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의 코드가 보여-199화 (199/225)

너의 코드가 보여 (199)

“……사자? 레이튼에서 말인가?”

“그렇사옵니다.”

“허,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란 말이지…….”

아르곤의 왕, 크림벨 아르곤 레그나르트 6세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왕좌에 몸을 기댔다.

상대 쪽에서 먼저 사자를 요청하는 경우는 난생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사자라는 건 왕이 먼저 너그러운 마음으로 내려보내는 거였지, 신청받는 것이 아니었다.

“이놈들이 혹시 제국의 부활을 노리는 것은 아닌가? 점점 주제를 벗어나는 듯한 모양인데.”

“그런 건 아닐 겁니다.”

1급 기사 빈센트가 앞으로 나섰다.

“상대는 사신(使臣)이 아니라 사자(使者)를 요청했습니다. 일개 국가처럼 대우받을 생각은 없다고 공식적으로 드러낸 거지요. 노리는 건 기껏해야 독립 도시로 인정받는 정도일 겁니다.”

“중립 도시로 인정받는 걸 기껏이라고 표현하기는 좀 그렇지. 그보다…….”

레그나르트 6세가 오묘한 눈으로 빈센트를 바라봤다.

“그대가 정무 도중 끼어드는 건 참으로 오랜만이군. 무슨 연유라도 있소?”

“연유라니요. 저는 그저 전하께서 잘못된 판단으로 나아가는 걸 막기 위해…….”

“아하. 그렇군.”

빈센트의 말을 끊은 레그나르트 6세가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이 편지를 보낸 자가 그 유명한 리안이었지? 몇 년 전 그대와 함께 바포메트를 처치했던 단테 후작과 각별한 사이라는. 지금 그때의 연으로 변호하는 건가?”

“변호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제가 그런 사사로운 인연에 매달려 끼어들 만큼 줏대가 없어 보이십니까?”

“적어도 지금은 그래 보이는군.”

“전하!”

빈센트의 외침에 레그나르트 6세가 손가락으로 귀를 후벼 팠다.

“거 소리 좀 지르지 마시오. 내 귀 안 먹었으니.”

“…….”

“그리고 사사로운 인연이라 하기에도 뭣하지. 공적으로 봐도 우리 왕국을 지키는 데 일조한 단테 후작의 친우 아닌가. 어느새 모습을 감춘 그의 대리인이기도 하고. 이전에도 왕국의 이름난 살인범을 잡은 전적도 있지.”

“하면…….”

“좋소. 사자를 파견하는 걸로 하지.”

빈센트의 표정이 살짝 밝아졌다.

단테 후작에게 더 보답을 하고 싶었는데, 갑자기 사라져 그럴 기회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 그 대리인이라는 사람에게라도 뭔가 도움을 줄 수 있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허나 레그나르트 6세의 말은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그리고 그 담당자는…… 벤자민 대공이면 되겠군. 어때, 딱 탁월한 인선 아니오?”

“전하!”

왕의 말에 기겁한 빈센트가 크게 소리쳤다.

벤자민 포드. 아르곤에서 왕 다음의 직위를 가지고 있는 왕국의 재상이다. 다른 왕국의 사신이면 모를까, 고작 일개 사자로 보낼 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소리다.

보통은 그만큼 상대를 존중해 준다 여길 수 있겠으나, 문제는 지금 레이튼의 상황이었다.

레이튼이 현재 독립 도시로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은 대륙 누구나 아는 사실. 그리고 그 모두가 아는 사실이란 건 지도자로 유력한 리안이 아르곤과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까지 포함한 이야기였다.

이럴 때 격을 초월한 인사를 파견하는 것은, 레이튼이 중립 도시가 아닌 아르곤의 휘하라는 오해를 사기 딱 좋았다.

“거 귀청 떨어지게…… 내가 소리 좀 그만 지르라 하지 않았소.”

“전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지금 벤자민 대공을 보내는 건 오히려 레이튼에 독이라는 사실을요. 그뿐 아니라 저희 왕국도 다른 왕국들과 외교적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 정도 문제야 그냥 재물 좀 풀면 해결할 수 있소. 별로 대단찮은 일도 아니지. 그러니 빈센트 경이 더 걱정할 필요는 없소. 그대가 혹시 레이튼의 신하가 아니라면 말이야.”

