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200)
“……연합의 사자?”
“예. 말씀드렸듯이 저도 진짜인지 아닌지는 잘……. 그냥 돌려보낼까요?”
황당해서 중얼거린 건데, 따지는 것처럼 들렸나 보다.
나 정도면 상당히 친화적이라 생각하는데, 왜 다들 하나같이 이리 어렵게들 대하는지. 혹시 내 인상이 조금 별론가.
나는 속으로 작게 한숨 쉬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요. 그냥 제가 한번 직접 가서 보죠.”
“알겠습니다.”
직원이 각 잡힌 군인처럼 재빨리 자리를 비켜섰다. 뒤에서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피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재차 한숨을 내쉬면서 그 사이를 통과해 아래로 내려갔다.
“이야 너 진짜 오랜만……이네?”
응접실 소파에 앉아 있는 건 익숙한 얼굴의 빨간 머리 여자였다. 카트발의 누나인 뱀파이어 카시아. 그녀는 나를 보고 반갑게 인사하다가 끝에 갈수록 말을 흐렸다.
“……너 진짜 그 리안 맞냐?”
“알고 계신 리안이 많으신가 봐요.”
“아니, 너 하나뿐이긴 한데…….”
카시아가 황당한 얼굴을 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너 대체 언제 2급까지 오른 거야?!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4급 수준에 불과했잖아!”
“아직 2급 아니에요. 얼마 안 지나 오를 거 같기는 하지만.”
“그 정도 마력 순도랑 양을 가지고 2급이 아니라고……?”
그쪽이 내가 2급에 올랐다는 말 보다 더 충격적이었나 보다. 카시아는 떨리는 눈으로 아무 말 없이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안부 인사는 나중에 카트발이랑 같이하기로 하고, 일단 일 얘기부터 먼저 해 보죠. 카시아가 진짜로 연합에서 온 사자는 맞아요?”
“아, 아…… 응.”
카시아는 갑자기 머리를 흔들더니 다시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내가 연합에서 온 사자 맞아. 마침 여기 인연도 있는 데다 너랑 안면도 있으니 자원해서 오기로 한 거고…… 근데 혹시 너 쌍둥이 아니야? 알고 보니 동생 쪽이 몰래 지하에서 평생 수련만 하다 몸을 바꾼 거라든가…….”
그건 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소설 내용이지.
나는 카시아의 질문을 무시한 채 입을 열었다.
“사자가 오기엔 너무 빠른데. 보낸다는 회답도 없었고. 연합에선 이 일을 별로 중요하지 않게 보고 있나 보죠?”
내 말에 카시아는 찝찝한 얼굴로 한참 동안 나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방금 했던 그 얘기가 농담으로 한 것이 아닌 모양이다.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내가 나가려는 시늉을 하고 나서야 카시아가 겨우 다시 말문을 열었다.
“……중요하지 않게 보고 있다기보단 그냥 입장상 한발 물러섰다 보는 게 맞겠지. 우리가 가질 생각이 없다고는 해도, 남이 가지는 걸 가만히 두고 볼 생각도 없거든. 일단 경쟁자 비스무리한 거니까. 너희든, 왕국이든.”
무조건 내 편을 들어줄 거라곤 생각하지 말라는 소리다. 애초에 기대도 안 했다.
“그 정도면 합당하네요. 그럼 이후 사항은 칼페온과 아르곤의 사자가 온 다음에 진행해도 되는 거죠?”
“응 그렇긴 한데…… 그보다 너 진짜 리안…….”
“맞다니까요. 어쨌든 외부에서 온 사자니까 숙식은 저희가 제공하도록 할게요. 그럼 전 바빠서 이만.”
나는 바깥의 직원에게 카시아의 안내를 부탁한 뒤, 다시 위층 회의실로 걸음을 옮겼다.
* * *
칼페온에서 뽑은 레이튼의 사자는 2급 기사보다도 훨씬 희귀하다는 7성급 마법사였다. 그것은 그만큼 그들이 사태를 심각하게 보고 있다는 증거기도 했다. 원래 그 정도 수준의 실력자는 함부로 밖을 나다니지 않았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겠지. 자칫 대륙에서 가장 큰 도시를 아르곤이 차지할 수도 있으니.’
