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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코드가 보여-196화 (196/225)

너의 코드가 보여 (196)

그것은 마치 급작스레 일어난 돌풍과도 같았다.

차이점이라면 살에 닿는 느낌이 바람보단 바위가 와서 부딪히는 쪽에 가깝단 것과, 엄청난 한기에도 불구하고 눈보라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일까.

어쨌든 강한 충격이라는 건 변함없었기에, 타냐의 몸은 속절없이 멀리 나가떨어졌다.

쿠웅!

“괜찮아?!”

나는 재빨리 타냐가 넘어진 곳으로 다가가 녀석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다친 데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래서 더 이상했다. 분명 잠깐이지만 나도 놀랄 정도의 충격이었는데, 저택 공식 몸치인 타냐가 멀쩡하다는 게 말이 안 됐으니까.

겉으론 괜찮아 보이긴 하지만…… 혹시 신체 내부가 진탕되어 있는 걸지도.

재빨리 속에서 포션을 꺼내려는 순간. 타냐가 살짝 찡그린 얼굴로 옷을 털며 일어났다.

“……멀쩡해 보이네?”

“평소에 신체 보호 부적 소지하고 다니거든.”

“……그래?”

준비성도 철저해라. 얘가 몇 년 전 어수룩하던 그 녀석이 맞나?

속으로 남몰래 감탄하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보다 어떻게 된 거야? 뭐가 잘 안 됐어?”

“나도 잘 모르겠어. 뭘 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타냐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내 뒤를 바라봤다.

“이건 그냥 추측이긴 한데…… 아마 네 영혼이 너무 강해서 일어난 일 아닐까?”

“영혼이 너무 강해서?”

“응. 등급 차이 나는 마법사 사이에서도 비슷한 현상 일어난다는 말 들어 본 적 있거든.”

“혹시 위차 적응 얘기하는 거야?”

위차 적응.

저성급 공격 마법이 고성급 방어막에 닿았을 때 밖으로 커다란 충격파를 발생시키는 현상이다.

이유야 뭐…… 격의 차이니 뭐니 대충 둘러댔던 기억이 난다. 어차피 판타지니까 크게 중요한 얘기도 아니었고.

어쨌든 그 위차 적응과 지금 상황은 꽤 유사해 보이긴 한다.

내 영혼이 강력하다는 건 무려 여기 주신인 키탄이 인정하기도 했었으니까.

잠시 고민에 빠져 있는데, 타냐가 살짝 얼굴을 붉히며 말을 이었다.

“아, 응. 위차 적응. 나도 알고 있었어.”

“그러냐.”

별로 단어 생각 안 났다고 부끄러워할 건 없는데. 그래도 신경 쓰는 거 같았기에 괜히 뭐라 하지는 않았다.

“아무튼, 지금 시점에선 그게 가장 타당해 보이긴 하네. 어느 쪽이든 실험은 여기까지만 하는 게 낫겠다.”

“……진짜로? 분명 더 계속하자고 재촉할 줄 알았는데.”

타냐가 의심스럽다는 듯 나를 올려다봤다.

얘가 사람을 뭐로 보고.

“그건 나 혼자 위험을 부담할 때고. 너까지 피해 입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계속하자고 고집할 정도로 무책임하진 않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 바로 고개를 돌렸다. 바깥에서 저택 내부에 있던 사람들은 물론, 훈련장에 있던 카일과 릴리아까지 전부 몰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일단 지금은 저기 변명할 거리부터 생각하자. 네 능력에 대해서 알아내는 건 이후라도 상관없으니까.”

“……응.”

타냐가 어쩐지 힘없으면서도 상기된 목소리로 답했다.

* * *

사람들에게 변명하는 건 비교적 쉬웠다. 그냥 내가 이번에 얻은 힘 좀 실험해 보다 일어난 일이라고 둘러대니 ‘또?’ 하는 눈으로 바라보고 말았으니까.

카일이 이전과 달리 존경의 시선으로 바라본 건 예상외였지만, 이 역시 대수로운 건 아니었다. 오히려 나의 대단함을 이제야 눈치챈 것이 더 이상한 일 아닌가.

어쨌든 진짜 문제는 리카르도였다.

그 늙은이, 황녀님을 실험 대상으로 삼은 거냐며 어찌나 난린지. 타냐가 비호해 줘서 살았지, 아니었으면 아이언 때의 PTSD가 다시 도질 뻔했다.

그 정도 경지 되면 때리는 방식이 정착이라도 되는 건가. 성격은 딴판인 사람들이 주먹이 먼저 나가려는 건 똑같으니.

