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197)
“독립 도시? 레이튼은 이미 그런 상태 아닌가?”
“말이 좋아 독립 도시지, 사실 세 왕국 휘하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죠. 따지고 보면 지배자가 없다기보다는 지배자가 세 명이나 돼서 방치하고 있는 것에 가깝습니다.”
“……뭐, 그도 그렇긴 하군.”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진정한 독립 도시가 되는 건 어려울 거야. 이기든 설득하든 상대해야 할 상대가 셋이나 되니까.”
“반대로 생각해 보죠. 오히려 상대가 셋이라 더 쉬울 수도 있습니다.”
“셋이라 더 쉽다……?”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눈을 감았다. 그러더니 잠시 후 갑자기 피식 웃는다.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군. 그 세 왕국이 그리 끈끈한 사이는 아니니까 말이야. 지배자가 셋이나 된다는 걸 역이용하려는 건가?”
“바로 보셨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슬슬 식어 가는 찻잔을 다시 채웠다.
“아까 말했듯, 지배자가 셋인 건 단점이 되기도 하지만 장점이 되기도 하지요. 그들 중 하나라도 레이튼에 손대려는 순간 다른 두 국가가 가만 있지 않을 테니까요.”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흥미로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은 아닐세. 세 왕국 모두가 잠시 손잡고 레이튼을 세 등분 해 먹을 수도 있어. 서로를 경계하는 만큼이나 새로운 세력의 등장을 환영하지 않을 테니까.”
“거기서 외교가 중요해지는 거지요. 최소 두 개 국가가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서로 손잡을 일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아르곤과 겔리안 연합을 말하는 거군.”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눈을 빛냈다.
“혹시 아르곤에서 후작 대리의 직위를 받은 것과 겔리안 연합의 주력인 엘프와 뱀파이어의 호감을 끌어낸 게 모두 이를 위한 포섭이었나?”
나는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차만 마셨다.
그 전부가 계산하에 행했던 일은 아니지만, 알아서 착각해 주면 딱히 나쁠 거 없었으니까.
예상대로 내 침묵을 그대로 해석한 듯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소파를 팡, 내리쳤다.
“대단하군! 대단해! 도저히 이제 겨우 스물이 된 청년이 예전부터 계획했다곤 믿기 힘들 정도야! 이래서야 과거의 영광에만 집착하고 있던 노블레스가 뒤로 밀려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겠군.”
감탄하며 이어지던 말소리가 뒤에 가선 살짝 침울함으로 물든다.
어쩔 수 없겠지. 방법이 없다 생각해서 항복했을 뿐, 진심으로 노블레스를 포기하고 싶진 않았을 테니까.
여기선 저 아저씨 기분을 좀 풀어 줄 필요가 있겠다.
“혹시 노블레스를 계속 이어 가고 싶으시다면 그렇게 하셔도 됩니다.”
“물론 아까와 같이 레이튼 내에서는 완전히 물러나야 한다는 조건이겠지?”
“아까완 달리 상회 재산도 보존해드리지요. 떠보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다.”
잠깐이라도 고민하는 기색은 보일 줄 알았는데, 테이어는 싱겁게 손을 내저었다.
“됐네. 이제 와서 뭘……. 게다가 노블레스가 레이튼이라는 기반을 잃으면 바깥에 가 봐야 뭘 하겠나? 그냥 흔한 중소 상단 중 하나로 자리 잡고 끝이겠지.”
정말로 미련은 깨끗이 버린 것처럼 개운한 표정이다.
아무리 상황이 그리 좋지는 않다고 해도 아까부터 너무 시원시원하게 나오는데…….
나는 살짝 시선을 내리깔았다. 의심하고 있다는 걸 보이면 안 되니까.
노블레스가 한물간 상회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어디 무시할 수준도 아니다. 부자는 망해도 삼대는 간다지 않나. 현대식으로 따지면 그래도 중견기업 선두는 될 거다.
테이어 테르베로츠의 안목은 정평이 나 있으니 쉽게 풀릴 수도 있겠다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오는 건 예상외다.
혹시 계란으로 바위 치는 걸 포기하고 몰래 들어와 내분을 유도하려는 건 아닐까?
만약 그렇다 해도 대처할 자신은 있지만, 상황이 더 귀찮아지긴 한다. 항상 외부의 적보다는 내부의 적이 훨씬 무서운 법 아닌가.