하지만 이해와 납득은 다른 법이다.
지금 막 레이튼 앞에 도착한 에코가 성문을 바라보며 인상을 확 찡그렸다.
‘왜 하필 내가 사자로 뽑혀서…….’
그는 사실 굳이 이런 외교적 문제에 끼어들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레이튼이 독립 도시가 되든 말든 큰 관심 없었다는 소리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본인의 마법적 성취. 단지 그것 하나뿐이었다.
“후우…….”
여기서 가장 큰 문제점은 칼페온의 다른 마법사들 모두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중에서 그나마 책임감과 능력을 갖춘 게 그 하나뿐이었고.
결국 겸허히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 에코가 속으로 생각했다.
‘하는 수 없지. 최대한 문제를 빨리 해결하는 수밖에’
크게 어렵지는 않을 터였다. 레이튼을 하나로 뭉칠 수 있는 건 오직 리안 하나뿐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답은 간단하지 않은가.
그 중심점만 없애면 끝인 이야기다.
‘불의의 사고는 어쩔 수 없지.’
에코는 리안에게 붙은 ‘재앙을 벤 자’니 뭐니 하는 칭호를 허무맹랑하게 부풀어 오른 소문 탓이라 생각했다.
재앙이란 게 아르곤에서 얘기한 것처럼 강한지 확실치 않기도 했고, 키탄의 도시에서도 성기사들과 함께했다는 사실을 들어서다.
‘본인들 도시가 습격받은 사실을 은근슬쩍 묻어 버리기 위해 만든 영웅이란 거지.’
그런 게 아니고서야 겨우 스물 남짓한 그런 힘을 가지는 게 말이나 된다는 말인가.
꾸며 내려면 조금 더 현실성 있게 짜내 보기라도 하지. 무지몽매한 평민들이면 모를까 그 같은 지식인까지 속아 넘기기엔 너무 허점이 많은 거짓말이었다.
에코는 아르곤과 키탄의 신전을 피식 비웃으며 일행들과 함께 도시로 들어섰다.
* * *
레이튼의 한 건물에서 리안과 만났을 때. 에코는 곧바로 ‘불의의 사고’작전을 폐기했다. 리안의 안에 든 마력의 정순함과 엄청난 양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결코 내 아래가 아니다.’
그 사실은 에코에게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상대는 명명백백히 이제 겨우 20살 남짓한 청년으로 보였으니까. 천재 소리를 숱하게 들었던 그도 그 나이에는 4성급 수준에 겨우 오른 것이 한계였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무것도 아니오.”
걱정스런 리안의 물음에 에코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먼 거리를 건너 와서 그런지 조금 피곤하긴 하군.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이만 일어나 봐도 되겠소?”
“이런, 제 배려가 부족했군요. 바로 머무실 곳으로 안내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리안이 일어서려고 하자 에코는 고개를 저어 사양을 표했다.
“그건 괜찮소. 위치만 알려 주면 알아서 찾아가도록 하지.”
“그러시겠습니까?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잠시 후, 지도를 건네받고 밖으로 나온 에코는 곧장 일행 중 한 명을 불렀다.
“아무래도 작전을 변경해야겠다. 절대 불의의 사고로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예? 에코님이 그렇게 말씀하실 정도란 말입니까?”
애꾸눈의 사내가 놀란 표정으로 반문했다.
스무 살 남짓한 꼬맹이와 비교를 당한다는 것 자체가 자존심이 상할 만도 하건만, 에코는 담담하게 그를 인정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정면 승부로도 이길 수 있을지 장담이 불가능한 수준이었어. 재앙을 벤 자라는 소문은 근거 없이 난 게 아닌 모양이더군.”
“……그렇다면 큰일이군요. 상대가 아르곤의 하수인일 확률이 더 높아졌다는 거니까요.”
에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아무리 아르곤의 지원이 있다 해도 납득하기 힘든 수준이지만, 그조차 없이 혼자 컸다고 하는 건 더욱 말이 안 되니까.”
“연합 역시 레이튼에 비교적 호의적인 입장인 거 같던데…… 걱정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희가 더 할 수 있는 것이 남아 있겠습니까?”
“중심을 없앨 수 없다면 그 주위를 흩트려 놓는 수밖에 없지.”