“…….”

나는 어제의 기억을 심연 속으로 묻어 버리고 걸음을 재촉했다. 굳이 남겨 둘 만큼 좋은 경험은 아니었으니까.

아무튼, 목적지는 노블레스 본부. 3년쯤 전에도 몇 번 방문했던 곳이다.

완전한 을이었던 그때의 추억을 회상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눈이 부실만큼 화려하고 거대한 건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쓸데없는 데 돈지랄하는 건 여전하구나.

상념과 함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카운터의 직원이 놀란 얼굴로 일어섰다.

“호, 혹시 리안 님이십니까?”

“맞아요. 오늘 테이어 테르베로츠 님과 면담 약속을 잡았는데, 아직 유효한가요?”

“물론입니다! 바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직원은 귀빈이라도 만난 것처럼 각을 잡은 채로 말했다. 근처의 사람들이 수군대는 걸 들어 보면 원랜 저러지 않았다는 게 자명했다.

‘저 거만한 놈이 저렇게 나오다니, 상대는 대체 누구지?’ 따위의 대화가 오가고 있었으니까.

이럴까 봐 미리 소리 차단해 두길 잘했다.

나는 쓰게 웃으며 별말 없이 직원의 뒤를 따라갔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란 문 앞에 도착했다.

똑똑.

“테이어 테르베로츠 님. 성자…… 리안 님께서 오셨습니다.”

“들어오게.”

안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옴과 동시에 직원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바깥에서 살짝 비켜선 뒤 고개를 숙인다. 살짝 목례해 주고 내부로 들어섰다.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펜을 내려놓으며 나를 바라봤다.

“오랜만이군. 그때 그 꼬마가 이렇게나 클 줄이야……. 좀 감회가 새로운걸.”

일상적인 안부 인사 같지만, 표정은 그렇지 않다. 먹잇감을 노려보는 뱀 같달까.

나는 피식 웃으며 말없이 소파에 앉았다. 기선제압을 위함이다.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난 아직 앉으라고 허락한 적 없네. 아무리 내 아들놈 친구라고는 하나, 방금 그건 분명히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야.”

“글쎄요. 그렇게 따지면 저도 딱히 자경단의 성립을 허락한 적은 없습니다만. 그래도 조용히 넘어갔죠.”

순간 테이어 테르베로츠의 몸이 흠칫 굳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바로 태연한 안색으로 반박해 왔다.

“자경단은 내가 성립한 게 아닐세. 내 아들인 자이어가 만든 거지. 도시를 안정화시키겠다는 녀석의 뜻이 기특해 아비로서 소정의 돈을 기부하고 있는 것뿐이야.”

“옆집 개도 안 믿을 변명은 거기까지 하시죠. 자이어가 원했다고는 하나, 테이어 님이 허락해 주지 않았다면 자경단이 성립하는 일은 없었을 거 아닙니까. 그리고 테이어 님이 하나뿐인 후계자를 그리 손쉽게 놓아 주는 것도 이상한 일이고요.”

“그게 이상해서 이제 와 따지러 왔다는 건가? 게다가 만약 그렇다 해도 그걸 왜 자네에게 허락받아야 하는지 모르겠군.”

“시기가 문제입니다. 자경단 성립된 때가 마침 저희 리안 상회가 막 커지고 있던 시점이니까요.”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전체적인 크기는 비교가 안 됐을지 모르나, 상회는 그 당시에도 레이튼을 양분하는 세력이었습니다. 한데 상대방 쪽에서 통보도 없이 일방적인 무력 단체를 설립해 버리는 건, 사실 싸우자는 말과 다를 거 없지 않겠습니까?”

도시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함이라는 명분은 아무런 상관도 없다.

설립자가 노블레스 직계 후계자고 돈 대주는 것도 노블레스인데, 대체 그 누가 자경단이 사조직이 아니라 믿겠는가?

말이 자경단이지, 사실 노블레스 사조직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백프로였다는 소리다.

그때,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다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자네 상회에서도 자경단에 기부를 많이 했을 텐데? 나는 그걸 허락의 간접적인 표현으로 봤네.”

“허락은 일을 벌이기 이전에 받아야 하는 거지요. 성립된 이후에 받는 건 용서입니다.”

테이어 테르베로츠의 눈이 살짝 꿈틀했다.

“……지금 자네가 감히 나를 용서했다고 하는 건가? 창립한 지 5년이 채 안 된 상회가, 대륙과 역사를 함께한 우리 노블레스를?”

“네. 바로 보셨습니다.”