빈센트가 떨리는 눈으로 왕을 바라봤다.

모르고 내린 명령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오해를 더 불러일으키고, 사실로 만들려는 목적이겠지.

먹자니 다른 곳 눈치가 보이고 내버려 두자니 아까운 땅을 이참에 소유하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물론, 그건 그가 속한 아르곤에 이득이 될 일이 틀림없다. 레이튼은 왕국 어느 도시보다도 거대하고 잠재력 넘치는 땅이었으니. 왕은 올바른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빈센트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걸리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가 원했던 것은 빚을 진 상대에게 도움을 주는 거였지, 피해를 입히기 위한 게 아니었으니까.

‘……허나 이건 명백히 사사로운 목적이지.’

처음에 그가 주장했던 것과 완전히 상반된다.

결국 빈센트가 할 수 있는 건 그 한 번도 본 적 없는 리안이라는 자가 현명히 대처하길 바라는 것뿐이었다. 묵묵하지만 서투르진 않았던 단테처럼 말이다.

* * *

세 왕국에 사자를 보내 달라고 요청한 지 일주일쯤 지났을까. 칼페온과 아르곤에서 생각보다 빠르게 긍정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이건 의외로군.”

“그러게요.”

나는 아르곤에서 온 공문을 검토하며 말했다.

“칼페온이야 뭐, 제가 사실 아르곤의 숨겨 둔 밀정 같은 게 아닐까 의심해서 무조건 보낼 거란 생각은 했는데……. 아르곤은 적어도 한 번쯤 튕길 줄 알았어요.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뇌물 더 받아먹을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혹시 자네의 평판이나 인맥이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닌가?”

테이어 테르베로츠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아르곤의 왕은 그리 너그러운 성격이 아니에요. 만약 누군가 끝까지 저를 변호하려 했다 해도 별로 영향을 받진 않았겠죠.”

“레그나르트 6세를 직접 보기라도 한 것처럼 얘기하는군.”

“소문은 들었으니까요. 그보다…….”

공문서를 탁자에 탁, 내려놨다.

“역시 뭔가 꿍꿍이가 있는 거 같죠?”

“없는 게 더 이상한 법이지.”

“혹시 짐작 가는 거 없으세요?”

지나가듯 묻자,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두 눈을 꼭 감았다. 고민할 때 나오는 그의 버릇이다. 잠시 차를 홀짝이며 기다렸더니, 이내 그가 말문을 연다.

“크게 두 가지 가능성이 생각나긴 하는군.”

“그게 뭐죠?”

“첫 번째는 정말 순순히 레이튼을 중립으로 인정한다는 거네. 의외로 아르곤 입장에서도 크게 나쁘진 않은 결과야. 어차피 먹지도 못할 거 애매한 관계의 남 주느니 아예 모르는 자가 먹는 게 나을 수도 있으니까.”

“정확히 세 왕국 중간에 껴 있으니 완충지대화 시켜서 군비도 줄일 수 있을 테고요.”

“그렇지.”

낮기는 하지만, 가능성 있는 이야기긴 하다. 괜히 이리저리 빼며 간 보는 것보다 호쾌한 척 주면서 보답을 요구할 수도 있지.

크림벨 아르곤 레그나르트 6세…… 이름 왜 이리 길어. 아무튼, 그놈 욕심에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그럼 역시 그쪽 같은데…….

“두 번째는요?”

“겉으론 중립을 인정해 주는 척하고 속으론 지들이 꿀꺽하려는 거지.”

예상대로다.

“사자로 오는 게 누굴까요?”

앞뒤 다 자른 질문이었지만, 테이어 테르베로츠는 그 한마디에 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걸 눈치챈 듯했다.

그가 피식 웃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거기까진 모르겠군. 일단 자네가 명색이 후작 대리인이니…… 아마 공작급을 보내지 않겠나? 그 정도면 충분히 과한 인사야.”

공작이면 제일 못한 자도 왕국 서열 20위는 된다. 확실히 일개 사자로 보내긴 과하다고 볼 수 있지.

나는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일단 상대로 오는 게 누구인지 정확히 파악부터 하는 게 우선이겠네요. 알아보실 수 있죠?”

