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의 코드가 보여-198화 (198/225)

너의 코드가 보여 (198)

레이튼은 보통 사람들 인식보다 훨씬 커다란 도시다. 인구 10만만 넘어가도 대도시라 하는 대륙에서 한때는 70만을 찍기도 하였으니 역사상 가장 큰 도시라 해도 좋다. 괜히 제국의 수도 역할을 한 것이 아니란 거다.

물론, 전쟁 이후 그 많던 사람들이 확연히 줄었으니 어찌 보면 과거의 영광이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거주자가 줄었다고 안에 있던 시설들까지 어디로 사라지는 건 아니다.

레이튼엔 동서남북과 중앙에 각각 1개씩 5개의 거대한 광장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크기가 큰 중앙광장은 사람을 만 명 넘게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그 규모가 대단했다.

제국이 온전할 때도 이 중앙광장이 가득 차는 경우는 한 손에 꼽을 정도였는데, 대표적으론 황제의 취임식이 있다. 대륙 어디에서나 최고로 뽑았던 행사다.

그만큼 중요한 일이 있지 않고서야 이곳이 가득 찬 광경을 보는 건 불가능했다는 소리다.

“그런데 이게 대체 뭔…….”

커다란 배낭을 멘 상인이 질린 얼굴로 주위를 둘러봤다. 발 디딜 곳 없이 빽빽한 광장. 사람이 무슨 벌레 같다. 개미가 우글우글거리는 모습을 보는 기분이라 해야 하나.

그는 그저 1년 전 노블레스와의 합병 이후 대륙 3대 상단으로 거듭난 리안 상회의 물건을 사기 위해 온 것뿐이었기에 이게 도통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던 그가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행인 하나를 붙잡았다.

“잠깐 말씀 좀 물읍시다. 혹시 여기서 오늘 무슨 행사라도 하는 겁니까?”

붙잡힌 행인이 인상을 찌푸리고 멈춰 섰다. 안 그래도 복잡한 와중에 이런 질문이나 듣고 있으니 순간 짜증이 확 돋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행인은 이내 입가에 억지 미소를 띠며 되물었다.

“혹시 레이튼은 처음 오시는 거요?”

“5년 전에 잠깐 들른 적은 있습니다만…….”

상인이 뒷말을 흐렸다. 행인은 개의치 않고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방문이 5년 전이면 그렇게 놀랄 만도 하지. 그땐 아직 하루에만 아사자가 수십씩 나올 때였으니. 아무튼, 오늘 딱히 무슨 행사가 있는 건 아니요. 이 정도면 그냥 일상적인 수준이지.”

“……이게 일상적인 광경이란 말입니까?”

상인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나름 많은 도시를 돌아다녔다 확신함에도 이런 인파는 난생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제국 시절 레이튼도 평상시엔 이렇지 않았다.

“대체 그동안 이 도시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요?”

“이게 다 성자님의 덕이지.”

“성자라면…… 혹시 리안 경을 말하는 겁니까?”

밖에선 ‘재앙을 벤 자’라는 칭호가 훨씬 유명해서 바로 떠올리지 못했다.

“물론이오. 대륙에 성자라는 칭호를 가진 분이 어디 그분 말고 또 있나?”

“아무리 대륙 3대 상회 중 하나를 운영하고 있다지만, 어떻게 상회 혼자서 이렇게…….”

“리안 상회가 어디 그냥 3대 상회요? 다른 어느 곳도 대체할 수 없는 유일한 상회인데.”

그 말에 상인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리안 상회의 가장 큰 특징이 특이한 물건 판매라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으니까.

처음에는 브랜드인지 뭔지 듣도 보도 못한 개념을 만들더니, 어느새 동방의 물품들부터 혼자서 청소하는 마도구 같은 신기한 걸 혼자 독점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이렇게 사람이 많은 것도 어느 정도 이해는 간다.’

그저 규모만 큰 다른 상회와 다르게 리안 상회의 물건은 대체제가 없지 않은가. 아쉬운 사람이 알아서 찾아와야 한다는 소리다.

정작 그도 그런 목적으로 찾아온 사람 중 하나였고.

‘저 인파들이 대부분 상거래를 위해 온 사람들이란 거군.’

상인이 새삼 감탄했다.