어차피 민심이 그리 좋은 조직도 아닌 만큼 깨끗이 밀어 버리는 게 가장 깔끔하긴 한데……그럼 또 자이어가 마음에 걸리고.
이래서 정은 함부로 쌓으면 안 된다는 건가. 고민에 빠져 있을 무렵이었다.
“표정을 보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군.”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불쑥 말을 꺼냈다.
“……전 지금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만.”
“정정하지. 갑자기 침묵이 길어지면 누구라도 상대가 나를 의심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걸세. 다음부턴 차라리 주제에 벗어나는 시시한 잡담이라도 이어 가면서 시간을 끌게. 그러면 상대도 그냥 잠깐 분위기를 환기시킨다 여길 테니 말이야.”
“…….”
확실히 맞는 말이었다. 방금 내가 한 행동은 누가 봐도 어수룩했지. 그리고 어차피 들킨 이상 당당하게 나가는 편이 더 나을 거다.
나는 다시 고개를 들고 테이어 테르베로츠를 마주 봤다.
“솔직히 그 말대로입니다. 아까부터 너무 순순하세요.”
“살다 살다 순순하다고 의심받는 일이 생길 줄은 몰랐군. 후환이 생기면 그때 가서 고민해 보겠다 한 게 바로 방금 전 아닌가?”
“후환이 외부에서 생기는 건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내부에서 터지는 건 문제가 되지요. 솔직히 제가 정치에는 크게 자신 없는데, 그때부턴 힘의 논리가 아니라 정치의 논리가 적용될 테니까요.”
대놓고 의심한다 선언한 건데, 테이어 테르베로츠는 그저 웃었다.
“다행이군. 혹시 정치까지 자신 있다 하면 내가 3인자로 들어간다 해도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꼴이 되었을 테니.”
그 뒤로 그가 작게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태도도 마음에 든다고 중얼거렸다.
“아무튼, 그렇게 경계해 줘서 다행일세. 나도 똑같이 자네가 나를 너무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 아닌가 걱정하고 있었거든.”
“제 입장에선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는 사안이니까요.”
“굳이 받아들일 이유가 없기도 하지. 어차피 레이튼은 무법지대야. 애써 만든 자경단도 사실상 자네 손에 있는 이상 만약 무력 합병한다 해도 내가 그걸 어떻게 막았겠나? 심지어 제국 1기사단까지 포함된 전력인데.”
“그럴 의지가 없다는 건 아까부터 계속 보여드렸을 텐데요. 혹시 믿지 못하신 겁니까?”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믿었네. 믿을 수밖에 없었지.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노블레스는 이미 자네가 굳이 그런 기만 전술을 사용할 만큼 강력한 상대도 아니니까.”
“그러면…….”
“내가 걱정한 건 그 이후일세. 나를 3인자로 만드는 것까진 좋아. 하지만 그다음 날 바로 내쳐 버리면 아무 손해 없이 노블레스를 꿀꺽해 버리는 거 아닌가.”
“…….”
나 역시 고민은 했던 가정이다. 하지만 겨우 이 짧은 사이에 테이어 테르베로츠의 생각이 거기까지 닿았을 줄은 몰랐다.
현대에 와선 흔한 일이지만, 여기에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전례가 없는 문제였으니까. 이곳은 의외로 의리를 잘 지키는 편이다.
“어쨌든 내부 혼란을 경계한다는 건 나를 그렇게 내칠 생각은 없다는 거 아니겠나. 한결 안심할 수 있는 셈이지.”
“그럼 저는 테이어 테르베로츠 님을 어떻게 믿어야 할까요?”
떠보기 위한 질문이었는데, 예상외의 답변이 되돌아왔다.
“믿지 말게.”
“……예?”
“믿지 말라고 했네.”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차갑게 식었을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내가 그저 아버지한테 물려받은 노블레스에 큰 정이 없었다거나 이 나이에 새로 열정을 불태워 보고 싶어졌다 해도 못 믿을 거 아닌가. 나는 원래 신뢰는 믿음이 아니라 의심에서 나온다 생각하는 사람이야.”