나는 미리 준비되어 있던 찻잔을 들어 올리며 담담히 말했다.

“저는 그때 이미 한 번 노블레스를 용서했습니다. 이유는 자이어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곳이라는 것 단 하나뿐이었죠. 그 외엔 노예 거래부터 시민 착취까지……. 굳이 남겨 둘 까닭이 전무했습니다.”

“……자네가 마음만 먹으면 노블레스를 없앨 수도 있었다는 소리로 들리는군.”

“제가 못 했을 거라 보십니까?”

물으면서 테이어 테르베로츠를 조용히 올려다봤다. 그는 아무 말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더니, 이내 얌전히 소파에 앉았다.

“……혹시 그 제국 1기사단을 자경단에 넣은 것도 경고의 일종이었나?”

“아시고 계실 줄 알았습니다. 겸사겸사라고 해 두죠. 저도 설마 1기사단을 제 밑에 둘 수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으니까요.”

“어쨌든 경고의 의미는 맞았다는 거군.”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쓰게 웃었다.

“결국 다시 이 질문으로 돌아오네만,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이젠 규모마저 자네가 압도적이니 알아서 복속하라 이건가?”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나와 마찬가지로 찻잔을 들어 올렸다. 생각보다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사실 자네에게 레이튼의 성자니 뭐니 하는 별명이 붙을 때부터 이렇게 될 걸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지. 한 도시에 두 마리의 사자가 살 수는 없는 법이니까. 혹시 거부하면 도시에서 쫓아낼 건가?”

“개인 재산은 보존해드리겠습니다.”

“온건하군. 나 같으면 목숨까지 뺏어서 후환이 생기는 걸 막았을 텐데.”

“아무리 그래도 친구 아버지 목숨을 뺏을 순 없으니까요. 만약 후환이 일어난다면 그때 한 번 고민해 보겠습니다.”

내 말에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웃음을 터뜨렸다.

“죽고 싶지 않으면 얌전히 있어라, 이 말이군. 좋네. 어차피 이만큼이나 차이가 벌어졌는데 발버둥 칠만큼 아둔하진 않으니까.”

“순순히 협력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리는 부상단주 다음 가는 곳으로 마련해 두지요.”

“부상단주는?”

“거긴 이미 내정자가 있는지라.”

이때까지 열심히 상회를 운영해 온 영감에게 갈 자리는 있어야 하지 않겠나. 테이어 테르베로츠도 그를 생각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리안 상회 3인자 정도면 그럭저럭 만족할 수 있지. 하지만 그 대신 나를 따라오지 않는단 녀석들까지 굳이 설득하진 않을 걸세.”

“저도 그런 사람들은 됐습니다. 고개 숙여 모셔 올 만큼 탐나는 건 테이어 테르베로츠 님밖에 없으니까요.”

“그래도 한때는 대륙 제일이었던 상단을 날름 삼킨 것치곤 아부가 조금 약하군.”

“이해해 주시지요. 여태 아쉬운 소리 할 만한 경험이 별로 없었던지라.”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피식 웃었다.

“그렇긴 하겠지. 후작 대리에 대륙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상단. 거기다 2급에 달하는 실력까지 있으면 어딜 가도 고개 숙일 필요가 없었을 테니.”

“……벌써 그런 얘기까지 퍼졌습니까?”

아직 교단에서 있었던 일이 퍼지기에는 조금 멀었을 텐데. 1기사단과 대련한 건 우리들끼리만 비밀리에 행했고.

“말했듯, 그래도 한때는 대륙 제일이었던 상단이니까. 아무리 제국 멸망 이후 규모가 확 쪼그라들었대도 아직 정보망은 남아 있네.”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이고 말을 이었다.

“아무튼, 이제 정말로 한배를 탄 사이니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는가?”

“전부 대답해 줄 수 있다는 보장은 못 드리지만, 뭐든 물어보시지요.”

“자네의 궁극적인 목표는 뭔가?”

그 말에 잠시 뜸 들이다 입을 열었다.

“아직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비밀이라서가 아니라, 저도 아직 생각 중이거든요.”

“그럼 표현을 좀 달리하지.”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단번에 찻잔을 넘긴 후 나를 마주 봤다.

“이 도시에서 이루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표가 뭔가?”

“……그 질문이라면 흔쾌히 대답할 수 있겠군요.”

나는 아직 뜨끈뜨끈한 찻잔을 내려놨다. 그리고 테이어 테르베로츠와 시선을 맞추며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저는 레이튼을 완벽한 독립 도시로 만들 겁니다. 세 왕국과는 완전히 별개인 하나의 국가처럼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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