에코는 걸음을 멈추고 애꾸눈의 사내를 똑바로 응시했다.
“자네가 암흑가에 몸을 담았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네. 여기서 그 점을 활용할 수 있겠나?”
애꾸눈의 사내는 그 한마디에 바로 에코가 원하는 것을 눈치챘다.
“그 리안이란 자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퍼지길 바라시는 겁니까?”
“바로 봤네.”
상대가 곧바로 자신의 말을 알아듣자, 에코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자에 대한 믿음이 낮아진다면 결국 다른 지도자가 나올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레이튼의 독립 자체는 막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아르곤의 손에 넘어가진 않을 걸세.”
“하지만 그 리안이라는 자는 이 도시에 명망이 대단한 인물입니다. 딱히 흠잡을 만한 소문도 없고요.”
“소문이 꼭 사실일 필요는 없지. 그냥 일이 성사되기 전까지 해명하기 불가능한 이야기면 아무래도 상관없네.”
“…….”
모함을 하라는 소리군. 애꾸눈의 사내는 곧바로 이해했다. 암흑가에선 매우 흔하고 일상적인 일 중 하나일 뿐이었으니까. 그걸 8성급 마법사나 되는 사람이 제안할 줄은 몰랐지만.
“말씀은 이해했습니다만, 저희끼리는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주민들이 외지인이 퍼뜨리는 소문을 들어줄 리가 만무하니까요.”
“이곳에도 어둠 속에서 벌어먹고 사는 자들은 있을 것 아닌가? 그들에게 의뢰하게. 돈은 얼마면 되겠나?”
그 말에 애꾸눈은 속으로 곰곰이 생각해 봤다.
보통 소문을 퍼뜨리는 일은 매우 싸게 먹히는 편이다. 별다른 기술이 들어가지도 않는 데다 위험한 편도 아니니까.
하지만 그 소문의 당사자가 문제다.
리안이란 자는 이미 사실상 레이튼의 지배자나 다를 거 없지 않은가. 그것도 주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지배자.
이러면 자연히 위험수당이 따라붙게 된다. 소문의 근원지가 밝혀질 시 겨우 투옥당하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테니까.
“……아마 오백 골드면 될 거 같습니다.”
속으로 손을 집어넣던 에코가 순간 멈칫했다.
“그렇게나 많이?”
“보통은 50골드로 충분합니다만…… 아무래도 상대가 상대니까요. 허나 그 금액이라면 뒷골목의 그 어떤 조직이라도 거절할 수 없을 겁니다.”
“그야 그렇겠지. 8성급 마법사인 나조차 혹할 만한 금액이니…….”
에코는 잠시간 아무 말도 없이 눈을 감고 섰다. 정말 그만큼 막대한 양의 금액이 필요한지 가늠해 보는 것이다. 500골드면 나라에서 지원받은 여행 자금의 대부분이었다.
“……하는 수 없지. 나는 그쪽 일을 잘 모르고, 여기서 그와 관련된 부탁을 할 수 있는 것도 자네뿐이니까. 하지만 중간에 떼먹느라 일을 그르치지는 말게.”
에코의 말에 애꾸눈이 흠칫했다. 300골드로도 충분하다 생각한 걸 부풀려 말한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제가 어찌 그런…….”
“그만. 변명은 됐어. 나를 다른 마법사들처럼 현실 감각 없는 병신으로 보지 말게. 그랬다면 국왕께서도 굳이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나를 보내지 않으셨을 테니.”
에코는 담담한 얼굴로 애꾸눈을 바라봤다.
“자네가 원래 얼마를 생각했는지는 궁금하지도 않아. 그러나 이 일은 반드시 성사시켜야 할 걸세.”
순간 감정 없던 눈에 살기가 담겼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 자네 목숨 하나로 끝나지는 않을 테니까. 수도에 있는 가족들 모두를 왕실 실험실 안으로 처넣어 버릴 거야.”
칼페온의 왕실 실험실.
실험체로 들어가느니 마녀심판 고문을 받는 게 차라리 더 낫다고 소문난 악명 높은 곳이었다.
애꾸눈이 침을 꿀꺽 삼키며 간신히 대답했다.
“……절대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