‘대륙 3대 상단이 대륙 유일 상단으로 바뀔 날도 머지않은 거 같은데…….’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그가 재빨리 물었다.

“호, 혹시 리안 상회와 거래하고 싶으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그냥 주변 어딜 가도 될 거요. 어느 상점이든 리안 상회 물건을 취급하고 있으니까.”

“그런 게 아니라 진짜 상회 본점을 말하는 겁니다. 꼭 상회와 직속 계약을 맺어 다른 도시에 공급하고 싶습니다.”

“직접?”

행인이 상인의 행색을 위아래로 쭉 훑어봤다.

“그리 쉽지는 않을 텐데. 내가 듣기론 일정 금액 밑으론 계약도 안 해 준다 알고 있소.”

“돈은 충분히 준비해 왔습니다. 부디 장소만 알려 주시지요.”

“……뭐 본인이 그렇다면야 딱히 할 말은 없지. 도시가 워낙 커서 내가 한 번에 알려 주긴 힘들고, 일단 저어기 보이는 골목길까지 가서 다른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물어보시오. 성자님께서 외지인에겐 친절히 대하라 하셨으니 모두 순순히 가르쳐 줄 거요.”

“감사합니다! 나중에 만나면 꼭 사례하도록 하겠습니다!”

상인이 꾸벅 인사하고 곧장 걸음을 박찼다. 행인이 그를 보다가 쯧쯧 혀를 찼다.

“딱 봐도 뜨내기 같아 보이는데 10골드나 있을는지 모르겠네. 아마 상회 직계약 조건이 최소 천 골드였을 텐데…….”

중얼거리던 그가 이내 고개를 털어 냈다.

“뭐, 이제 내가 알 바는 아니지. 게다가 직계약이 아니더라도 성자님의 물건이라면 충분히 이득을 볼 수 있을 테고.”

그는 그쯤에서 상인에 대한 걱정을 끊어 버리고, 새삼 광장을 바라봤다.

‘진짜 변하긴 많이 변했군…….’

상인을 상대론 잘난 듯 말했지만, 레이튼에서 살고 있는 그 자신도 이런 변화가 믿기지 않을 때가 많았다. 어느 순간 갑자기 다른 세계에 떨어진 거 같달까.

‘이게 다 성자님 덕분이지.’

다시 한 번 감사한 마음을 가진 행인이 다시금 발걸음을 뗐다.

그도 최근 레이튼에서 가장 핫한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분명 레이튼이 진정한 독립도시가 될지도 모른다 했지…….’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그냥 그럴지도 모른단 소문만 돌뿐. 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그보다 이후의 일이었다.

‘만약 그런다면 역시 영주는 성자님이 되는 건가?’

제발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런 작은 소망을 품으며 그가 더더욱 걸음을 재촉했다.

* * *

“독립이고 지랄이고 그냥 다 관두고 싶다.”

책상에 털썩 머리를 묻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걸 용케 들었는지 근처에 있던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지난 1년 동안 일군 걸 무효로 만들 셈인가?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조금만 더 노력해 보세.”

“지난 1년 동안 서류 더미에 묻혀 살았는데 진전된 게 거의 없으니 문제죠.”

“그럼 독립 도시 만드는 게 그리 쉬울 줄 알았나? 어떤 점에서 보면 차라리 세 왕국이랑 싸우는 게 더 편할 수도 있을 거야.”

“전쟁이라…… 지금 마음 같아선 그냥 그래 볼까 싶기도 한데요. 게릴라전으로 가면 이길 가능성도 있을 거 같은데. 1기사단원들도 좋아할 테고.”

“혹시 진심으로 하는 소린가?”

“아니요.”

나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그런 마음 든다는 건 진심이에요. 하여간 쫌생이 새끼들. 어차피 반쯤 포기했던 도시 주는 게 그렇게나 아까운가?”

“원래 본인이 가지지 못하는 걸 남 주는 건 더 아까운 법이지. 자네도 반대 상황이었다면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 아닌가.”

“…….”

그건 그렇다. 인정하진 않을 거지만.

나는 오늘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내쉬며 다시 서류 작업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저번 달에 아르곤 쪽으로 먹인 뇌물이 만오천 골드, 같은 시기 칼페온에 지급한 마법 재료 가치가 현금으로 이만 칠천 골드…….