“일주일이면 충분할 걸세.”

“삼 일로 하죠. 대책까지 짜려면 일주일은 좀 빠듯하니까.”

“혹시 멋대로 기한부터 내뱉으면 세상일이 다 알아서 되는 줄 아나?”

“자신 없으신가 보죠?”

테이어 테르베로츠의 이마에 ‘참을 인’ 자가 새겨졌다.

“해 보지. 해 보는데, 자넨 절대 곱게 죽진 못할 거야. 과로에 시달린 직원들이 항상 자네를 저주할 테니까.”

“글쎄요. 보통 욕먹으면 오히려 더 많이 산다고 누가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아직도 누굴 저주할 만한 기력이 남아 있었다니. 내가 그동안 너무 쉬엄쉬엄 굴렸나…….”

말끝을 흐리자,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나를 무슨 괴물 보듯 바라봤다. 나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농담이에요. 초과 수당은 제대로 챙겨 주시고, 정 무리다 싶으면 하루 정돈 늦어도 상관없어요. 그보다 이상한 게 한 가지 더 있는데…….”

“연합을 말하는 건가?”

고개를 끄덕였다. 칼페온과 아르곤에서도 벌써 답변이 왔는데, 정작 가장 호의적이었던 겔리안에서 무응답이라는 건 조금 이상했다.

물리적인 거리가 조금 더 떨어져 있긴 하지만, 통신은 마탑의 수정구를 통해 했으니까. 굳이 연합만 특별히 늦을 이유가 없었다.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며 말했다.

“이유는 나도 모르겠군. 그냥 조금 늦는 거 아니겠나? 오히려 칼페온과 아르곤의 반응이 굉장히 빨랐던 편이야.”

“음…… 그건 그렇죠.”

확실히 아직 이상하다 생각하긴 이를지도 모른다. 결국 공문을 보낸 건 일주일밖에 안 지났으니까.

내가 빨리빨리의 민족이라 조금 조급해한 거지, 현대 지구에서도 이것 보다 늦는 국가는 수두룩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테이어 테르베로츠와 다른 사안을 토의하기 시작했다.

주로 개간이 어느 정도 끝난 대물림의 숲에 대한 이야기였다.

크기가 상당해서 오랜 시간이 걸릴 줄 알았는데, 진행이 생각보다 훨씬 빠르다. 분명 겉 땅이 그간 받은 압력으로 단단해져 삽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다 들었거늘.

굴착기로도 힘든 속도 아닌가? 적어도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라는 게 확실했다.

그럼 이제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를 알아야 하는데……. 아무리 좋은 일이라고는 하나 원인을 몰라서야 말짱 도루묵이니 말이다.

“…….”

그렇게 보고서를 검토하다 보니 얼마 되지 않아 답이 나왔다. 원인은 단순하고도 황당했다.

아니, 이 인간들이 언제 나도 모르게 1기사단원들을 투입했지?

하나하나가 굴착기를 뛰어넘는 스펙을 지닌 이들이니 개간이 빨리 끝난 것도 당연했다. 문제는 그 본인들의 의지지.

나도 걔네한테 부탁하는 걸 생각은 해 봤지만, 그냥 포기하고 말았는데. 여기 기사들은 삽질하라는 걸 되게 모욕적으로 받아들이니까.

혹시 리카르도가 명령한 건가?

위쪽으로 가 제안서를 낸 이름을 확인해 보니 자원이라고 쓰여 있다.

“허…….”

조금 감동이다. 경비 일도 본인들을 모욕하는 거라며 성내던 놈들이 자원해서 삽질을 하다니. 그것도 나한텐 티 내지도 않고.

나중에 뭐라도 보답해 줘야겠는걸.

흐뭇하게 웃으며 다음 사안으로 넘어가려던 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출입을 허가하자 곧장 열린 문으로 직원 한 명이 들어왔다. 안에서 중요한 회의를 하고 있다는 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그만큼 중요한 문제인가?

슬쩍 표정을 살피니 당황의 기색이 엿보이기는 한다. 다행히 급해 보이진 않았지만.

나는 일단 서류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게…….”

직원이 아리송한 얼굴로 조심스레 말했다.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래쪽에 연합의 사자라는 이종족이 나타나 리안 님과의 독대를 청하고 있습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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