“……저한테 앞으로 쭉 뒤통수에 혹 하나 달고 생활하라는 말입니까?”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앞으로 혹은 쭉 붙을 수밖에 없을 텐데 뭐가 문젠가? 설마 그 정도로 큰일을 벌이는데 그 자릴 모두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만 채울 수 있다 믿은 건 아닐 테고.”
……그건 그렇긴 하다. 오히려 저렇게 당당히 나오니 되려 믿음이 생기는 거 같기도 하고.
결국 나는 고민 끝에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치안대 외에 내부 감찰단도 따로 만들어야겠군요.”
“……내부 조직을 전담해서 감시하는 조직인가? 처음 들어 보는 개념이지만…… 괜찮겠군. 그곳만 믿을 수 있는 사람들로 채우면 될 테니.”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감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정말 정치엔 자신 없는 것 맞나? 방금 그건 굉장히 정치적인 문제였어.”
그냥 지구의 제도에서 따왔을 뿐이다.
이제 와서 ‘아아, 이것은 감사부(監査部)라고 한다. 현대의 조직 형태지.’ 같은 전개로 갈 생각은 없었기에, 재빨리 말을 돌렸다.
“언뜻 생각난 개념일 뿐입니다. 그보다 이제 테르베로츠 님도 저희 일원이니 같이 레이튼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부터 해결해 보죠.”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라면…… 식량 말인가?”
설명 없이도 척척 알아들으니 좋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지금 레이튼은 식량을 전량 외부에서 수입하고 있죠. 굳이 세 왕국이 손을 잡지 않아도 식량 수출만 막으면 저희에게 치명적일 겁니다.”
“굉장히 취약한 구조기는 하지. 하지만 다른 방법이 뭐 있나? 레이튼에는 농사 지을 땅이 전무하네.”
“땅 문제는 제가 어떻게든 해결해 보겠습니다. 테르베로츠 님에겐 외교를 부탁드리죠. 레이튼의 독립만이면 제가 가진 힘으로 충분하겠지만, 식량 자급자족이 가능한 땅까지 포함해 버리면 조금 부족할지도 모르니까요.”
“외교라면 문제없지만…… 세 왕국에 포함되지 않으면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 대륙에 남아 있던가?”
생각나는 곳이 없는지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도 사실 식량 자급은 거의 포기하고 있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다. 누가 대물림의 숲이 그렇게 변할 거라 예상이나 했겠나.
나는 씨익 웃으며 담담히 말했다.
“있습니다. 그것도 밀 하나 심으면 수백 개가 자랄 만큼 엄청난 땅이요.”
* * *
테이어 테르베로츠와 이런저런 조율을 마친 뒤 3개월. 노블레스를 흡수, 합병하는 문제는 생각 이상으로 수월하게 끝났다.
일단 내부 직원들이 죄다 레이튼 시민들인지라 기본적으로 상회에 호의적이기도 했고, 불만 있는 윗대가리들은 바로 돈 좀 쥐여 주고 쫓아 버렸기 때문이다.
목숨 걸고 반항하는 인간 하나쯤은 나올 줄 알았는데, 그런 것도 없었다. 아쉽게도.
어쨌든 이제 레이튼에는 사실상 윗대가리라고 할 만한 집단이 우리 리안 상회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는 소리다.
“…….”
왠지 감성 돋는 기분이라 발코니 밖으로 나와 도시의 풍경을 바라봤다. 처음 여기 왔을 때완 비교도 안 될 만큼 발전한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짧은 새에 지옥 같던 곳이 이렇게까지 변할 수도 있구나.
그렇게 잠시 감상에 젖어 있다가, 이내 고개를 털었다.
예상보다 잘 풀리고 빨리 도달하긴 했지만, 아직 갈 길이 삼만리다.
사실상 불가침 영역이던 황궁도 정리해야 하고, 세 왕국 사이에서 밸런스도 잘 잡아야지. 자칫하면 제국의 부활이라고 다구리 맞는다. 이제 2부 본편 시점도 얼마 안 남았으니 이래저래 터질 사건들도 준비해야 하고…….
거기까지 생각하다 피식 웃었다.
그래. 앞으로 할 일이 그렇게나 많은 만큼 오늘 정도는 마음 편히 쉬어도 되겠지.
나는 목적지에 가까이 도달했다는 만족감을 만끽하며 발코니에 몸을 기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