 이후로 따로 자리를 내드리도록 하죠.”
“이런, 내가 주인을 내버려 두고 그만 실례를 저질러 버렸군. 미안하네. 계속하게.”
“감사합니다.”
나는 말 없이 노려보고 있는 에코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레이튼에 온 게 군대가 아니라 사자분들이라 정말 다행이고,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원래 이 모임이 끝날 때쯤 하려 한 얘기가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냥 지금 꺼내는 게 나을 것 같네요. 분위기가 분위기다 보니…….”
“말할 거면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하는 게 좋을 거다. 지금 내 인내심이 그렇게 깊은 편은 아니니까.”
에코가 다시 한 번 내 말을 끊고 끼어들었다.
쟤는 뭔 말을 못 하게 하네. 그럭저럭 이해는 간다만.
“그렇게까지 나오시면…… 뭐, 바로 말씀드리지요.”
나는 기분 상한 티를 내지 않고, 오만상을 찌푸린 에코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칼페온에서 저에게 칼페온 후작의 직위를 내려 주셨으면 합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