이 새끼들은 왜 꼭 구하기 힘든 현물을 요구하면서도 양심 없이 금액까지 큰 거지?

진짜 혁명 마렵다. 칼페온 혁명 이벤트까지 시기가 얼마나 남았더라. 앞으로 2년이던가?

지난 1년 가까이 먹물만 보고 살아서 그런지 시간 감각이 이상하다.

잡생각과 함께 기계적으로 종이를 넘기다 보니 특이 사항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겔리안 연합엔 더 들어간 게 없네요? 어떻게 된 거예요?”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내가 내민 서류를 슬쩍 보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본인들은 애초부터 레이튼 땅에 큰 관심 없었다고 하는군. 지금 있는 영토만으로 충분하다나.”

“그걸 지들 입으로 말해요?”

“보고서에는 그렇게 적혀 있네.”

“허…… 그래도 이종족이 양심은 있네.”

칼페온에서 올라온 서류와 비교해 보니 더 그래 보인다. 마치 선녀 같달까.

나는 피식 웃으며 겔리안 연합에서 올라온 보고서에 다시 시선을 고정했다.

보통 계속해서 받던 걸 먼저 사양하는 건 대부분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만 모른 척 입 싹 닫겠다든가, 아니면 이 정도면 네 부탁 들어줄 준비가 됐다든가.

겔리안 연합이 선택한 건 확실히 두 번째일 거다.

인간보다 낯짝 두꺼운 종족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 이상으로 순수한 종족이 훨씬 많으니까.

어쨌든 오랜만에 들어온 희소식에 기뻐하는데,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떨떠름하게 입을 열었다.

“뭐 그것도 그렇겠지만, 아마 진짜로 큰 관심 없다는 것도 사실일 걸세. 연합은 다른 두 왕국과는 사정이 좀 다르니까. 단순 비교는 곤란하다는 소리지.”

“하지만 아르곤이나 칼페온은 같은 상황이었어도 끝까지 입 싹 닫고 있었을걸요.”

“……그건 그랬겠지.”

생각보다 순순히 수긍한다. 이 양반도 제국민 출신이다 보니 이종족 칭찬하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겉으론 아닌 척해도 내심 두 왕국 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이긴 했나 보지?

이런저런 교육으로 이종족 혐오에 대한 인식을 줄여 가려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쩌면 발상의 전환으로 서류 작업을 엄청 시키는 게 해결 방안이 될지도 모르겠다.

걔네도 한 1년 정도만 나처럼 굴리면 옆에 있는 동료가 귀가 길든 신장이 3미터가 되든 신경 쓸 겨를도 없을 테니까.

“그보다 이걸로 드디어 세 왕국 중 하나를 저희 편으로 만들기에 성공한 거네요.”

“그래. 이제 자네가 말한 균형을 맞추려면 한 곳만 더 끌어들이면 되네. 아마 아르곤이 되겠지. 자네와 관계도 괜찮은 곳이니.”

“시간이나 돈은 얼마나 더 들어갈까요?”

내 질문에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글쎄……. 고위직은 이미 대부분 뇌물을 받아먹었고, 아래는 자네에 대한 이미지가 좋으니 좀만 더 하면 되지 않겠나?”

“그 조금의 예상 수치를 말해 봐요.”

“시간은 앞으로 1년. 소요 자금은 대략 20만 골드.”

그 대답을 듣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돈이야 다시 벌면 된다 쳐도 여기서 1년 더는 너무 길다. 벌써 2부 시작 시점인데.

결국 나는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1년은 너무 길어요. 조금 단축해 보죠.”

“이것도 최소로 잡은 수치네. 너무 서두르면 될 것도 안 되는 법이야.”

“저희 편도 하나 생겼잖아요. 이럴 때 단숨에 치고 나가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어요.”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감았던 눈을 되돌리고 나를 바라봤다.

“단숨에 해치운다라……. 뭐 생각해 둔 방안이라도 있나?”

“네. 다 같이 사자대면이나 한번 해 보죠.”

“……사자대면?”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겠지.’라는 눈의 테이어 테르베로츠를 마주 보며 말했다.

“맞아요. 여기 세 왕국의 사자를 모두 모아 놓고 담판을 짓는 거예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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